1.
어제는 2024. 10. 24. 목요일.
대전 C고등학교 졸업생 가운데 서울에서 사는 동창생 몇 명이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로 나왔다.
잠실 아파트에서 사는 나는 석촌호수로 나갔고, 친구를 만나서 석촌호수를 천천히 걸었다.
한 바퀴는 2,565m. 송파구 석촌동에 사는 친구가 발가락이 아프다며 천천히 걷기에 석촌호수 한 바퀴 반만 돌았다.
한 시간 남짓 걸렸다.
석촌동에는 재래음식점이 즐비하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인근에 있는 커피숖에 들러서 커피를 마셨다.
일행 중 교사출신인 S.
그는 학생을 가르쳤기에 한국사에 관해서 해박한 지식이 많을 터.
그는 "박정희대통령 때문에 우리나라가 부강해졌다"고 말했다.
박정희대통령을 지지하는 발언에 대해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나는 국사 교수, 교사 출신이 아니기에 박정희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다.
박정희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자료를 검색하기 시작한다.
2.
박정희는 1979. 10. 26. 부하인 김재규의 총에 맞아서 눈감았다.
그 직후에 전두환 노태우 일당은 1979. 12. 12군사반란을 일으켜서 최규하대통령을 내쫒고, 정권을 탈취했다.
이듬해 1980. 5. 17.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유명 정치인을 체포 구속했다.
다음날 5월 18일 이에 대항하는 광주시민 시위가 시작되었다.
1980. 5. 18 ~ 5. 27.발발
군대(특전사 등)는 민간시위대에 총검을 휘둘러서 많은 시위대를 살상했다.
피해자 통계는 정확한 게 아니다. 숨기고 감췄기에.
인터넷으로 광주사태 피해자 통계를 검색한다.
1979년 10월 26일 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32구경의 월터PPK는 유신의 심장을 향해 쏘았다. 18년간의 박정희 유신정권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10·26사태로 박정희가 암살된 후 전두환 등의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과도 정부를 무력화하고 정승화계엄사령관을 체포하면서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한다.
1980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서리는 국내의 모든 정보기관을 장악한다. 1980년 5월부터 신군부의 움직임에 대한 반발로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신군부세력들은 집권계획에 방해가 되는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5월 17일 24시 정치활동 금지령·휴교령·언론 보도검열을 내용으로 하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을 포함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 수천 명을 감금, 국회를 봉쇄한다.
이에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5월 18일에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 해제'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가 시작된다.
1980년 5.17. 내란 사건을 통해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여야 정치인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 및 재야 세력을 모두 체포하고,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면서 군부독재의 발판을 마련했다.
광주사태는 광주민주화운동라고 불리운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1) 사망자 165명, 사망인정 실종자 70명, 사망비인정 실종자 300여명, 상이후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 구속 및 구금 피해자 1589명, 사망자 수천명....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의 노인이 6.2%를 차지하고 있다.
가해자인 전두환, 노태우일당은 김영삼정권 때 '12·12, 5·18 재판'으로 “반란수괴”, “반란모의 참여”, “반란중요임무 종사”, “상관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등의 혐의로 사형, 무기장역 등의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피고인 14명 모두 복역 8개월 만에 특별 사면됐다.
2) 광주민주화운동은 사망자 163, 행불 166, 부상 뒤 숨진 이 101, 부상자 3,139, 구속 등 기타 피해자 1,589 등 총 5,189명의 피해자를 낸 대형 참극
* 추가 보완 : 광주시가 지난 2009년 5·18 민주화 운동 29년을 기념해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
공식 사망자는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으로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
1997년 12월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 당시에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김영삼 대통령 임기 내 사면을 주장한 데 이어,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전·노 씨의 추석 전 사면을 김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해 정치권에 파문이 예상된다.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는 31일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을 추석 전에 사면하도록 김 대통령에게 곧 건의할 뜻을 밝혔다고 이 대표의 핵심 측근이 전했다. 이 측근에 따르면, 이 대표는 이날 오후 두 전직 대통령 사면 문제와 관련해 “이 문제를 이른 시일 안에 매듭짓는 게 바람직하다”며 “이번 추석 때라도 이들을 석방해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도록 하는 게 국민통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97년 9월 1일 <한겨레> ‘이 대표 “전·노 추석 전 사면”’」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접선출. 1997.12.18)
한나라당-이회창
국민회의-김대중
국민신당-이인제
국민승리-권영길
공화당-허경영
바른정치-김한식
한국당-신정일.
* 이들은 자신에 대한 투표율을 높이고자 '전두환 사면'을 선거공약했다!
대통령선거 후보자 김대중, 이회창 등은 국가 반란죄를 짓고 사형 선고를 받은 전두환을 사면건의했다.
선거가 끝난 뒤 4일째인 1997. 12. 22.사면한 김영삼대통령도 정의롭지 못했다. 김영삼은 대통령직 퇴임 2개월 전에 사면조치를 했다.
누구가 그를 용서했다는 말인지, 특사권을 함부로 행사한 결과에 대한 모든 부담을 국민, 아니 시민이 떠 안고 있는 것이다.
*김영삼대통령 재임기간 : 1993년 2월 25일~1998년 2월 24일. 총 1,826일(5년)
전두환, 노태우는 1심에서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6개월을 선고받지만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추징금 2205억원)과 징역 17년(추징금 2628억원)으로 감형되고,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12월 22일 이들을 모두 특별 사면시켰고, 이들은 1998년 복권됨으로서 5·18광주항쟁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 전두환은 가진 재산이 19만원뿐이라면서 추징금을 완납하지 않았다. 일부만 남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당ㅅ 김영삼은 전두환 등의 추징금에 상관없이 그냥 이들을 사면했다.
왜? 의문이 꼬리를 문다.
* 전두환은 퇴임 후 백담사에서 머물렀다.
* 전두환은 교도소에서 징역을 얼마동안 살았을까?
수의 입은 전두환. 노태우 - 1996년 8월 26일 전두환씨와 노태우씨 등이 12·12 군사 반란 및 5·17 내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진압 혐의에 대한 재판을 받고 있다. 전두환씨는 1심에서는 사형 2심에서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이후 김대중 대통령이 동서화합 차원에서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사면을 감행했다. 1996. 8. 26 서울신문 사진.
* 서울신문.... 정말로 엉터리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을 했냐?
아니다.
김영삼대통령이 임기 끝나기 직전 2개월 전인 1997. 12. 22.에 이들을 사면했다!
* 제14대 김영삼대통령 재임기간 : 1993. 2. 25. ~ 1998. 2. 24.
* 제15대 김대중대통령 재임기간 : 1998. 2. 25. ~ 2003. 2. 24.
전두환 노태우는 출소한 이후에는 공식 석상에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함께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국민의정부에서 주최한 전직 대통령 초청 만찬에 함께 참석했고,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식과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식 때도 함께 참석해 옆 자리에 앉았다.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이 함께 공식 석상에 나온 건 2004년 1월 13일, 참여정부가 주최한 전직 대통령 초청 만찬이 마지막이었다.
3.
최근 우리나라 문학계에 국제적인 경사가 있었다.
소설가 한승원의 딸 한강'.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뉴스가 2024. 10. 10. 보도되었다.
한강의 문학 작품은 많다. 그 가운데 하나인 '소년이 온다'.
내 큰딸이 이 소설책을 구했다며 친정인 잠실에 와서 아버지인 나한테 건네주고는 되돌아갔다.
나는 '소년이 온다' 장편소설을 5번이나 거듭 읽었으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더 읽어서, 10번쯤 읽으면 그제서야 소설의 내용을 조금은 이해하려나 싶다.
'소년이 온다'의 주제는 1980년 5월 18일에 발발한 '광주사태'에 관한 내용이다.
무척이나 충격적인 내용이다.
이에 대한 역사자료가 제대로 수집되어서 잘 보관하며, 또한 열람이 쉽게 가능할까?
전혀 아닐 것이다. 극비사항이기에 숨기고 감추고, 축소해서 겨우 조금씩만 사건이 들어날 게다.
시간을 내어서 찬찬히 광주사태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고, 국사공부를 더 해야겠다.
2024. 10. 25. 금요일.
오늘은 2024. 10. 26. 토요일.
맑다.
나는 한강 소설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6번 읽었다.
도대체 무엇을 읽었는지를 모르겠다. 시대적 상황이 마구 혼재되었기에.
'나'가 회상하는데..... '나', 내가,' 너' 등은 여러 명 마구 뒤섞였다.
장소 지명도 마구 뒤섞였기에.
1979. 10. 26.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
1979. 12. 12. 비상당직 근무를 섰다가 숨어서 벌벌 떨어야 했던 상황을 기억하며,
1980. 5. 18. 당시의 상황을 요약하며, 그 이후 공보관실의 상황도 기억한다.
나는 그 당시에도 애써 잊으려고 했다.
수십 년이 지난 2024년 10월 지금 '소년이 온다' 한강의 소설책을 거듭 읽으면서
'역사기록은 거짓, 가짜, 속임수나 후대에 전해진다'라는 말을 재확인한다.
예컨대 "그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명확히 기록한 문서, 사진 등이 보관되어 있는가?
제대로 없을 게다. 대부분 파기했기에.
한강의 위 소설을 더 읽으면서 조금씩 작가의 상상세계로 다가가야겠다.
한강작가는 직접체험하지 못한 채 간접적으로 듣고, 여기에 개인의 상상을 가미한 그렇고 그런 사건이라고 여겨진다.
소설은 그냥 허구의 사실을 꾸며낸 것 뿐이고, 내 기억은 진실된 사실만을 요구한다.
살인자 전두환 노태우 일당을 서둘러서 정치적으로 용서해 주자라고 건의하고, 또 사면해 준 당시의 정치가들 행태는 모두 똑같다.
누가 누구를 탓하랴 싶다.
'권력이 된다면 그 어떤 짓도 다 한다'라고 말한다.
그만 쓸란다. 시시하니까.
2024. 10. 26. 일요일. 밤이다. 무척이나 서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