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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사용되고 있는 저널리즘이라는 말의 뜻은 넓고 좁은 갖가지 의미가 있어 반드시 일정하지는 않다. 가령, 좁게는(이것이 일반적인 정의로 인식되고 있지만) 정기적인 출판물을 통하여 시사적인 정보와 의견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활동, 구체적으로는 신문과 잡지에 의한 활동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넓게는 모든 대중전달 활동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는 비정기적인 것, 출판물 이외의 비인쇄물에 의한 것, 내용적으로는 단순히 오락·지식 등을 제공·전달하는 경우도 포함해서 사용된다. '출판 저널리즘', '라디오ㆍ방송 저널리즘', '영화 저널리즘' 등의 말이 이에 해당된다.
저널리즘의 어원이 라틴어의 'diurna(나날의 간행물)'에서 유래되었다는 점과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만들어지고 사회적으로 정착한 것이 신문과 잡지가 대중전달 활동의 왕좌를 독점하고 있던 19세기 중반 무렵이었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본래는 좁은 의미로 한정되어 사용되던 것이 최근에 와서 오히려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넓은 뜻으로 말하는 저널리즘도 매스커뮤니케이션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매스커뮤니게이션은 대중전달의 사회과정 전체를 가리키는, 종합개념인 데 비해 저널리즘은 그 일부분 또는 하위개념(下位槪念)이며, 주로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미디어(매체) 활동의 측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 저널리즘의 역사는 고대국가의 신문 유사물의 발생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만, 이른바 저널리즘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17∼18세기에서의 시민혁명 과정에 나타난 근대적인 신문ㆍ잡지의 출현, 즉 근대 저널리즘의 성립에서 비롯된다. 근대저널리즘의 역사적 특질은, 그것이 신흥 시민계급에 의해 이룩되고 봉건적·절대주의적 압제에 대항하는 그들의 무기가 되었다는 점에 있다. 지배계급의 언론탄압 속에서 신문ㆍ잡지ㆍ팸플릿을 중심으로 한 저널리즘은 시민계급의 여론과 힘을 결집하는 기관으로서 역사적인 역할을 다해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민혁명 과정에서 ‘언론출판의 자유 획득’이 시민계급의 중심적인 구호였다는 사실이다. 이 요구가 저널리즘의 활성화를 촉구하고 그것이 다시 시민혁명을 뒷받침했다.
이렇게 성립된 근대저널리즘의 기본적인 기능이 근대 시민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정보의 전달과 동시에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적극적인 의견표명에 돌려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거기에 이은 자본주의의 급격한 발달이 대량의 노동자를 산출하자 저널리즘은 이들 새로운 대중 속에 파고들어 독자를 개척하여 저변을 확대해 나갔다. 근대적 테크놀로지의 발달, 도시의 인구집중, 생활수준의 향상, 교육의 보급 등의 현상이 이러한 경향을 한층 더 촉진시켰다. 한편, 저널리즘 자체도 여기에 대응하면서 지금까지의 가내공업적 단계에서 벗어나 급속히 자본주의적 기업화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자본주의 독점단계로의 발전과 동시에 저널리즘은 근대저널리즘에서 현대저널리즘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최근에 사과 한 개가 1만원 한다는 보도가 나오고 마트마다 쌓여 있는 사과 진시장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사과 유통 업자의 저장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시과 상자를 보았다. 그런데 얼마 전 미국의 한 마트에서 충주 사과 한 개가 세일가로 1,900원 한다는 보도를 듣고 배신감마저 느꼈다.이는 비단 사과 뿐만 아니라 배추가격이 폭등해서 16,000원씩 할 때도 농민들은 출하가격에 차등이 없었는데 방송엔 연일 폭등 소식만 요란하고 운송 경매 도소매 유통 과정은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앵무새처럼 상황만 전달했다.
정치 현안 문제는 자신들 입맛대로 해석하고 살을 붙이고 패널들을 등장시켜 여론을 호도하는데 기를 쓰면서 정작 시청자나 국민이 궁금해 하고 민생과 직결된 현안은 찔끔 흉내만 내다 마는 식이다. 지상파 채널이나 종편 방송이나 모두 국민들이 원하는 것보다 정권의 입맛에 맞는 기사거리 찾기에 분주하다.이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저널리즘은 사라지고 너절리즘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방송이나 신문을 보기보다 유투브나 인스타그램 틱톡에 빠져 들어 그곳에서 얻은 정보니 지식들을 여과 없이 그대로 믿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오류가 발생되고 있지만 사회적 공기公器라고 해야 할 언론마저도 좌우 진영 논리에 빠져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며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다.
저널리즘은 주어진 사실과 제보에 대해 팩트를 확인하고 탐사와 추적을 통해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당사자가 있다면 충분한 의견을 듣고, 반론권을 보장하며 사실 번달에 주력해야 한다. 기자의 시선으로 마음대로 추측 보도를 하거나 어떤 정치적 사회적 압력에 의해 입김이 작용하여 왜곡된다면 이미 기자의 저널리즘은 포기하고 너절리즘에 함몰되고 소위 ‘기레기’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 없에 되는 것이 아닌지, 깊이 생각해 봐야할 일이다.
시인 아동문학가
월간 ‘시문학’ 등단, 한국시문학문인회 회장
계간 ‘P.S’ 발행인, 문화앤피플 편집위원
시집: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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