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1장 26절에 “우리의 형상 안에 우리의 닮음처럼 인류를 만들고 그 바다의 물고기와 그 하늘의 새와 짐승과 그 땅의 모두와 기는 것 안에 그들이 다스리게 하자(let them rule)”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라는 말의 기본 형태는 “이르다”인데 “말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God said).
“우리”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삼위일체”라는 견해며, 둘째는 “자기 협의의 복수”(Self-Deliberation)라는 견해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중하시기 위해 복수형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독백으로 말씀하셨다는 견해입니다. 셋째 견해는, “장엄의 복수”(plural of majesty)라는 견해입니다.1)
하나님께서 “우리가 인류(man)를 만들자(Let Us)”라고 말씀하셨는데 “인류(人類)”라는 말은 사람 인(人) 자와 무리 류(類) 자가 연결된 것이고 “사람 인(人)” 자는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서 기대는 모양을 본떴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혼자 서지 못하고 혼자 있으면 넘어지는 것입니다.
“류(類)”라는 말은 “무리”인데 모여서 뭉친 하나의 동아리를 뜻합니다. 사람은 모여서 뭉친 하나의 동아리를 이루며 살고, 혼자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Us) 사람의 무리를 만들자”라고 결심하셨습니다.
“형상”이라는 한자어는 “모양 형(形)”과 “형상 상(像)”이 연결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우리의 모양과 형상 안에 만들자”라고 말씀하셨고 “안에”(in)라는 전치사는 한국 개역 성경에 “을 따라”로 번역되었습니다. 전치사 “in”은 “으로”나 “을 이루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그의 이미지(image)로 만드실 것을 결심하셨습니다.
고대세계에서 형상은 본질을 전달하는 것으로 믿어져 왔습니다.2) 외형적으로 닮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권세와 특권과 관련됩니다. 이성, 양심, 자의식, 영적인 분별력 등은 그 형상의 구현이라기보다는 그러한 목표를 성취하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도구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도구들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신적인 본질에 대한 물리적(物理的) 구현입니다.3) 인류의 이성, 양심, 자의식, 분별에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야 합니다.
“모양(模樣)”이라고 번역된 단어(드무트)는 “닮음(likeness)”인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습을 본떠 인류를 하나님과 닮게 만드신 것입니다. 인류는 지정의, 즉 지식과 감정과 의지에 있어 하나님을 닮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닮음에 따라서 인류를 만드실 것을 결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만드시고서 인류에게 시키실 일을 결심하셨는데 “그들이 다스리게 하자”(let them rule)라고 결심하셨습니다.
“안에”(in)라는 전치사는 이번에 “위쪽에”(over)라고 번역되고 있는데, “안에”(in) 다스리는 것은 “위쪽에” 다스린다는 뜻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다스릴 대상 “안에” 어떤 것들이 포함됩니까?
그 바다의 물고기와 그 하늘의 새와 짐승과 그 땅의 모두와 기는 것을 인류가 다스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것은 그 영광을 반영하는 뜻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모든 생물 안에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창 1:26). 다스리고 임의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을 주시고 위임하신 것입니다.
인류가 생물들을 다스릴 때에, 엄하게 다스리면 안 됩니다(레 25:43). 솔로몬 왕이 다스린 것처럼 지혜를 가지고 다스려야 합니다(왕상 4:24).
사나운 힘으로 다스리고나 맵고 독하게 다스리면 안 됩니다(겔 34:4). 그 약한 것을 강하게 만들고 그 병든 것을 고치고 그 깨뜨려진 것을 묶고 그 추방된 것을 돌리고 그 잃은 것을 찾는 다스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류는 생태계를 이와 같이 다스리지 않았고 사나운 힘으로 다스렸고, 그 결과 수많은 생물들이 멸종되었고 인류 스스로도 자멸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인류를 형성하셨습니다(창 2:4-17).4)
창세기 2장 7절에 “야훼 하나님께서 먼지로(of) 인류를 형성하신 후에 콧구멍에 생명의 숨을 호흡하셨고 아담이 살아 있는 영혼에 되었고”라고 하였습니다.
“지으시다”는 말의 기본형은 “짓다”인데, “재료로 만들다”는 뜻입니다. “형성하다(form)”(야차르)를 개역 성경은 “짓다”로 번역하였습니다.
“형성(形成)”이라는 한자는 “모양 형(形)”과 “이룰 성(成)”으로 되었고, 모양(form)을 이루는 것이 “형성(形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먼지로 만드신 후 콧구멍에 생명의 숨을 숨 쉬시고 그 인류가 살아 있는 영혼에 되었습니다(창 2:7).
창세기 2장 8절에 “하나님께서 동쪽으로부터 에덴에 정원을 심으셨고 그가 거기에 그가 형성하신 그 아담(man)을 놓으셨노라”고 하였습니다.
“에덴(Eden)”은 “즐기다”라는 뜻의 “아단”과 연관되어 있는데 에덴은 ‘즐거움의 정원’, ‘기쁨의 정원’입니다. 에덴은 동쪽에 있었는데, 가나안 땅을 기준으로 하여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근동 지역입니다. 현대 지명으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가 만나는 이라크로 추정됩니다.
“동쪽”이라는 것은 창세기 저자인 이스라엘인의 시각에 “동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모양을 이루신 인류를 에덴 정원 안에 놓으셨습니다. “동산”은 “정원”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아서 “정원”으로 번역합니다.
창세기 2장 9절에 “시각에 탐나고 음식에 좋은 나무를 싹트게 하시고, 그 생명의 나무가 그 정원 중앙에 있고 좋고 나쁜 그 지식의 나무가”라고 하였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그 흙에서 시각에 탐나고 음식에 좋은 모든 나무와 그 생명의 나무와 좋고 나쁜 그 지식의 나무가 싹이 트게 만드셨습니다.
“시각(sight)”(마르에)은 “보다”(라아)에서부터 나왔습니다. “시각(視覺)”은 봄으로써 깨닫는 감각입니다.
“아름답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탐나다”(be desirable)를 뜻하며, “탐(貪)”은 “가지거나 차지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면 가지거나 차지하고 싶은 나무를 싹트게 하신 것인데 정원의 가운데에는 생명의 나무와 좋고 나쁜 지식의 나무도 있었습니다.
한국 개역 성경은 “좋다”라는 말을 “착할 선(善)”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착할 선(善)”을 사용하였지만, “착하다”는 뜻이 아닌 “좋다”는 뜻입니다.
한국 개역 성경은 “나쁘다”라는 말을 “악할 악(惡)”으로 번역하였는데, “악(惡)”이라는 한자(漢字)가 “나쁘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좋고 나쁜” 것을 개역은 한자로 “선악”으로 번역한 것인데 “선악(善惡)”이라는 한자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함께 이르는 말입니다.
“지식(知識)”(다아트)은 “알다”는 동사의 명사로 “알게 된 것”인데 한국어 성경들은 “지식”이라는 명사를 “알다”는 동사로 번역하였습니다.
“좋고 나쁜 지식의 나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번역된 것인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좋고 나쁜 것의 지식”을 전하는 나무입니다.
“선악에 관한 지식”은 전지(Omniscience)를 뜻한다고 주장됩니다.5)
창세기 2장 15절에 “그리고 야훼 하나님께서는 그 인류를 취하셨으며, 그가 그를 에덴의 정원 안에 그것을 섬기기와 그것을 지키게 만드시기에 종사하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끌다”라고 번역된 동사(라카흐)는 “취하다(take)”를 의미하며, “취(醉하다”는 말은 “가지다”, “손에 잡다”, “가지고 가다”를 의미합니다.
“두다”라고 번역된 동사(야나흐)는 “종사하다(put)”를 의미합니다. “종사(從事)하다”는 말은 “일을 좇다”, “일을 좇아 섬기다”를 의미합니다.
“섬기다”(아바드)는 “일하다”(work), “섬기다”(serve)를 의미하며 “힘이나 정성을 기울여 일하다”를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serve”인데 “serving”은 음식으로써 계속 섬기는 일입니다. 명사형은 “service”인데 “섬김”, “봉사(奉仕)”, “받들어 섬김”입니다.
“섬기다”(아바드)를 개역개정 성경은 “경작하다”로 번역하였는데, 흙을 가지고 일하는 것을 가리켜서 “경작하다”(till)라고 합니다(창 2:5).
하나님께서 인류를 에덴의 정원 안에 두신 목적이 두 가지 언급되는데 정원을 경작하고 정원을 지키게 하시려고 인류를 정원 안에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단순히 그 정원을 누리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섬기고 그것을 지키게 하시기 위하여 정원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그냥 놀며 먹게 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일하고 섬기며 살게 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입니다.
농부나 정원지기에게 그 일은 밭과 정원을 경작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것은 단순히 며칠은 좋겠지만 허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섬기며 살라고 사명을 주신 것이 인류에게 복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살 이유가 있고 보람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의 정원을 섬기고 지키기에 종사시키셨으므로 아담은 에덴의 정원을 섬기고 지켜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창 2:15).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셔서 그 동산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아담은 낙원 안에서 빈둥거리며 지낸 것이 아니라 일하면서 지냈습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섬기고 일하면서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창 2:15).
그 일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일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욕심을 성취하려고 열심히 일하여 돈을 법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면서 살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면서 살아야 참된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경작하다”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일하다”나 “섬기다”를 의미합니다. 이 용어는 민수기에서 레위 지파가 섬기는 것에 사용됩니다(민 3:7-8).
그러나 레위 지파만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목사처럼 직접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자들이 있고, 다른 직업에 종사하면서 목사를 도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아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인류는 자신의 일을 섬김을 통하여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섬기게 됩니다. 아담은 에덴을 섬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한 것입니다.
사람은 일을 섬겨서 얻은 결과물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을 섬깁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바칠 것이 필요한 법입니다. 사람의 삶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 되어야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그 아담에 대해 명령하여 말씀하셨습니다(창 2:16).
창세기 2장 16-17절에 “너는 그 정원의 모든 나무로부터 먹을 것이고. 너는 좋고 나쁜 지식의 나무로부터 그것으로부터 절대로 먹지 말 것이니 이는 그것으로부터 너의 먹기의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임이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각종”은 “모든”을 뜻하며 “임의로”는 “자유로이”를 뜻합니다(창 2:16). 아담은 정원의 모든 나무로부터 자유로이(freely) 따먹어도 되었습니다.
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그것으로부터 절대 먹지 말 것이니 그것으로부터 그의 먹기의 날에 그는 반드시 죽을 것임입니다(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줄여 “선악과(善惡果)”라고 합니다. 정원의 모든 나무로부터 임의로 먹을 수 있으나 하나만 금지되었습니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절대로 먹지 말아야 하였습니다. 아담이 그것으로부터 먹는 날에는 그가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만 빼고 다른 모든 과일들을 자유로이 먹어도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만드셨기에 인류의 주인(主人)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왕으로 만드셨을지라도, 인류 위에 그 인류를 만드신 초월적인 하나님께서 인류의 주인으로 계시고 더 높은 왕으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왕으로 만드신 후 만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셨지만, 사람은 더 높으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가 되어야만 마땅합니다.
사람은 창조주가 아니며 하나님처럼 스스로 있는 무한 존재가 아니라, 무한(無限)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한계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다스림을 받는 존재인 것을 알기 원하신 것인데, 다스리는 것은 명령권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2. 하나님께서 여자를 지으셨습니다(창 2:18-25).6)
창세기 2장 18절에 “그 인류가 홀로(alone)에 있기가 좋지 아니하나니 그에게 그의 맞은편과 같이 조력자를 만들 것이라(will)”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산다는 번역은 “인류가 홀로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가 홀로 있기가 좋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인류가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가 홀로 있는 것을 좋지 않은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미혼의 청년들은 좋지 아니한 미완성된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을 위하여 힘을 돕는 자를 지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창 2:18). “돕는 자”를 한자어로는 “조력자”라고 합니다.
여자의 기본적인 역할은 남자를 위하여 돕는 조력자의 역할입니다.7)
여자가 남자를 돕는 기본 역할을 망각하면 가정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여자는 남자의 돕는 자로 만들어졌고 주관자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자가 남자 머리 위에 오를 때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남자를 만드셨고 뒤에 여자를 돕는 자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목적은 남편을 돕는 자가 되기 위해서인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서 살 때에 살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뒤집으면 많은 문제들이 생기게 됩니다. 여자는 그 남편에게 복종하며 그 남편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주신 사명은 남편을 옆에서 도우며 사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힘을 보태고 돕는 자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여자들도 이 구절을 받아야 합니다.
여자들은 이 구절을 싫어할지 모르나 엄연히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남자가 먼저 만들어졌고 여자는 남편을 위해 돕는 자로 만들어졌습니다.
죄의 성품이 있으므로 여자들은 이 구절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성 신학자들은 이 구절을 달리 해석하고자 시도하기도 합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의 생각은 인본주의(人本主義)적인 것인데, 사람 근본의 인본주의는 결국 타락한 사람이 만들어낸 주의인 것입니다.
사람은 이와 같은 인본주의와 자기 생각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신(神)의 말씀에 입각한 신본주의의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타락하였고 그 결과 사람의 생각은 심히 왜곡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왜곡된 생각으로 만들어낸 정신 운동이 인문주의입니다.
이런 인본주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 결혼하니까 불행해질 수밖에 없고, 그 까닭에 가정이 평화롭지 못하고 다툼과 싸움이 빈번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돕는 자라는 개념보다는 주고받는 식의 계산으로 살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더욱 받기를 바라고 그렇게 못하면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호감도 이신전심으로 통하기에 결국 자신도 호감을 못 받게 됩니다. 그러면 더욱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상대방을 사랑해야 자기도 상대방에게 사랑 받게 되는 것인데,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기도 상대방의 사랑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남자가 이런 인본주의적인 여자와 결혼하면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온통 세상 가치관을 가지고 삶을 사니까 동상이몽으로 불행한 것입니다.동상이몽을 하고 있으므로 돕는 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남편이 꾸는 꿈을 함께 꾸며 같은 방향을 보고 옆에서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3인칭 남성 단수인 “그”를 위하여 만드신다고 말씀하셨고, 그런 까닭에 여자들에게는 남편을 위하고 돕는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여자들이 남편을 잘 돕는 것이 하나님께서 여자들에게 주신 사명이고, 여자들이 이 사명을 잘 감당하면서 살 때에 살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남편을 도와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온통 세상의 가치관과 인본주의 정신 체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같은 목적으로 협력하지 않고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사니까 불행합니다.
여자는 주도권자가 아니라 돕는 자인데 여자가 주도하면 불행합니다. 여자가 가정에서 주도하려고 하면 그 가정은 불행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가 사명을 망각하고서 머리가 되려고 하면 창조 질서에 어긋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 질서에서 벗어났기에 행복할 수 없는 것인데, 악마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벗어날 때에 행복할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자기주장을 고집하고 관철하며 살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악마는 드라마나 영화로 사람들에게 인본주의 가치관을 주입시켰으며 그런 가치관으로 살면 행복하다고 속였으나 그 결과는 반대인 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있으니 아내는 남편을 돕는 자가 되어야 된다고 말하면 많은 것을 배운 현대 여자들은 ‘왜 나만 도와야 돼?’라고 묻는 것입니다.
여자는 그 남편을 돕는 자로서 살아가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입니다. 이럴 때에 이 땅에 사는 동안 행복이 있고 천국에서도 상이 큰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1절에 “하나님께서 아담 위에 깊은 잠을 떨어지게 하시고 아담이 잠자고, 하나님께서아담의 갈빗대들 가운데서 하나를 취하신 후 살을 그것의 대신에 닫으시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떨어지게 하시고 아담이 잠자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의 갈빗대 중에 하나를 취하시고 살로 대신 닫으셨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능가하기 위해 그의 머리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또한 남자에 의하여 짓밟히기 위해 그의 발로부터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그에 의하여 보호되기 위해 그의 심장 가까이로부터 만들어졌습니다.8)
창세기 2장 22절에 “야훼 하나님께서는 그 갈빗대를 여자에 지으시고 그가 그녀를 아담에 데려오시고(bring).”라고 하였습니다.
악마는 결혼을 싫어하고 인류를 감소시키는 일을 매우 좋아합니다.9) 결혼의 창시자는 하나님이시니, 결혼제도는 존중되어야만 합니다.10)
아담이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뼈들로부터 뼈고 나의 살로부터 살이라 이것에게 ‘여자’라고 불릴 것이니 사람으로부터 취함을 받았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창 2:23).
아담은 여자가 그의 뼈로 만들어진 존재임을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남자로부터 취함을 받았기 때문에 ‘여자’로 불리게 되었습니다(창 2:23). 그녀는 죄가 없고 부패되지 아니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그녀와 달리, 이후의 모든 여자는 죄의 성품을 가지고 태어날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그러므로 사람이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고 그 아내에 결합하고 그들이 하나의 육체에 되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父母)”라는 말은 “아버지 부(父)”와 “어머니 모(母)”가 연결되어,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을 함께 가리키는 말입니다.
베트남어로는 “아버지 부”가 “보”, “어머니 모”가 “메”라고 발음됩니다.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아내와 함께 새로운 가족을 만듭니다.
사람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그의 아내 안에 결합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의 아내 안에 “결합(結合)”하는 것이 “결혼(結婚)”입니다.
“몸(flesh)”으로 번역된 단어(바사르)는 “육체(肉體)”를 뜻합니다. 사람과 그의 아내가 “하나의(one) 육체에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가 한 몸에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11) 출생에 의한 관계보다도 가까운 관계가 되어야 함을 뜻합니다(창 2:24).
다시 말하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부모와의 관계보다 가까워야 하니 남편과 아내는 부모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한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부모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또 태어날 때 자연히 생긴 형, 오빠, 언니, 동생보다 가까워야 합니다. 언니나 동생은 한 육체가 될 수 없지만 남편과 아내는 한 육체가 됩니다.
또 이 관계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한 육체를 이루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특성을 이해하는 일에 도움을 줍니다.12)
둘이 하나에 육체에 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을 반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세 위격으로 계신 동시에 일체로 연합을 이루신 것입니다.
결혼생활은 부부가 하나님을 본받게 되는 삶의 과정의 중심입니다.13) 한 몸의 연합은 예수님과 교회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일이 됩니다.14) 결혼은 신앙인의 영적 성장과 신앙 성숙을 위해서 마련되었습니다.15) 남자와 여자는 결혼생활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고 그 결과로 하나님과 더 친밀한 교제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16)
결혼 관계의 목적이 각자의 소원과 기대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남편과 아내는 서로 다른 목적을 추구하다가 충돌하고 부딪힐 것입니다. 그 반면에 부부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함께 추구하는 관계로 바뀐다면, 부부는 서로를 격려하며 신앙의 길을 동행하는 협력관계가 될 것입니다. 부부는 한 몸이 되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17)
아내가 남편을 돕지는 않고 돈 벌려고 산다면 결혼을 왜 한 것입니까? 돈 벌기 위해 결혼한 것입니까?
가정은 서로를 향한 순수한 사랑이 있을 때에 복된 가정이 될 것이며, 상대를 이용하고 자신은 손해 보지 않으려고 계산할 때에 불행해집니다.
남편과 아내가 한 몸에 되라고 명령하셨는데 상대방은 나의 몸입니다. 상대가 아프면 내가 아픔을 느끼고, 상대가 좋으면 내가 좋아야 합니다. 부부가 한 몸이기에 상대를 불행하게 만들면 나도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다른 목적을 가지면 둘 사이에 다툼이 생기고 불행하나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을 위해 똑같은 목적을 가지면 가정이 행복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면 결국 불행은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아내의 태도가 아내에 대한 남편의 애정을 사라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바람피운다면 그런다고 바람피운 남편이 잘못하였지만 남편을 바람피우고 싶은 마음으로 내몬 아내에게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집에서 무시를 당하다가 자기를 세워 주는 여자를 만나게 되고 그렇게 그녀랑 같이 있으면 자존감이 충족되니까 바람을 피우게 됩니다.
아내는 자신이 남편을 무시한 업보로 이런 결과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바람피우는 것이 정당하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부부 사이가 좋으면 다른 이성을 만나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지만 집에서 무시당하다가 자신을 높여 주는 여자를 만나니 흔들리게 됩니다.
결혼하고서도 자기 부모를 우선시하면 부부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18) 남편이 결혼하고도 엄마에게 의존하는 마마보이가 되면 안 됩니다.19)
아내는 결혼하고도 친정 엄마를 너무나도 좋아하여서는 안 됩니다.20) 아내가 남편보다는 친정 부모에게 친밀감으로 행동하면 안 됩니다.21) 부모에게 매우 많은 것을 주면서 남편에게 아무 것도 안 하면 안 됩니다. 결혼을 했으면 남편을 더 소중히 여겨야만 아내도 행복해지는 법입니다. 남편을 위해 아무런 희생도 하지 않고 계산적이면 자기가 불행해집니다. “결혼”은 사람이 자신의 부모를 떠나고 자신의 짝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1) 천사무엘, 『창세기』,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67.
2) John H. Walton, 『창세기』, NIV 적용주석, 김일우·전광규 역 (서울: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2007), 182.
3) Walton, 『창세기』, NIV 적용주석, 184.
4) Dorsey, 『구약의 문학적 구조』 (고양: 크리스챤출판사, 2003), 64.
5) Wenham, 『창세기 1-15』, WBC 성경주석, 177.
6) Dorsey, 『구약의 문학적 구조』 (고양: 크리스챤출판사, 2003), 64.
7) 김상복, 『잃어버린 왕좌』 (서울: 선교횃불, 1993), 135.
8) Gordon J. Wenham, 『창세기 1-15』, WBC 성경주석 1, 박영호 옮김 (서울: 솔로몬, 2006), 186.
9) 이양호, 『루터의 생애와 사상』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184.
10) 목회와 신학 편집부, 『종교개혁과 칼뱅』 (서울: 두란노 아카데미. 2010), 195. 박은주, “결혼신학의 흐름과 교회의 적용”, 45에서 재인용.
11) 문진형, “돕는 배필의 목적: 장년 교육의 패러다임으로서 성경적 결혼관에 대한 고찰”, 『신학과 실천』 제73호 (2021): 734.
12) 문진형, “돕는 배필의 목적”, 735.
13) 문진형, “돕는 배필의 목적”, 736.
14) 문진형, “돕는 배필의 목적”, 737.
15) 문진형, “돕는 배필의 목적”, 738.
16) 문진형, “돕는 배필의 목적”, 739.
17) 문진형, “돕는 배필의 목적”, 740.
18) 다카쿠사기 하루미, 『당신도 내 맘 좀 알아주면 좋겠어』, 유윤한 역 (서울: 더난출판, 2018), 30.
19) 다카쿠사기 하루미, 『당신도 내 맘 좀 알아주면 좋겠어』, 32.
20) 다카쿠사기 하루미, 『당신도 내 맘 좀 알아주면 좋겠어』, 33.
21) 다카쿠사기 하루미, 『당신도 내 맘 좀 알아주면 좋겠어』,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