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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생명력은 말씀과 기도다 (행3-6)
2026년 8월 7일 (금요일)
찬양 : 십자가를 질 수 있나
본문 : 사도행전 6:1-7절
☞ https://youtu.be/P3lBEBl68n0?si=1nBCFRWlRa2wZo8L
어제는 이 여름 홀로 라마나욧선교회를 이끄시고 계시는 박종오 목사님, 그리고 웨이브리즈 플랫폼을 이끄시는 송수민 대표와 함께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또 땡스기브의 아름다운 행보를 잠시 듣고 볼 수 있었다.
뜨겁다 못해 두려운 여름이지만 많은 변화와 도전의 시간이 있었음에 감사하고 기대가 되고 새로워질 라마나욧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어 행복했다. 창가에는 예민하다는 호야라는 꽃이 아름답게 피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어 사진도 찍었다. 더위가 호야에게는 힘이 되었나 보다.
오늘은 중보기도 세미나 강의교재 편집을 마무리하고 목회사관학교 강의안을 최종적으로 다듬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제는 후반전 사역을 위한 체력과 영력과 지력을 조금씩 단련해 가야 할 시간이다. 주님, 오늘도 성령이 이끄시는 사람으로 준비되게 하소서.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사도행전 6장에는 성령이 이끄시는 부흥의 한복판에서 피어난 원망과 내부 분열, 즉 교회의 본질을 흔들려는 사탄의 세 번째 방해전략이 기록되어 있다.
부흥은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을 이루었고,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은 다양한 사역의 장을 만들었으며, 그 다양한 사역의 장은 다양한 문제들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런 부흥으로 이루어진 다양함을 따라 사탄은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에 원망을 심으며 분열을 일으켰다. 1절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여기서 초점은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의 차이다. 히브리파 유대인은 이스라엘 본토에서 태어나 아람어를 사용하며, 유대 전통에 깊이 뿌리박힌 주류의 사람들이다. 반면 헬라파 유대인이란 다양한 이유로 외국에서 태어난 유대인들로 유대 땅에 돌아온 사람이며, 당연히 헬라어를 사용하며 헬라 문화에 익숙한 비주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가 되어 부흥을 이루며, 초대교회는 가난한 과부들에게 매일 음식을 나누어주는 아름다운 구제 사역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구제 사역이 점차 확대되어 인원이 너무 많아지다 보니, 언어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지는 일이 발생했다.
단순한 착오였을 수 있지만, 소수였던 헬라파 사람들은 이를 '차별'로 느끼고 주류인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원망은 교회 전체의 위기로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위기에 사도들의 반응이 참으로 놀랍다. 2-4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사도들은 이때 구제 시스템을 개선하거나 사람을 바꾸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이 사건이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임을 간파했다. 즉 사탄이 영적 지도자들을 바쁘게 하여 말씀과 기도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전략임을 간파한 것이다.
교회의 생명력이 말씀과 기도를 통한 생명의 능력임을 알고 그것을 끊어버리려는 사탄의 몸부림임을 사도들은 정확히 알았다. 그리고 그 본질의 자리에 더 집중하는 선택을 했다. 아울러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선택하여 행정적 일을 담당할 일곱 집사를 선택하는 기회로 삼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출된 일곱 집사의 명단이 모두 헬라식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히브리식 이름은 신앙적 고백이 담긴 전통적인 이름으로 요한, 마태, 시몬 등으로 표현된 이름이다. 반면 헬라식 이름은 헬라어 단어의 의미에서 따온 이름이다.
여기 등장하는 일곱 집사의 이름은 모두 헬라식 이름이다. 물론 본토인이면서도 갈릴리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는 헬라식 이름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 중 빌립과 안드레이다.
중요하고 놀라운 것은, 일곱 집사 모두가 헬라식 이름을 가진 이들로 선발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당시 교회의 압도적 다수는 히브리파 유대인이었다. 투표나 힘으로 선택했다면 당연히 히브리파 사람들이 뽑혔어야 한다. 그러나 주류였던 히브리파 성도들은, 상처받은 소수 헬라파 사람들을 위로하고 교회의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100% 포기하고, 재정과 행정을 다루는 모든 자리를 헬라파 사람들에게 내어준 것이다.
이것이 성령이 다스리시는 교회의 위대한 장면이다. 세상은 다수결로 소수를 누르지만, 십자가의 복음은 다수가 소수를 위해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양보하여 아름다운 연합을 만들어 내며 교회 제직 선발의 첫 출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운 결정을 마무리하며 성경은 이렇게 고백한다. 7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과의 교제란 본질적 선택을 하자, 교회는 놀라운 연합을 이루는 선택을 하게 되고 그렇게 원망이 감사로 바뀌자 교회는 말씀이 왕성해졌고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지고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는 엄청난 부흥으로 이어졌다고 고백한다.
여기 나오는 '왕성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아욱사노(αὐξάνω)'는 본래 씨앗이 싹을 틔우고 나무가 자라나듯 '생명체가 유기적으로 성장하고 뻗어나가는 모습'을 뜻하는 단어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사도들이 말씀을 잘 전해서 부흥했다>라고 기록하지 않고, 주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삼았다. 말씀 자체가 마치 살아 숨 쉬는 생명체이자 거대한 군대처럼, 스스로 세력을 얻고 자라나며 사람들의 심령과 예루살렘이라는 도시 전체를 정복해 들어갔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히 4:12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역사한 것이다.
이런 역사 속에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인간의 계산과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폭발적으로 제자가 증식했다는 말이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날마다 말이다.
오늘 묵상은 여기까지 해야 할 듯하다.
이 땅에 세워진 교회 공동체는 늘 사탄의 공격을 받는다. 부흥은 어쩌면 더 큰 공격의 빌미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본질적 사역에 충성할 때 그 모든 위기는 기회가 되어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라마나욧선교회는 지금 지도자의 변화를 이루며 다양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고, 재정적으로도 매우 위태로운 순간에 있다. 그러나 이때 말씀과 기도의 본질적 자리에 집중할 때 우리는 놀라운 선택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하심과 영광을 드러낼 것을 믿는다.
문제를 덮기 위한 인간적 선택이 아니라, 본질적인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는 선택을 할 때 모든 자리는 위대한 결정을 낳을 것이며, 그 속에서 세상이 만들 수 없는 놀라운 고백을 만들어 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는 자리에 서려고 한다. 진정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으로 서서 주님의 생명이 흘러가는 통로로 사역의 마무리를 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갈 것이다.
주님, 오직 말씀과 기도에 집중되어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가는 시간이 되게 하시고 이 위기가 더 아름다운 연합과 방향을 정하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한줄 묵상 :
<문제를 덮기 위한 얄팍한 수단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라는 본질로 돌아갈 때, 교회는 아름다운 연합과 거침없는 부흥을 경험합니다.>
적용 질문 :
1. 선한 일로 바쁘다는 핑계로, 정작 영적 생명줄인 '말씀과 기도의 자리'를 제쳐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당장 회복해야 할 본질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2. 초대교회의 주류였던 히브리파 성도들처럼, 공동체의 하나 됨을 위해 내가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할 나의 '주장'이나 '기득권'은 무엇입니까?
3. 현재 내 삶이나 사역지에 갈등과 위기가 찾아왔을 때, 나는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가는 본질적인 선택을 묻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