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 참사’, 축구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은 ‘삿포로 참사’가 무슨 말인지 모르고 일본 삿포로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가?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축구에 대해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압니다.
‘삿포로 참사’란 지난 10일 한국 축구대표팀 ‘조광래 호’가 일본 삿포로 돔에서 열린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0-3으로 대패한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일본에 3골 차로 패한 건 1974년 9월 도쿄에서 1-4로 경기를 내준 뒤 37년만입니다. 단순히 3골 차로 대패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경기 내용면에서도 완전히 대패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골을 안 먹고 3골 차로 진 것만도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경기력은 형편없었다고 축구를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주심이 경기 종료를 알리자 일본 대표팀은 의기양양하며 환호했지만 한국 대표팀은 머리를 떨구어야만 했습니다.
이 경기에서 한국 대표팀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겨 준 일본 대표팀에 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이 선수의 이름은 이충성. 이충성 선수는 자신을 내쳤던 조국을 상대로 제대로 한풀이를 했습니다. 마치 이 날만을 기다린 듯한 몸놀림이었습니다. 빠른 발과 순간 동작을 앞세워 한국 수비진을 흔들었습니다. 전반 34분 터진 선제골은 이충성 선수가 만들어낸 작품이었습니다. 뒤로 쇄도해 들어오는 가가와를 놓치지 않고 뒤꿈치 패스로 연결했습니다. 이후에도 이충성 선수는 절묘한 움직임으로 동료들에게 슛 찬스를 열어주는 영리한 플레이를 펼치며 삿포로 돔을 가득 메운 4만여 관중을 열광시켰습니다.
이충성 선수는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한-일전을 관전하며 태극마크를 다는 꿈을 꿨지만 돌아온 것은 냉대였습니다. 청소년대표소집명단에 포함되어 꿈에 그리던 파주NFC에 입성했지만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줄 것으로 믿었던 동료들은 등 뒤에서 ‘반쪽바리(재일교포를 낮춰 부르는 말)’라고 수군댔습니다. 꿈에 부풀었던 1주일간의 한국 생활은 악몽으로 변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일본으로 돌아간 이충성 선수는 귀화를 결심했습니다. '민족을 배신했다'는 재일교포들의 따가운 눈총과 ‘자이니치(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를 부르는 일본말)’를 대표로 선발할 수 없다'는 일본 팬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실력을 갈고 닦았습니다. 이름은 ‘충성’ 대신 ‘다다나리’로 바꿨지만, ‘오야마(大山)’라는 정식 일본 성 대신 ‘리(LEE)’라는 한국 성을 유니폼에 새겼습니다. 귀화는 했지만 민족성만은 지키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이충성 선수는 한국과 일본에 대해 묻는 질문이 나올 때마다 “나에게는 한국과 일본, 두 개의 조국이 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한국인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일본인으로 살 것인가? 이것이 항상 이충성 선수를 힘들게 해왔습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정체성 혼란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나라를 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도 왔고 또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져야 할 나라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본 대표로 한국을 상대하여 경기를 하였습니다.
이충성 선수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도 항상 우리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이 땅에서 한 나라의 시민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늘나라 시민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두 영역이 서로 부딪혔을 때 우리는 이 땅의 시민으로서의 삶에 우선권을 두어야 하는지 아니면 하늘나라 시민으로서의 삶에 우선권을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 땅의 시민으로 이 땅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이 땅에서 살 것인가?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 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지만 문화와 이념과 종교가 다른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항상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상생하고 교제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거나 약화시키면 안 됩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빛의 정체성을 포기할 수 없음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밖의 어둠 속에 있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상생과 교제를 위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포기하거나 약화시키면 안 됩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빛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어둠과 상생하고 교제하면 그것은 빛이 아니고 어둠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 상생하고 교제하면서도 우리의 정체성을 약화시키거나 변질시키지 않는 방법이 무엇인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감히 갖지 못하는 시민권이 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 그리스도인은 지금 당장은 세상의 시민권에 매여 있지만 이미 중생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두 개의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미래 시점의 하나님 나라와 현재 시점의 세상에서의 생활을 어떻게 잘 조화시켜 나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항상 제기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아예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리며 하나님 나라의 임재만을 기다리거나 반대로 엄연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생각하지 않고 마치 지상 낙원을 세울 수 있는 것처럼 세상 것에만 탐닉하는 양 극단이 있습니다. 이는 모두 비성경적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과거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 완전히 이루어졌거나 아니면 과거와 현재의 역사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 어느 날 갑자기 임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이미 임했고 또 현재 임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역사 속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끝날 최후의 심판을 통하여 완전히 도래할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과거에 임했으며 또 현재도 우리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왔으나 아직 완전히 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중 하나를 택한 이충성 선수처럼 우리는 이 땅의 시민과 하나님 나라의 시민, 둘 중에 하나를 택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땅의 시민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바른 자세입니다. 이 땅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전히 임할 때까지 우리는 이 세상의 현실 속에서 이 땅의 시민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아는 일에 힘쓰며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으로서의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참 된 모습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