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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지혜서의 말씀 6,12-16
12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3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14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15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다.
지혜를 얻으려고 깨어 있는 이는 곧바로 근심이 없어진다.
16 지혜는 자기에게 맞갖은 이들을 스스로 찾아 돌아다니고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상냥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의 모든 생각 속에서 그들을 만나 준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 4,13-18
13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4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15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16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17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18 그러니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11월의 늦가을입니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온 몸을 내놓아, 소멸하는 것의 아름다움입니다.
질 익어, 사라져가는 것의 아름다움입니다.
“잘 익으면 이렇듯 아름다운 것이 어디 가을뿐이겠습니까” 라고 노래한 이채 님의 <가을처럼 아름답고 싶습니다> 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가을에 오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의 등불 하나 켜 두고 싶습니다
가을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진실한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가을엔
그리움이라 이름 하는 것들을
깊은 가슴으로 섬기고 또 섬기며
거룩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싶습니다
오고 가는 인연의 옷깃이
쓸쓸한 바람으로 불어와
가을이 올 때마다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세월
꽃으로 만나
낙엽으로 헤어지는
이 가을을 걷노라면
경건한 그 빛깔로 나도 물들고 싶습니다
그대여!
잘 익으면 이렇듯 아름다운 것이
어디 가을뿐이겠습니까
그대와 나의 사랑이 그러하고
그대와 나의 삶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는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시기에 와 있고, '위령성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죽음’과 ‘종말’, 그리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전례의 중심을 이룹니다.
제1독서에서는 '참 지혜'이신 하느님을 인격화시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혜’라는 단어 대신에 ‘하느님’이란 말을 넣어서 읽어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하느님)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입니다.
지혜(하느님)을 얻으려고 깨어있는 이는 곧바로 근심이 없어집니다.”
(지혜 6,15)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하신 ‘지혜’를 말해줍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다시 오심’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께로 데려가실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1테살 4,17)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지혜 있는 이들의 삶의 자세’를 말해줍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은 그리스도이시며, ‘혼인잔치’는 하늘나라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기름’은 신앙의 삶을, ‘등’은 그리스도의 빛과 생명을, ‘열 처녀’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신앙인을 표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하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 25,13)
이는 깨어 있되, ‘신랑’을 향하여 깨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깨어 있어야 할’ 우선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신랑’을 맞이하게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음’은 ‘신랑’을 기다리는 것이요, 희망하는 것입니다.
곧 사람이 되어 오신 주님의 ‘첫 번째 오심’을 기억하고,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은 ‘언제나 계시며, 또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깨어 있음’은 곧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리움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임을 자신 안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리움이 있기에 인생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 그리움은 하느님의 개입이 야기 시킨 놀라움이요 경이로움입니다.
그러기에 그 기다림은 순간순간이 그분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드리는 만남의 시간이 됩니다.
그것이 곧 '깨어 있음'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역사를 그저 스쳐 지나서 통과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를 새롭게 하고 변형시키기 위해 역사 안에 임하십니다.
곧 당신의 구원계획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은 아름답고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임’, ‘주님이신 신랑’을 기다리며 그리워하기에 오늘도 행복합니다.
그분께서는 진정 오실 분이시기에,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래서 그리움으로 하여 걸어가고, 그리움을 품고 가기에 그리움은 길이 됩니다.
<그리움이 길이 된다>는 박노해 님의 시를 떠올려 봅니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
그리움을 좋아한다.
나는 그리움에 지치지 않는 사람
기다림이 지켜간다.
그리움이 걸어간다.
이 소란하고 쓸쓸한 지구에
그대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눈물 나는 내 사랑은
그리움이 가득하여
나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기다림이 걸어간다.
그리움이 길이 된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이 걸어갑니다.
그리움이 길이 됩니다.
미래는 현재 안에서, 그리고 현재를 통해서 얻어집니다.
현재 안에서 미래를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종말론적인 깨어있는 삶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구원받은 존재이며, 하늘나라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왔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이미 깨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 비유의 결론은 예기치 않을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할 것이니 ‘깨어 있어라’는 단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뻐 여기시는 행동을 해야 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그러니 이 가을,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살지 않고, 생명의 불꽃을 태우는 성령의 ‘등불’을 켜고 살아야 할 일입니다.
혼인잔치의 기쁨과 사랑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깨어 있어라.”
(마태 25,13)
주님!
눈을 부릅뜨고 깨어 있되, 신랑인 당신을 향해 깨어있게 하소서.
당신을 희망하고 기다리며, 더더욱 갈망하게 하소서.
빛 속에서 은총을 볼 줄 알게 하시고, 그 은총이 얼마나 큰지, 경이로워하고 놀라워할 줄 알게 하소서.
사랑의 등불을 켜들고, 임을 보게 하소서.
임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놀라운 자비와 사랑에 깨어있게 하시고, 당신 사랑에 기름칠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불시의 하느님>
저는 오늘 질문으로 강론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엄마가 자녀의 사랑을 더 원할까요?
자녀가 엄마의 사랑을 더 원할까요?
하느님이 우리의 사랑을 더 갈망하실까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더 갈망할까요?
엄마와 하느님이 더 원하고 갈망하시는데,
그것은 더 큰 사랑이 더 원하고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갈망을 기준으로 하면 이렇게 되는데, 필요를 기준으로 하면 어떻게 될까요?
엄마가 자녀의 사랑을 더 필요로 하지 않고 자녀가 엄마의 사랑이 더 필요로 하고,
하느님에게 우리 사랑이 더 필요치 않고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더 필요하지요.
이와 관련하여 연중시기 감사송은 이렇게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
그렇지요.
엄마의 사랑이 없으면 곧 엄마가 밥해주지 않고 빨래해주지 않고 학교 보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엄마의 사랑이 더 필요한데, 그런데도 자식은 종종 엄마의 사랑은 무시하며 애인의 사랑을 더 갈망합니다.
이것이 오늘 연중 제32주일이 얘기하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연중 제32주일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지혜에 관해 얘기합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사랑이 더 간절하기에 우리가 하느님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고,
집에서 이미 문 앞에 와 계신 하느님을 기다리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독서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를 찾아오는 더 큰 사랑을 앉아 만나지 않고,
오히려 사랑이 작기에 찾아오지 않는 사랑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닙니다.
늘 가까이 있는 엄마의 더 큰 사랑은 제쳐놓고
엄마보다 훨씬 보잘것없는 다른 사랑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늘 가까이 계시고 우리 자신보다 더 가까이 계신 하느님 사랑은 놔두고
멀리 있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찌질한 사랑을 찾아 방황합니다.
시편과 신명기의 주님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당신을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신다.”
(시편 145, 18)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신명 4,7)
그러므로 위대한 족속은 우리 이웃보다 가까이 계시는, 아니 나 자신보다도 더 가까이 계시는 위대한 하느님을 알아보고, 태양으로 계시는 하느님, 바람결에 다가오시는 하느님,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처럼 널브러져 있는 하느님을 알아봅니다.
다음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복음의 비유에서 얘기하는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찾아오시어 거리와 장소적으로 가까이 계시는 분일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언제고 찾아오시는 분이시고 그래서 불시에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저는 불시에 오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시(不時)란 말이 어떤 뜻입니까?
때가 아닌 때라는 말이고 내 때가 아닌 때라는 말이 아닙니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오시지만
그때가 내가 정한 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오십니다.
그 하느님의 때에 늘 그리고 언제나 준비하고 깨어 있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라고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평신도의 사명>
평신도는 “성품의 구성원과 교회에서 인정한 수도 신분의 구성원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이 평신도라는 이름으로 이해된다. 곧 세례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의 백성으로 구성되고,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 왕직에 자기 나름대로 참석하는 자들이 되어, 그리스도교 백성의 전체 사명 가운데에서 자기 몫을 교회와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을”(교회 31)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사명은 현세적 일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관리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일상생활의 현세적 임무를 자기 생활에서 분리시키지 말고 오히려 맡은 일을 하느님의 뜻대로 계속하면서 그리스도님과 일치를 더욱 깊게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평신도 교령)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하늘 나라는 먼 훗날 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충실히 살아야 합니다.
등잔에 기름이 없으면 등잔은 있으나마나입니다.
따라서 등잔불을 밝히려면 언제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을 희망하는 만큼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 25,13)
기름을 채운다는 것은 준비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에 옮긴다는 말씀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천상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행동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실천이 요구됩니다.
주님께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오시더라도 더 큰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누가 보나 보지 않나 언제나 준비된 삶을 살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 바로 그 내일”입니다.
한순간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다짐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능력과 시대의 요구에 따라” 각자의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가르침이 살아있는 삶의 터입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완성으로 한 발 더 내딛기를 소망합니다.
“각자가 받은 은총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서로 남을 위해서 봉사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갖가지 은총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1베드 4,10)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더 높은 기도』: 나는 기도가 기대되는가?>
오늘 복음은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현명한 처녀들은 여분을 가지고 있었고 미련한 처녀들은 챙겨 놓지 못했던 ‘기름’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입니다.
신학에서 “성령과 기름 부음은 동의어로 쓰일 정도”(『가톨릭교회교리서』 695)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붙은 등잔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령의 열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참 포도나무에 접목시켜 주신 그분께서는 우리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23)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736) 주십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미련한 처녀들은 사랑, 기쁨, 평화와 같은 감정들이 사그라졌을 때 성령을 받겠다고 기도하러 가는 사람을 의미하고, 현명한 처녀들은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감정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를 잘하는 신앙인을 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기도와 영성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기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규칙적으로 하느냐’, ‘필요할 때만 하느냐’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막 달리기 경주할 때 선수들은 일정 걸음을 내디딘 후에는 반드시 물을 마신다고 합니다.
사막에서는 땀이 바로 증발해버리기 때문에 목마를 때만 물을 마신다면 탈수증으로 쓰러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탈수증에 쓰러진 선수들을 보면 물통에 물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마셔야 내 것이 됩니다.
만약 수험생 자녀를 위해 어떤 엄마가 100일 기도를 했다면 그 엄마는 영성이 높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필요할 때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녀의 시험과 상관없이 매일 그렇게 기도할 수 있다면 그제야 ‘기름’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환경은 이렇게 기도의 수준이 높아지는 데 큰 방해를 주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만약 미사를 몇 번 했는지, 묵주기도를 몇 번 했는지 보고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이는 묵주기도에 천천히 젖어드는 것을 방해하는 원인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복음 나누기 7단계’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3분 묵상하고 무슨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적어도 30분은 집중해서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묵상은 3분만 해도 된다고 여기게 만듭니다.
그리고 더욱 안 좋은 것은 기도가 ‘부담’이 되게 합니다.
묵주기도를 더 많이 바치기 위해 빨리 바쳐야 하고, 묵상 나누기를 위해 묵상한 것도 아닌 자기 생각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면 레지오도 힘들어지고 소공동체 모임도 부담스러워 나가지 않게 됩니다.
만약 기도가 행복한 것이라면 남이 시키지 않아도 혼자서 꾸준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 큰형은 한때 매일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가위에 눌렸고 심지어 악마에게 공격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귀신 잡는 해병대, 그리고도 수색대 조교였던 형은 자존심상 주님께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느 날은 성호를 긋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날은 오랜만에 편히 잠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다음 날도 성호를 긋고 잤습니다.
그런 습관이 수십 년이 지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형은 이제 성호경을 제대로 긋는 기도의 수준에 오른 것입니다.
이렇게 영성을 높여갈 수 있습니다.
가끔 자기를 키우던 가족이 먼저 죽자 반려견이 매일 무덤에 와서 슬퍼하다가 돌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반려견이 주인을 사랑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한 번 왔다가 다시는 안 온다면 이는 그저 자기 위로일 뿐입니다.
그러나 매일 같은 시간에 온다면 정말 그분과 그분한테서 나오는 사랑이 그리워 오는 것입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살기가 싫다는 한 자매에게 저는 매일 한 시간씩 성체조배를 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20~30%만 꾸준히 실천합니다.
그 자매는 매일 성체조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1년 동안 꾸준히 그렇게 한 이유를 물었더니, 남편이 아닌 자신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남편이 밉지 않고 며칠 만에 집에 돌아와도 밥을 차려주고 이부자리를 마련해준다고 합니다.
미워할 때보다 기도할 때 행복하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자매는 성체조배 한 시간 할 정도로 영성이 높아진 것이고 그렇게 현명한 처녀로 인정받게 됩니다.
사실 기도는 힘이 드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봉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꾸준히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좋은 열매가 맺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매일 새벽 만나를 거두러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열 처녀의 비유>
오늘 복음의 ‘열 처녀’는 ‘신부’가 아니라 신부의 ‘들러리’입니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라는 말은 다섯은 머리가 나쁘고, 다섯은 머리가 좋았다는 뜻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만 성실하게 보이고 내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신앙인들과 겉으로나 내적으로나 항상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들이 섞여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마태 7,24)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마태 7,26)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생활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지혜’이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고 대충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열 처녀가 모두 ‘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모두 신앙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기름’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는 ‘삶’을 상징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의 경우에, 등을 한 번 켤 수 있는 기름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평소의 일상적인 신앙생활에서는 충실한 신앙인들과 잘 구분되지 않고 겉으로 보기에는 잘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의 진짜 모습은 심판 때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산상설교에 있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열 처녀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는 말은 신랑의 도착이 늦어지는 상황을 나타내는, 즉 주님의 재림이 인간들의 생각보다 많이 늦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일 뿐이고, “깨어 있어라.” 라는 가르침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재림과 종말이 늦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일이 이루어지면 너무 빠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조금만 더 늦추어 달라고 간청할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재림과 종말이 아니라 개인의 임종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주인’은 내가(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실제 상황이라면 기름을 나누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비유’이고, 사용된 표현들은 ‘상징’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회개와 신앙생활은 본인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남의 덕’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대신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보속’을 대신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를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경우에도, 믿음을 갖도록 도와줄 수 있고,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데, 믿는 일 자체를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그렇게는 안 됩니다.
“문은 닫혔다.” 라는 말은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문’이라는 말에서 산상설교의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마태 7,7) 라는 말씀을 연상할 사람이 있겠지만, 문을 두드려서 열리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나기 전의 일이고, ‘열 처녀의 비유’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한 번’이고, ‘불가역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신앙생활은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문이 언제 닫히는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지금’ 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는 말은 “나는 너희를 모른다.”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는 들어올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종말과 재림과 심판의 날과 시간이 인간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닥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지혜로운 삶 -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는 삶>
"한 밤중에 소리가 들렸도다, 신랑이 오시니 어서들 마중 나가라."
(마태 25,6)
아침성무일도 즈카르야의 노래 후렴이 참 좋습니다.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 마음이 되어 흥겹게 불렀습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임맞을 준비를 끝낸 11월의 겨울나무들은 늘 봐도 감동입니다.
23년 전 11월 이맘 때쯤 시 두 편을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거기 그 자리의 은행나무들입니다.
하늘향해 쭉쭉 뻗은 은행나무들
임맞을 준비는 끝났다
마침내 사랑 잎들 다 쏟아 노오란 길 만들어 놓고
임 기다리는 은행나무들
너무 아름답고 투명해 슬프고
깊어 고요한 노오란 길 단풍잎 길
묵묵히 임 기다리는 은행나무들
나 이런 사랑 본 적 없다
-2000.11.15
“임 맞을 준비는 끝났다”라는 시입니다.
정말 하루하루 날마다 “임 맞을 준비는 끝났다”라는 준비된 자세로 깨어 살고 싶은 마음은 하느님을 찾는 누구나의 깊은 갈망일 것입니다.
이어지는 그해 11월 말의 겨울나무란 시입니다.
떠나자
떠나 보내자
미련없이 아름답게
나 늘 푸른 사철나무보다
잎들 다 떠나 보낸 겨울나무가 좋다
가난한 겨울나무 앞에 서면 왜 이리 부끄러워질까,
왜 이리 가슴 저릴까
하늘 향해 쭉쭉 뻗은 무수한 나뭇가지들
참 간절한 그리움의, 기다림의 무수한 촉수들
볼 품은 따질 게 아니다
그대로 그리움 덩어리 침묵의 기도로구나
하늘임 향해 쭉쭉 뻗은 무수한 내 그리움의, 기다림의 촉수들
나도 한 그루 겨울나무로구나
그대로 그리움의 덩어리 침묵의 기도로구나
나도!
-2000.11.29.
23년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이 참 많은 사랑하는 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 가니 주변에서 참 어렵고 아픈 분들을, 슬픈 분들을 참 많이 봅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매해 끝무렵의 요즈음 11월 위령성월을 맞이하고 보내며 새로이 묻게 됩니다.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무지의 어둔 삶이 아니라, 지혜의 투명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제 읽은 아름다운 깊은 울림을 주는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좋은 건축에는 그늘이 있다.
나는 좋은 그늘을 설계할 줄 아는 사람이 최고의 건축가라고 생각한다.
내가 우리의 옛집을 좋아하는 것은 그늘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 집들이 드리우는 그늘은 단색조와 단조로운 그늘이 아니라 여러 층을 거느리고 있다.”
집은 사랑입니다.
집은 그리움입니다.
집은 살아 있습니다.
좋은 나무를 닮은, 좋은 집을 닮은 사람들의 그늘 역시 훌륭합니다.
빛과 그늘이 공존할 때 깊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늘이 없는 삶은 깊이가, 생명이, 빛이, 향기가, 조화의 아름다움이 없는 천박淺薄한 삶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봄觀”이란 시입니다.
전체를 보는 것이다
삶은 흐른다
애정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다
가을의 황홀과 겨울의 적요
삶과 죽음
빛과 그늘
젊음과 늙음과
아름다움과 추함
강함과 약함
건강과 병
함께 받아 들이는 것이다
함께 사랑하는 것이다
-1998.11.4.
모든 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됩니다.
말 그대로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모두를 받아들이며 임맞을 준비를 끝낸 겨울나무들처럼 깨어 준비하며 주님 오실 부활의 봄을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로 오늘 말씀들이 답을 줍니다.
첫째, 지혜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질적 병인 무지에 대한 근본적 처방은 지혜뿐입니다.
지혜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지혜를 사랑하여 지혜를 훈련하여 습관화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할수록,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수록 사랑과 지혜, 겸손과 지혜입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지혜, 겸손과 함께 가는 지혜입니다.
사랑-지혜-겸손입니다.
지혜는 찾기 쉽습니다.
정말 지혜를 사랑할 때 눈이 열려 곳곳에 선물처럼 널려 반짝이는 지혜, 살아 있는 지혜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반영하는 지혜의 선물입니다.
지혜를 사랑합시다.
지혜를 갈망합시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가 우리를 지혜로운 삶으로 초대합니다.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지혜입니다.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예지다.
지혜를 찾으려고 깨어 있는 이는 곧바로 근심이 없어진다.”
일부만 인용했습니다만 모든 내용이 귀하고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정말 지혜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일어납니다.
화답송 후렴 중 “당신” 대신 “지혜”를 넣어 부르고 싶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자 지혜자체이기에 이렇게 노래해도 무방합니다.
“주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 지혜를 목말라 하나이다.”
둘째, 희망입니다.
지혜의 빛이듯 희망의 빛입니다.
정말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사는 이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희망과 함께 가는 기쁨입니다.
지혜가 하느님의 선물이듯 희망과 기쁨도 선물입니다.
희망의 샘, 기쁨의 샘이신 주님의 선물입니다.
죽음을 넘어 부활의 희망을 사는 이들이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희망이, 꿈이 없으면 살아 있다 하나 실상 죽은 사람입니다.
꿈이, 희망이 늘 생생해야 나이에 상관없이 늘 푸른 젊음의 삶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꿈에, 희망에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부활의 생명으로, 부활의 희망으로, 부활의 기쁨으로 열려 있는 죽음입니다.
죽음의 문이 활짝 열리면 새로운 시작의 하느님 나라입니다.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는 주님 안에서, 죽어서는 주님과 함께 있는 우리들입니다.
아니 참으로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을 믿으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 삶과 죽음을 넘어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삶입니다.
우리는 이런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 좋은 지혜와 희망의 선물입니다.
셋째, 깨어있음입니다.
늘 깨어 준비하고 기다리며 오늘 지금 여기를 사는 이들이 참으로 지혜로운 이들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깨어 있는 슬기로운 이들에게 시작된 하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열처녀의 비유는 바로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습니다.
다섯의 어리석은 처녀들은 유비무환의 지혜를 몰랐습니다.
참으로 태만하고 무책임했습니다.
하느님의 하루하루 선물의 시간을 최대한 선용하지 못했습니다.
영혼의 등잔에 신망애信望愛의 기름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누구도 탓할 수 없고 탓할 것은 자신입니다.
하느님 부과하는 심판이나 구원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하는 심판이요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하늘의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영혼의 기름 등잔에 신망애信望愛의 기름 가득 채워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하늘 나라 잔치에 신랑인 주님과 함께 입장했는데, 뒤늦게 기름을 마련하여 도착한 이들에게 문은 닫혔고 입장은 좌절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아무리 후회해도 늦습니다.
언제 주님이, 죽음이 도래할지 모릅니다.
아니 늘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늘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닫힌 문을 통해 들려온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청천벽력같은 말씀입니다.
평생 주님과 함께 살았다 자부하는데 우리를 알지 못한다니요.
내 좋을 대로 주님을 짝사랑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랑할 때 압니다.
사랑과 앎은 함께 갑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기에 하느님을 몰랐던 어리석은 처녀들이었습니다.
사랑의 앎의 지혜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아무리 배워도 초보자인 사랑 공부, 평생 배워야 하는 공부가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공부입니다.
과거는 지났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가 중요합니다.
주님은 회개한 이들의 과거는 불문에 붙이십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참으로 용기를 내어 우보천리의 자세로 겸허한 자세로 겨울나무가 되어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하십시오.
희망을 사랑하고 추구하십시오.
깨어있음을 사랑하고 추구하십시오.
한결같이, 끊임없이, 하루하루 날마다 이렇게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니 걱정안해도 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오시는 주님을 만날 시간입니다.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 25,13)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였습니다.
짧은 말이지만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분수를 알라.’는 뜻입니다.
성서를 보면 분수를 모르고 하느님과 멀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시작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낙원’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만했던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은 후 하느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많은 능력으로 업적을 쌓은 사람도 인생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모세는 그 또한 하느님의 뜻임을 알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일은 ‘여호수아’의 몫임을 알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보면서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였습니다.
자신의 역할은 광야에서 길을 내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기꺼이 예수님께 자리를 양보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교회를 개척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씨를 뿌리고, 아폴로는 거름을 주지만 키우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나 자신을 아는 첫 번째 길은 ‘겸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교만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와 겸손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으면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시작은 ‘겸손’입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은 만물에 생기를 주는 자양분입니다.
순리대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막히면 돌아가고, 기꺼이 낮은 곳에 머물기 마련입니다.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고,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납니다.
다투지 않고, 상처를 주거나 받지 않습니다.
그 유연성이 만물에 덕이 된다고 합니다.
성서를 보면 분수를 모르고 하느님과 멀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그 시작은 ‘카인’입니다.
카인이 하느님과 멀어진 이유는 ‘분노’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생 아벨의 제물을 받아 주셨지만, 카인의 제물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분노한 카인인 동생 아벨을 들판에서 죽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자기 제물을 받아 주실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카인이 자신의 분수를 알고, 하느님께 더 합당한 제물을 준비했다면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제물을 받아 주셨을 것입니다.
동방박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지 않고 다른 길로 갔을 때입니다.
분노한 헤로데는 예루살렘 인근에서 태어난 2살 이하의 어린이를 모두 죽여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동생을 죽인 카인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있는 병중에 ‘화병(火病)’이 있습니다.
분노를 삭이지 못해서 생기는 병입니다.
화풀이를 잘못해서 패가망신하는 예도 많습니다.
화를 참지 못해서 애꿎은 그릇을 깨는 일도 있습니다.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도 대부분 ‘화’를 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이 잘못하면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나 자신을 아는 두 번째 길은 ‘용서’입니다.
묶인 것을 풀고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므로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를 통해서 용서를 말씀하셨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야 했을 여인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는 아들을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말씀하셨습니다.
용서에는 두 가지의 모습이 있습니다.
용서를 청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용서하는 것은 ‘자비’입니다.
회개와 자비가 만날 때 참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등잔에 채워야 할 기름은 ‘겸손과 용서’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용서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된 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지혜는 바라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부모가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입니까?
많은 부모는 자녀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라고 대답합니다.
“아빠, 엄마 덕분에 행복해.”
이 말을 들은 부모는 아이에게 아마 “아빠, 엄마도 너희 덕분에 행복해.”라고 말할 것입니다.
자기 행복을 고백하는 말은 듣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고 합니다.
특히 부모 자녀 사이의 이 말은 안도감과 동시에 기쁨을 갖게 합니다.
부모 자녀는 일촌 관계, 자신이 아닌 타인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타인’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서로 행복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부모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을 때는 “부모 때문에 불행하다”라는 말을 들을 때라고 합니다.
사실 완벽한 부모는 없습니다.
각종 육아 관련 방송을 보면 문제 있는 부모투성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방송에 나오는 부모와 달리 완벽한 부모일까요?
마찬가지로 부족함이 가득합니다.
이제 자녀는 어떨까요?
완벽한 자녀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부족함이 가득한 나약한 인간일 따름입니다.
부족한 부모와 부족한 자녀가 만나서 완벽한 사랑을 향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긍정의 말, 사랑의 말, 행복의 말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만의 관계만이 아닙니다.
나의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말과 행동에 있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완벽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완벽한 사랑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삶이 우리에게 오실 주님을 마중할 준비가 됩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늘 깨어있으라고 하십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단순히 잠들어 있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열 처녀의 비유는 이 점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등과 함께 기름도 준비했지만, 어리석은 처녀는 등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등’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도록 부름을 받았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기름’은 부름을 받은 이로 맡은 바 사명에 충실하며 깨어있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뜻을 늘 깨어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기름까지 충실히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상대방 때문에 행복하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이를 위해 사랑의 말과 행동은 필수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의 삶을 통해 오시는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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