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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4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콜로 1,21-23
복 음 : 루카 6,1-5
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2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5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갑곶성지에 살다 보면 ‘죽음’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지 안에 봉안당이 있어서, 거의 매일 안치되는 고인을 위한 안치 예식을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더 가까이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언젠가 죽을 것이 확실하지만,
그때가 언제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에 늘 불안한 미래로 바라보는 우리입니다.
우선 이 세상 안에서 나의 시간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많이 남든, 얼마 남지 않든 이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해 불안함을 품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만 계속해서 생각하면
오늘이란 하루가 공허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허한 오늘을 만들지 않으려면 미래를 오늘과 철저하게 분리해야 합니다.
미래는 행복으로 가득 찬, 희망의 미래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미래가 없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이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살기 위해서는 지금을 잘 살아야 합니다.
부정적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주저하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으로 미래를 바라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 몇 사람과의 안식일 논쟁은
앞으로 이루어질 모든 안식일 논쟁의 첫 번째였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향해 적대적이지 않았을 때 벌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어서 안식일 법을 위반했다고 보는 것은 억지가 아니라,
당시에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편협된 사고를 하면서 안식일을 만드신 하느님을
속 좁으신 분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너무나 존경하는 다윗 왕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다윗 왕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서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었습니다.
율법에 분명하게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다윗을 사랑했던 하느님은 이를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도 이런 그의 행동을 참성자요 예언자로 행동했기 때문에,
옳고 바르며 칭송받을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물며 성자이신 예수님은 어떨까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 안에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계속해서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반드시 희망을 두어야 하는 미래, 또 우리가 반드시 가야 할 미래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그 미래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선포하십니다.
즉, 종이 주인의 말을 철저하게 듣고 따르듯이, 주님의 말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희망찬 미래가 펼쳐집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 5)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의 아들은
사람을 살리신다.
삶의 문제는
놓쳐버린
정체성의 문제이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랑의 존재이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에
수많은
안식일의 율법조항이
마구 생겨난다.
사랑을
모르는 것은
사람을
모르는 것이다.
가장 바른 길은
생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길이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참된 진리이다.
참된 사랑만이
참된 열매를 맺는다.
안식일을
치유하시는
사람의
아들이신
주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신다.
안식일은
구원을 향해
언제나
열려있어야 한다.
건강한
안식일의 삶이
간절히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사랑이
핵심이다.
사람의 기쁨이
안식일의
진정한 기쁨이다.
사람의 아들에게서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랑의 시간이다.
안식일은
나 자신과 이웃에게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은
규정과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사랑의 주인이신
주님이시다.
사랑이 복음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인터넷을 보면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일기예보가 있습니다. 주식정보가 있습니다.
작년부터 전 세계 코로나 현황을 보고 있습니다.
9월 3일 현재 상황은 이렇습니다.
220,129,238 명은 확진자입니다.
4,559,948 명은 사망자입니다. 195,049,002 명은 완치자입니다.
미국은 40,513,018명의 확진자가 있습니다.
662,853 명의 사망자가 있습니다. 31,199,835 명의 완치자가 있습니다.
한국은 257,110 명의 확진자가 있습니다.
2,308 명의 사망자가 있습니다. 228,618 명의 완치자가 있습니다.
한국은 실시간으로 백신 접종현황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9월 3일 현재 상황은 이렇습니다.
29,644,464 명은 1회 접종자입니다. 16,783,832 명은 2회까지 접종받은 사람입니다.
교황님께서 이야기한 것처럼 가난한 지역의 사람들에게도 백신의 접종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치료제가 개발되어 중증의 환자들이 건강을 회복하면 좋겠습니다.
안치환의 노래 중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있습니다.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시인 박노해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샛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 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사람만이 희망인 것은 어째서일까요?
저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숨’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받아서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그리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우리는 가련한 이를 측은하게 여깁니다. 잘못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식별합니다. 겸손하게 고개를 숙입니다.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 잘못된 길을 갈지라도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가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받아주신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다윗이 뉘우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니네베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회개의 눈물을 흘린 베드로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뉘우치는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주시기에
비록 허물이 있을지라도, 비록 잘못하였을지라도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이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를 규정하는 법과 질서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들이고,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고,
나 바오로는 그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인"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 주십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6,2)
바리사이들이 묻습니다. 이번에는 안식일 논쟁입니다.
그런데 묻는 대상이 "당신의 제자들은~~?"이 아니라 "당신들은~~?"입니다.
이 경우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뭉뚱그려 덫을 놓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사실 무언가 알고 싶어 묻는 질문이 아니라 추궁과 공격의 의미가 더 큽니다.
바리사이들은 밀 이삭을 뜯어서 손으로 비벼 먹는 제자들의 행위를
추수에 준하는 노동으로 간주하고 안식일 법을 들이댑니다.
어떤 사실을 자기들의 의도에 맞춰 과장하고 왜곡하고 곡해하는 겁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
예수님은 다윗이 했던 일을 예로 들어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거나
인간의 기본적인 생명 유지를 위해서라면 이해와 사랑이 먼저임을 밝히십니다.
율법을 함부로 어겨도 무방한 사람은 없지만,
굳이 율법을 끄집어낼 필요가 없는 상황도 있는 법입니다.
"안식일의 주인"
안식일은 모든 이에게 평등히 쉼을 제공하는 날입니다.
하느님은 안식일을 통해 종들과 이방인, 짐승, 땅에게까지도 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셨지요.
안식일법은 유한함을 운명처럼 안고 사는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증진하고
더욱 풍요롭게 해 주는 필수적인 회복 장치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계급 사회에서 "주인"은 자기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타인을 착취하고 목숨까지 사유화하기도 했지만,
그건 하느님의 시선에서 가장 주인답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혹여 "주인"의 권리를 그렇게 쓰면서 그걸 당연히 여기는 이가 있다면,
그는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악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느님의 "주인다움"은 어떤 의미일지 제1독서에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콜로 1,22)
하느님은 "죽음"으로 주인의 최대 권리를 행사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 때문에 목숨을 던지는 주인이지,
타인의 죽음을 양분 삼아 부와 권력을 쌓는 주인이 아닙니다.
원죄에 물들어 악의 어둠에 짓눌린 인류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로 다시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모습,
즉 하느님의 모상성을 온전히 회복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주인이심을 말씀과 행위로 당당히 밝히십니다.
주인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종의 종이니까요.
그분 생애가 시작부터 마침까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 일행의 범법을 찾아내려 핏대를 올리던 바리사이들 중에 단 한 번이라도
하느님의 이러한 주인다움을 실천해 본 이가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공감하며 이해했을 겁니다.
복음 안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으리라 희망을 가져 봅니다.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화답송)
시편 작가는 안식일의 주인, 생명의 주인이신 분께서
죽음으로 우리의 생명을 떠받치고 계시다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주인이신 예수님의 생명을 먹고 나날이 생기를 얻어 누리는 행복한 종들입니다.
관습과 규범, 전통에 앞서 사랑을 우선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막아 줄게." "내가 책임질게" 하며 부족하고 죄인인 우리를 떠받쳐 주고 계시니,
우리도 용기를 내고 사랑을 다해 그분을 따라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과 사회. 공동체 곳곳에서 '진정한 주인다움'을 살고 있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세 부류: 바리사이-율법학자-제자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도 어제의 복음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어제 복음은 단식에 대한 원칙주의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율법만 잘 지키면 되는 줄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안식일 법에 관해 물고 늘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남의 밭에서 밀이삭을 훔쳐 먹은
당신의 제자들을 두둔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 말은 크게 두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겠는데,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주인이시기에 율법을 지배하는 분이시지,
그것에 매이는 분이 아니라는 것과
율법을 그 주인을 위해 지킨다면 그것이 바로 참다운 안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예수님의 제자들과 대치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세 부류 모두 율법에 충실해지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율법을 지켜 안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당신 제자들뿐이라고 하십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먼저 바리사이는 율법적인 ‘행위’에 집중하는 이들입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율법의 행위가 자신이라고 여기는 이들입니다.
남들에게 그렇게 보이면 그리스도인이라 믿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남들의 시선과 평가에 집중합니다. 이들은 ‘위선자’라 불립니다.
그다음 율법학자는 ‘원칙주의자’입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꼭 해야 하는 의무만 철저히 수행하면 된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율법 조항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독선적일 수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율법에 어긋나는 삶을 살지 않지만,
자신처럼 살지 않는 타인을 심판합니다.
물론 바리사이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참다운 율법의 정신을 잃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뜻에 집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며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것은 하고
허락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볼 때
이 부류의 사람들은 너무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라 예측 불가입니다.
심지어는 율법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정 마음의 안식을 누리는 이들입니다.
이제 소설 하나를 소개시켜 드릴 텐데
누가 바리사이고 누가 율법학자이며 누가 주님의 제자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은 아버지의 강요로 돈도 많고 나이도 많은 의사 칠링워드와 결혼합니다.
헤스터는 남편의 권유로 먼저 영국을 떠나 미국 보스턴의 한 작은 마을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곧 뒤따라오겠다던 남편이 세월이 꽤 흘러도 오지 않자
그 마을의 인기 있는 목사인 딤스데일과 불륜을 맺고 딸 펄을 낳습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가 아기를 낳자 동네 사람들은 그녀의 가슴에 붉은 ‘A’를 새기고
3시간 동안 교수대 위에서 딸을 안고 만인의 구경거리가 되게 합니다.
‘A’는 ‘간통’을 의미하는 ‘Adultery’의 약자입니다.
그 마을에 사는 동안 그녀는 항상 가슴에 붉은 ‘A’를 붙이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절대 자기 불륜의 상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A’를 ‘Able’(능력 있는)로 읽을 정도로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돈을 벌어가며 딸 펄을 잘 키웁니다.
그러던 중 헤스터의 남편 칠링워드가 도착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칠링워드가 헤스터의 남편인 줄 모릅니다.
칠링워드는 헤스터의 불륜을 파헤쳐 결국엔 그 상대가 존경받는 딤스데일임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그를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기 전까지 그는 그 괴롭힘을 끝내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 말에 딤스데일은 속이 썩어 들어갑니다.
7년이 지난 뒤 헤스터는 딤스데일에게 함께 도망치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러나 딤스데일은 이미 죄책감에 속이 문드러져서 육신까지도 망가졌습니다.
죽음을 직감한 딤스데일은 헤스터가 섰던 그 교수대에 올라 설교를 마치고는
자신이 헤스터의 내연남이었음을 밝히고 죽습니다.
그의 옷 속에도 붉은 ‘A’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바리사이는 누구일까요?
바로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솔직할 수 없었던 딤스데일 목사입니다.
율법을 어겼지만, 그 책임을 사람들만 모르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소설에서는 설교 중에 간간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더 겸손하게 보이게 만들어 인기를 더 얻게 됩니다.
남이 볼 수 있는 행위에만 치중하는 이는 절대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딤스데일이 마지막에 자신의 죄를 사람들 앞에 고백하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는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게 하려고 주홍글씨를 헤스터만 달고 살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리사이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바리사이는 솔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율법학자는 누구일까요? 헤스터의 남편인 칠링워드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목사인 딤스데일의 불륜관계를 알아채고는 목사를 계속 괴롭힙니다.
그래서 그가 죄책감으로 쓰러지게 만듭니다.
그는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에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봐 줄 수 없고
그래서 주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기가 정의를 실현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아내와 딤스데일을 용서하고 다시 잘 살아나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헤스터일 수 있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딸을 잘 키워야 했기에 그녀는 죄인이라는 명패를 가슴에 달고
열심히 일하여 현 상황에서의 최선을 찾습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지금 이 상황에서의 최선은
남에게 잘 보이는 것이고 원칙을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황에 발 빠르게 자신을 적응시키지 못합니다.
헤스터와 같이 지금, 이 순간 주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 참 주님의 종입니다.
성당에서도 이런 세 부류의 신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신부님이 볼 때만 열심히 봉사하는 척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행동이 달라지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느 부류에 속할까요?
당연히 바리사이입니다.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반면 누가 보든 말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융통성이 없습니다. 자신처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함으로써 자신이 타인들보다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율법학자입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본인이 죄인으로 찍힐 것을 알면서도
바로 그 순간 해야 할 일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율법이고 뭐고 없습니다.
율법의 주인은 하느님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몸 – 이성 –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몸에 집중하는 사람은 바리사이입니다. 사람은 몸이 다인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시선에 집중하는 삶을 삽니다.
이성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믿습니다.
이들이 율법주의자입니다. 율법을 신봉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잘 보이려는 행위입니다.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뜻’에 집중합니다.
뜻은 행위의 의도와 목적에 해당하는데 그 행위가 누구의 뜻,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집중합니다.
아무리 선한 행위를 했더라도 그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일 때
그런 행위는 하느님께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를 당신 자녀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어떤 아이가 공부를 참 잘하고 왔을 때,
선생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부를 했다고 하거나,
그냥 자기만족을 위해 공부했다고 하면 아버지 마음은 어떨까요?
기껏 먹여주고 키워주었더니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만 한다면
계속 잘해주고 싶은 마음은 별로 안 생길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보답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할 때 자녀가 사랑스럽습니다.
바리사이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과 같고,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율법학자요 원칙주의자이며,
아버지를 위해 공부한 아이는 주님의 종이요 제자입니다.
매 순간 주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는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누구도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굳이 판단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이 세 기준으로 하면 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