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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주목하는 삶 (행3-7)
2026년 8월 8일 (토요일)
찬양 : 구주를 생각만 해도
본문 : 사도행전 6:8-7:60절
☞ https://youtu.be/p1rjxT2fl0E?si=lhwFmKgU-An8_wfQ
30에서 40으로 더위의 숫자를 올린 금년 더위다. 온열 환자가 급증하고 있고, 채소값이 급등하였다. 아침부터 뜨거운 태양이 집안을 달구어 이제는 에어컨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에어컨을 거의 켜지 않고 살았던 우리 집도 더위에 항복하여 에어컨을 켜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입추가 되었지만, 더위는 오히려 더해진 느낌이다. 온 세계가 떨고 있는 기후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인간의 개발이란 이름의 발전이 과연 진정한 발전인가를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주일을 준비하는 날, 더위에 잠을 설쳐서 그런지 머리가 띵하다.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잘 준비되어 주님을 예배하는 자로 설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사도행전 6:8절부터 시작해 7:60절에 등장하는 스데반 집사는 기독교 역사상 첫 번째 순교자로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열방으로 시선을 교체하게 되는 분수령이된 인물이기도 하다. 8-9절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른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새로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을 섬기는 일로 선출된 스데반 집사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게 되었다. 진실로 성령이 임하여 권능을 받은 집사들이 세워진 것이다.
이때 자유민들의 회당에서 자유민과 스데반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자유민이란 주전 63년경,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로마의 전쟁 포로로 끌려가 노예가 되었던 자들을 말한다.
세월이 흘러 이들 중 주인의 호의로 풀려나거나 돈을 지불하고 자유를 얻어 로마 시민권을 획득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들 '해방 노예'들과 그 후손들 중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고국인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정착한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자유민들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매우 성전과 율법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이 자유민들 중 길리기아 다소 사람 바울이 있다. 그가 왜 그렇게 율법에 극단적 열심을 가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왔지만, 헬라어(로마어)를 사용하고 이방 문화에 익숙했기에, 본토의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섞이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예배 처소를 세워 예배했다. 그것이 바로 '자유민(리베르디노) 회당'이다.
어쩌면 같은 헬라파 유대인인 스데반 집사는 이곳에서 설교나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자유민 회당의 사람들은 같은 출신이기에 스데반이 자신들과 같은 입장을 가진 줄 알았다. 그러나 은혜와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이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신 분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모세의 율법이 완성되었다고 선포하자, 그들은 이 말씀을 자신들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신성모독이자 배신으로 여겨 맹렬한 논쟁을 벌인 것이다.
문제는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감당할 수 없자 이들은 거짓 증인을 매수하여 과장된 언어로 공회에 스데반을 고발한다. 13-14절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노예와 이방 땅의 삶에서 오직 성전을 그리워하고, 율법을 사모했던 이들의 열정과 성령과 복음으로 뜨거워진 사도들의 열정이 아름다운 교집함이 되지 못하도록 사단은 교묘하게 역사하였던 것이다.
열정이 뜨겁기에 수단의 정당함을 부수고 거짓 증인을 내세워 스데반 집사를 고발한 것이다. 인생에 열정이 매우 소중하다. 무엇이든 열정이 없이는 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열정이 다름을 만날 때 다름과 연합과 조율이 되지 않는 이유가 되고 거짓과 타협하는 이유가 됨을 깊이 묵상하게 된다.
이렇게 세워진 공회에서 스데반은 구약의 역사를 관통하며 복음을 제시하는 아주 위대한 설교를 한다. 그 공회에 선 스데반을 이렇게 묘사한다. 6;15절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이 답하기 전 이미 성경은 사람들이 그의 모습에서 천사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함으로 이 논쟁의 끝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며 7장의 본격적인 논쟁으로 들어간다.
스데반은 논쟁의 답변으로 긴 구약의 역사를 관통하며 복음을 증거한다. 스데반이 전한 핵심의 내용은 이것이다. 48절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신다고 믿었다. 그러나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짚으며 이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먼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성전이 없던 시절, 이방 땅 '메소보다미아(2절)'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만났고,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렸으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9절)' 하셨다. 그리고 모세는 거룩한 성전이 아닌, 광야의 '가시나무 떨기 불꽃(30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으니, 결론적으로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으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48절)"라고 선포하며, 하나님을 예루살렘이라는 좁은 공간에 가두려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교만을 산산조각 내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이다.
그것뿐 아니다. 이렇게 아브라함, 요셉, 모세를 증언하면서 스데반은 유대인들의 실체를 이렇게 고발한다. 51-52절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키는 선민이라고 자부했지만, 스데반은 그들이 역사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핍박하고 배척했음을 고발한 것이다. 즉 조상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팔아넘겼고(9절), 모세를 배척했으며(35절), 선지자들을 죽였다(52절)는 것이다.
이렇게 전한 스데반의 설교에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고 성경은 고백한다. 54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복음은 검이 되어 이들의 죄악을 샅샅이 드러내고 찔러 쪼개었다. 그러나 이들은 회개하지 않고 이를 갈았다고 한다.
반면 스데반의 모습을 대조하며 놀랍게 전한다. 55-56절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성경을 묵상하고 해석하며 주의하게 되는 것은 주목해야 할 주님이 아닌 주님이 쓰시는 사람에게 시선이 바뀌는 일이다. 스데반은 이렇게 공회에서 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논쟁의 한 가운데 성령이 주신 지혜로 복음을 전한 후에 그는 주님을 주목하고 있다.
공회의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이를 가는 이들의 분노에 주목하지 않고 하늘의 보좌 우편에 서신 주님을 주목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가 주목하는 시선임을 배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구속 사역을 마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가 주목하여 만나는 주님은 이 논쟁의 한 가운데 자신을 당당히 증언하는 스데반을 향해 보좌에서 일어나 서서 그를 바라보고 계심을 보았다고 한다.
이렇게 스데반의 주님을 주목한다는 고백은 공회에 모인 이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옷을 벗겨 사울 앞에 던지고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으로 그를 향해 돌을 던진다. 59절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열정이 패배로 바뀌는 순간 그 선한 열정은 죄와 타협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열정을 막아선 이를 죽이는 자리로 나아간다. 이것이 사탄의 교묘한 전략임을 깊이 묵상하며 깨어 분별하지 않으면 선한 의도의 열정이 이렇게 비참한 결과로 드러날 수 있음을 돌아보게 된다.
이렇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면서 주님의 십자가 고백을 그대로 반복한다. 60절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주님을 주목한 스데반은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향해 주님의 기도를 닮아 그들을 용서한다. 놀랍게도 그 겉옷을 맡고 있던 청년 '사울(바울, 58절)'은 훗날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 주님을 주목하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임을 증명한 것이다.
이날 주님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삶은 다양한 논쟁의 자리를 만든다. 옳은 것이든, 틀린 것이든 논쟁은 피할 수 없다. 교회든 회사든 가정이든 나라든 논쟁이 없는 곳은 없다. 그리고 논쟁은 자신을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자리이기도 하다.
문제는 논쟁이 주님을 주목하지 않을 때 논쟁은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해 거짓과 타협하고 상대를 죽이는 자리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은 그 논쟁의 한 가운데서 주님을 주목하며 죽음의 자리에서 주님의 기도를 따르며 시대를 바꾸는 위대한 한 알의 밀알이 되었음을 깊이 묵상하게 된다.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의 위대함은 모든 순간 주님을 주목하는 삶이 된다는 것이다. 폭염보다 더 뜨겁고 날 선 세상의 논쟁 한가운데 서더라도,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보좌 우편에 서신 주님을 주목하게 하신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나와 세상은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게 하신다.
주일을 준비하는 날 무엇보다 성령 충만하여 주님을 주목하는 날로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주님, 이날도 모든 상황속에서 나를 지키는 삶이 되지 않고 주님을 주목하는 삶 되게 하소서.
한줄 묵상 :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매서운 논쟁의 한복판에서 나의 시선을 거두어, 나를 응원하며 서 계신 보좌 우편의 주님을 우러러봅니다.>
적용 질문 :
1. 자유민 회당 사람들처럼 나의 신앙적 열정이나 신념이 '나와 다른 생각'을 만났을 때, 그를 어떤 태도로 만나고 있습니까?
2. 삶에서 의견 충돌이나 논쟁이 벌어질 때, 나는 내 자존심과 입장을 지키는 데 집중합니까? 아니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주님'을 주목합니까?
3. 오늘 내가 만나는 논쟁의 자리가 있나요? 혹 논쟁의 패배로 아파하거나, 승리로 우쭐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주님을 주목하는 나의 태도는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