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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최대도시 카이로는 신시가지인 뉴 카이로 중심에 위치한 타흐리르 광장을 기준으로 도시의 주요기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따라서 카이로 여행의 기점이 되는 이 광장은 언제나 수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다. 다음날 새벽, 타흐리르 광장으로 나가 이탈리아에서 온 다큐멘터리 제작자 일행과 다시 만났다. 일단 시나이 반도까지 동행하기로 약속한 우리는 칸엘 칼렐리 시장(Khan El Kahlili Bazzar)을 찾아 나섰다. ‘칼릴리 왕자의 여관’이라는 뜻을 지닌 이곳은 중세시대부터 카이로의 상업과 대외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해 온 곳이다. 칸 엘 칼렐리 시장 안쪽에 자리한 엘 피샤위 카페(El Fishawy Cafe)는 198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집트 소설가 나깁 마흐푸즈(Naguib Mahfouz, 1911~2006년)가 생전에 즐겨 찾던 명소다. 때문에 벽면 가득히 나깁 마흐푸즈의 사진과 저작이 다채롭게 전시되어 있는 이 노천카페는 원래의 이름보다 나깁 마흐푸즈 카페라는 이름으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아랍 민중의 목소리로 대변되는 움 칼툼의 호소력 짙은 음성이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노천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향이 진한 아랍 전통 커피를 시켜놓고 물 담배를 피우며 문학과 인생을 논하는 이들의 열기가 후끈 전해져 왔다.
운전기사와 취사반장 역할을 담당하기로 한 이집트 가이드 부부가 야영에 필요한 생필품을 사러 다니는 동안, 안드레아 보첼리를 닮은 이탈리아의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나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상세하게 들려주었다. 듣고 보니 그의 열정만큼이나 앞으로 걸어가고자 하는 여정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한참 후, 나깁 마흐푸즈 카페에서 나오자 알 아즈하르 모스크로 걸음을 옮겼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육 담당 모스크로 정평이 난 아즈하르 모스크 옆에는 서기 972년에 건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대학인 알 아즈하르 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먼저 아즈하르 대학 캠퍼스를 둘러본 후에 모스크로 향하다보니, 높이 치솟은 미나렛에서 무아진(Muazzin, 이슬람교에서 예배시간인 아잔을 알리는 낭송자)의 음성이 은은하게 들려왔다. 반드시 육성으로만 들려주는 무아진의 아잔소리를 들으며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자, 시타델의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와는 달리 일체의 장식이 배제된 알 아즈하르 모스크 내부는 소박하기가 이를 데 없어 보였다. 아랍어로 마스지드((Masjid, 이마를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는 곳)를 의미하는 모스크 안에서 목격한 장면은, 이슬람교와 무슬림의 신앙생활을 적나라하게 대변해 주었다. 전통적으로 이슬람 문화권에는 모스크 내에서 예배를 드리고 회의를 열고 법을 집행하고 교육을 해 왔다.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모스크야말로 공동체 멤버들의 가장 확실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잠시 객관적인 여행자의 시선으로 모스크 내부를 살펴보니, 유일신 알라(Allah)아래 만인이 평등하다는 이슬람사상으로 인해 성직자와 일반신자의 자리가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은 모스크 내부는, 예배공간이자 휴식공간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를 제공하고 있었다. 예배가 끝난 후에도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메카의 방향을 가리키는 아치형 벽감(壁龕)인 미흐랍(Mihrab)앞에 둘러앉아 조용히 자신만의 기도를 반복하며 꾸란을 독송하거나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담소를 나누면서, 한껏 편안한 자세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모스크 내부에 세워진 375개의 돌기둥과 외부에 세워진 5개의 장대하고 화려한 미나렛이 인상적인 알 아즈하르 모스크의 외관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시나이 반도로 떠나는 세 명의 청년을 만났다. 대화를 나누다보니 알 아즈하르 대학 석사과정에서 이슬람 신학과 법학을 전공하고 있는 이 학생들이야말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이탈리아 여행자에게 꼭 필요한 길잡이였다. 세 사람 모두 영어와 불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아랍 고중세문화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즉석에서 의기투합한 우리는 함께 올드 카이로의 벤 에즈라 시나고그나(유대인 회당)로 향했다. 그 옛날 선지자 모세가 애굽 땅(이집트 본토)을 출발하면서 마지막 기도를 올렸던 장소에서, 무사순례를 기원하는 조촐한 통과제의(通過祭儀)를 갖은 뒤, 카이로 인근에 위치한 헬리오폴리스로 향했다.
그리스어로 ‘태양의 도시’를 뜻하는 헬리오폴리스는 고대 이집트 태양신 숭배의 진원지이다. 일찍이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 아텐(Aten)을 우주창조신으로 추앙한 헬리오폴리스 신학(神學)은 종래 이집트 고유의 부활신앙인 오시리스 신화와 절충됨으로써 새로운 종교사상을 싹트게 했다. 헬리오폴리스에서 발달한 태양신 숭배사상은 고대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 아멘호테프 4세(Amenhotep IV, 기원전 1350~1334년 재위)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역사상 ‘인류 최초의 종교개혁자’로 알려진 아멘호테프 4세는 다신교(多神敎)를 신봉했던 그의 부왕에 의해 테베의 수호신 아몬에게 제사 지내는 신관들의 세력이 왕권을 억제할 정도로 비대해지자, 오랜 번민과 치밀한 계획으로 다신교인 이집트 종래의 종교를 금지하고 태양신 아텐만을 유일신(唯一神)으로 인정하는 새로운 일신교(一神敎)사상을 탄생시켰다. 자신의 출생 당시 이름이었던 ‘아멘호테프(아몬 신이 기뻐하다)’를 ‘아케나톤(Akhnaton, 아텐을 섬기는 자)’으로 개명까지 하면서 단호하게 결행해 나간 아케나톤의 야심찬 종교개혁은, 결국 그의 사후에 철저히 좌초되고, 수도는 다시 테베로 돌아갔다. 그러나 텔 엘 아마르나를 중심으로 새로운 개혁정치를 시도했던 아케나톤이, 그가 꿈꾸던 제국의 통치이념으로 채택했던 유일신관은, 훗날 유대교의 일신교 사상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대 이집트의 대표적인 종교도시로 알려진 옛 헬리오폴리스 지역은 현재의 카이로 북동쪽 교외에 자리한 알 마타리야(Al-Matariyah)지역을 가리킨다. 알 마타리야는 구약성서에 온(On)이라는 지명으로 등장한다. 성서를 바탕으로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 정착하게 된 경위를 간략히 살펴보면, 그것은 야곱의 아들 요셉(Joseph)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질투에 눈 먼 형들에 의해 애굽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온 요셉은 우연한 계기로 인해 파라오의 꿈을 해몽하게 된다. 파라오의 꿈에 관한 정확한 해몽이 있은 후, 점차 파라오의 신임을 받게 된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직에 임명된다. 그후 당시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한 요셉에 의하여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거 모여 살던 곳이 바로 고센지방의 수도인 온이다. 고대 이집트 신왕국 제 19왕조 파라오 세티 1세(Seti I, 기원전 1291~1278년 재위)의 오벨리스크와 그가 건립한 태양신을 모시던 신전 터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는 이곳은 모세의 출생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이곳은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피난 왔던 예수 그리스도 가족이 잠시나마 휴식을 취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모세의 출애굽 사건은 그 시기와 경로에 관해 현재까지 수많은 이견(異見)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알 마타리야 지역에서 야영을 하며 하룻밤을 보낸 우리는 각자의 주관적인 견해를 조금씩 보완, 절충하여 다음과 같이 의견을 통일하기로 했다. 출발시기는 일단 기원전 13세기 람세스 2세 통치 시대로 잡고, 경로는 지난 수세기동안 가장 일반적인 출애굽(Exodus)루트로 알려져 온 홍해-시나이 반도-요르단에 이르는 과정을 나침반 삼아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그 옛날 430년간의 지난한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자유를 찾아 애굽 땅에서의 탈출을 시도했던 고대 이스라엘민족의 남다른 감회를 생각하면서, 메마른 사막을 약 1시간 30분쯤 달리자 수에즈(Suez)운하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알 마타리야 지역을 출발한 차가 수르광야를 관통하며 달리는 동안 도로 오른편을 바라보니, 수에즈 운하의 푸른 물결 위에 수많은 호화여객기와 상선들이 떠 있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두 대륙의 경계지점인 이집트 시나이 반도 서쪽에 건설된 수에즈 운하는 지중해의 포트 사이드(Port Said)항구와 홍해의 수에즈 항구를 연결한다. 잠시 의례적인 검문검색을 마치고나서 수에즈 운하 밑으로 나 있는 아흐마드 함디 터널(Ahmed Hamdi Tunnel)로 들어섰다. 그런데 모세의 인도에 따라 추적해오는 이집트 군대를 피해 쫓기는 몸으로 광야를 달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앞에 절망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났던 바다(홍해)밑으로 나 있는 터널의 길이는 너무나도 짧았다. 현대문명의 이기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좌절과 기쁨을 동시에 맛보게 했던 그 거대한 바다를 삽시간에 너무나도 쉽게 건너 버린 것 이다. 캠핑카에 타고 있던 일행 모두가 수에즈 운하 밑으로 난 터널을 관통하여 순식간에 홍해를 건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잠시 허탈한 표정으로 망연히 수에즈 운하를 응시하고 있는 우리 일행을 위해 운전을 하던 이집트 영어가이드가 캠핑카에 부착된 TV화면을 통해 오페라 <아이다(Aida)>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는 1869년 당시 이집트 총독 이스마일의 요청으로 수에즈 운하 개통과 카이로의 오페라 극장 개관을 기념하여 만든 작품이다. 고대에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에서 이집트의 젊은 장군 라다메스(Radames)와 포로가 된 적국의 왕녀 아이다와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오페라는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의 초대 관장 오귀스트 마리에트가 시나리오를 쓰고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가 작곡한 불후의 명작이다.
수에즈 터널을 통과하여 시나이 반도로 접어들자 서쪽 연안을 따라 홍해를 바라보며 계속 남쪽으로 달렸다. 차안에서는 여전히 오페라 아이다 2막 2장에 등장하는 이집트군의 전승을 축하하는 트럼펫 행진곡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건만, 현대문명의 이기로 인해 너무나도 싱겁게 ‘홍해의 기적’현장을 통과해버린 일행들의 허탈한 심정은 좀처럼 가실 줄을 몰랐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서서히 불평불만에 사로잡히는 철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을 선두지휘 했던 선지자 모세의 뼈저린 고뇌를 되새겨 보면서 메마른 광야를 내처 달려가다가 보니, 드문드문 대추야자나무가 우거진 오아시스가 나타나면서 도로 왼편에 마라의 샘(Well of Marah)이라고 쓴 표지판이 나타났다.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메마른 사막을 지나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나타났던 마라의 샘. 구약성서에 의하면 히브리어로 ‘쓰다’라는 의미를 지닌 마라의 샘은, 홍해를 건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수르광야로 들어와 사흘간 방황하다 발견한 최초의 우물이다. 주변에 대추야자 군락이 약 1킬로미터 이상 펼쳐진 이곳에서 모세가 처음 우물을 발견했을 때는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야훼의 계시에 따라 나뭇잎을 들어 우물 속에 던지니 이내 쓴물은 단맛이 나는 감로수(甘露水)로 변했다고 한다. 현재 이 우물은 현지인들 사이에서 아랍어로 ‘모세의 샘’을 뜻하는 아윤 무사(Ayun Musa)라고 불리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갑자기 낯선 여행자 무리가 나타나자 어디선가 조잡한 장신구 꾸러미를 들고 쏜살같이 달려온 베두인 꼬마들을 따라 가본 마라의 샘은, 각종 쓰레기더미에 뒤덮인 채 철저히 방치되어 있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우리는 잠시 마라의 샘 부근에 자리한 유황과 철분이 다량 함유된 온천수에 발을 담그며 휴식을 취한 뒤, 다시 홍해를 따라 시나이 반도의 남쪽을 향해 달렸다. 어느덧 새벽에 알 마타리야를 출발한지 약 8시간 정도 지나자, 아랍어로 ‘황금’을 의미하는 다합(Dahaba)시가지가 나타나면서 눈앞에 짙은 에메랄드 빛 바다가 펼쳐졌다. 그야말로 홍해(紅海)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시나이 반도 이후의 여정을 위해 잠시 다합 시내의 여행사를 방문하고 난 우리는 다시 시나이 산(Mt. Sinai)을 향해 출발했다. 황혼이 내리자 점차 한 송이 붉고 탐스러운 장미꽃으로 피어나는 광야를 내처 질주하다가보니, 저 멀리 마른 나뭇단을 이고 맨발로 걸어가는 유목민의 텐트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아련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사막은 얼핏 모래만 있는 불모의 땅으로 보이지만, 눈여겨 살펴보니 나름대로 색다른 비경(秘境)을 연출하고 있었다. 황량한 사막이 연출하는 비경에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시나이 광야를 1시간쯤 달리자, 드문드문 오아시스의 상징인 대추야자나무가 보이면서 베두인의 마을이 나타났다. 이집트 본토에서와 마찬가지로 물이 귀한 사막 지대를 지나가는 낯선 길손을 배려하여, 집집마다 마당 한 모서리에 놓아둔 물 항아리가 인상적인 어느 돌담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이집트 가이드의 베두인 친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그동안 외국인 여행자들을 안내하여 누차 시나이 반도에 들어온 경험이 있는 이집트 가이드 부부는 시나이 광야의 베두인족과 매우 친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낯선 길손을 발견한 베두인 친구들은 즉석에서 마른 삭정이를 주워다 모닥불을 지피고 밀가루를 반죽하기 시작했다. 누룩이 들지 않은 반죽으로 만든 이집트인들의 주식인 에이쉬 빵과 일종의 야채튀김인 따미야를 비롯해 싱싱한 요거트로 마련한 저녁식탁은 진수성찬이었다. 다소 이른 저녁을 먹고 나자 사막을 유랑하며 목축업을 하는 베두인 가운데 몇몇 청년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슬그머니 낙타를 끌고 앞장 서 걷기 시작하는 청년들은 “저녁예배를 보기위해 모스크로 향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짐짓 의아한 눈길로 “이 근처에는 모스크가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어디로 예배를 보러 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신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하루 일과가 끝나면 날마다 한 차례씩 시나이 산을 오른다”는 베두인 목동들이 저녁예배를 드리러 가는 곳은, 뜻밖에도 시나이 산 초입에 자리한 그리스정교회 소속의 수도원이라고 대답했다.
수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