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71년 군 복무중 결핵성 늑막염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신앙으로 극복,사명을 받고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79년부터 서울구치소 및 영등포구치소의 상담목사로 주로 사형수와 무기수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왔다.
박 목사가 그동안 복음증거 사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케 한 사형수 등 재소자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 중 「믿음의 아들」로 변화돼 새로운 삶을 찾은 사형수는 94년9월 「살인공장」을 차려놓은채 엽기적 연쇄살인행각을 벌여 온 국민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던 「지존파 사건」의 김현양과 양평 일가족 암매장 사건의 윤용필,수원 병원장 일가족 암매장 사건의 최양호,유괴범 문승도 등이다.
「어머니도 내 손으로 못죽인게 한이 된다」고 서슴없이 말했던 지존파 사건의 김현양은 박목사를 만나 회개한 뒤 「감방 전도사」로 1백80도 바뀐 대표적인 케이스다.
김현양은 특히 국민일보 선교면에 매일 게재되는 「오늘의 가정예배」란을 통해 자신의 신앙생활을 다져나가고 수감중인 서울구치소의 다른 재소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까지 했다.
박 목사와 김현양이 서울구치소에서 처음 만난 것은 「지존파 일당」에게 항소심에서도 사형이 선고된 다음날인 95년2월10일.
박목사는 수갑이 이중으로 채워져 있는 김현양의 양손을 붙잡고 구석진 곳으로 데리고 가 간절히 기도했다.
『거룩하신 하나님,인생은 누구나 죄인입니다.또한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야 합니다.그러나 죄짐을 걸머지고는 천국에 갈 수 없으니 이 시간 회개의 영을 부어주옵소서…』
박 목사로서는 초조한 시간이었다.그러나 30여분간 기도가 계속되자 김현양의 양 어깨가 들먹거리기 시작했다.이내 그에게서 뜨거운 회개의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다음날 박목사는 김현양으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목사님,이젠 저도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더욱 열심히 성경말씀을 공부하고 주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 후 김현양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됐다.
그는 박 목사가 보내준 영치금으로 국민일보를 구독,선교면의 「오늘의 가정예배」란을 노트에 매일 스크랩하기 시작했고 일기장에는 성경구절을 쓰며 암송해나갔다.
또 감방내 재소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감방 전도사」로 나섰다.그는 매일 오전과 오후 두차례씩 「오늘의 가정예배」를 토대로 통성기도·찬송·대표기도·말씀 등의 순서로 예배를 인도하면서 95년11월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재소자 2백여명을 전도했다.
84년 수원 병원장 암매장 사건의 사형수 최양호의 경우 가톨릭계·불교계 인사들이 포기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박목사를 만나 회개한 케이스.
『당시 최양호 형제는 나를 만날 때 입김을 계속 내뿜었습니다.오랜 기간 좁은 독방에서 단식해온 그의 입에서는 썩는 냄새가 났습니다.땀과 인분냄새도 혼합돼 역겹기까지 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있으려니 하고 여러차례 만남을 가지면서 나 자신의 신앙간증을 얘기해주었습니다.네번째 만났을 때 드디어 그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에 동참했습니다』
박 목사는 이같은 사역활동과 함께 자신의 월세방을 「사랑의 집」으로 이름지어 오갈데 없는 출소자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출소자들이 재범의 늪에 빠지지 않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85년 남가좌동 연립주택에서 시작한 「사랑의 집」 운영은 올해로 11년째를 맞는다.그동안 출소자 23명이 이곳을 거쳐 개척교회 전도사 등으로 자립해나갔다.
현재 「사랑의 집」은 박목사의 서울 방배동 월세방과 아현동에 독립시킨 월세방 2곳에서 운영중이며 자립의 꿈을 가진 출소자 5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5970691·영육구원).〈박정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