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2. 9. 22.
<아름다운 5060카페>' 삶의 이야기방'에 글이 올랐다.
'만장봉'님의 '카페의 글방에서 글 자랑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라는 제목.
함께 올린 아래 사진에서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드너른 들판에 가득 찬 벼.
수확 이전 상태의 벼를 보고는 문득 옛일을 떠올렸다.
* 사진에 마우스를 대고 누르면 사진이 크게 확대됨.
내가 댓글 달았고, 댓글 일부를 복사해서 여기에 올린다.
하나의 글감이 되기에.
내 댓글 1 :
....풍요로운 가을
드너른 들판에 가득 찬 벼.
논둑에 심은 수수와 코스모스 그리고 가을바람도 눈에 보일 듯...
서해안 제 고향마을을 떠나 지금은 서울에서 사는 제가.... ...
글 또 기다립니다.
엄지 척! 하면서..
내 댓글 2 :
위 들녘에 가득 찬 벼.
수십 년 전.... 머슴(일꾼) 이 농사 짓다가는 그만 두고 자기네 집으로 돌아갔으니..
객지에서 살다가 군복무를 하려고 고향에 왔던 제가 대신 농사를 져야했지요.
동네 일꾼들과 함께.... 가을철에는 20 ~30명의 일꾼을 사서 낫으로 벼를 베려면.. 한 사람이 반마지기( 100평)을 약간 넘게 베는 것도 힘이 들었지요.
벤 벼를 다발로 묶어서 논둑에 일렬로 세워서 길게... 가을바람에 벼이삭이 마르도록....
늦가을철이면 다시 일꾼을 사서 지게로 볏단을 짊어지고 마당에 들어서고, 마당에는 높게 쌓아올려서 벼를 말려야 하고...
찬서리가 내리는 늦가을에는 높게 쌓았던 벼누리를 허물어서.. 홀태로 벼를 훑어야 했지요.
전형적인 농사....
위 사진을 보니 젊은날이 내게도 있던가? 그런 시절이 떠오르는군요.
지금 제 고향은 위와 같은 논은 깡그리 사라졌지요. 산업단지가 되어서....
산모퉁이에나 조금씩 남았고... 예전 농사꾼이 많았던 그 시절이 오히려 그리워지는군요
이래는 내 글.
조금만 퍼서 여기에 올린다.
'머슴, 소, 막걸리가 있었던 옛기억들'
'.. ... 나는 6·25전쟁 전에 이름없는 한촌(閑村)에서 태어났다.
내가 1949년 1월에 태어났으니 1950년 대부터 기억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전란 후 7년 간 대흉년이 들어서 마을사람들이 배고파서 많이 굶어 죽었다는 시절에도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당시에 보고 겪었던 머슴, 소, 막걸리이다.
우리 집에는 일꾼이 1950년 대에서 1970년 초까지 있었다.
내가 일꾼아저씨의 이야기를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쓰는 이유는 내가 시대적 빈곤과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몹씨도 가난했고, 어려움을 무던히도 겪어내야 했던 옛일을 반추해서 남겨놓고 싶다. 그러나 옛 일을 자세히 기록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당시에 너무 어려서 옛기억을 제대로 회상하지 못한다는 점이며, 또 내가 열세 살 나던 해에 대전으로 전학간 후로 농촌을 점차 잊어버렸으며, 마지막으로 내가 대전과 서울에서 학교에서 다녔으므로 방학 때에만 잠깐씩 일꾼아저씨를 보았기에 그들의 내면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 ...... 수십 명의 일꾼들이 한꺼번에 일할 때가 종종 있었다.
모 심기, 세벌(초벌 두벌 세벌)김매기, 벼 베기, 볏짐 나르기, 벼 바슴과 보리 베기(보리 바슴), 풀 치기(퇴비 만들기)하는 날이다. 당시에는 농기계가 없었으므로 손으로 모를 찌고 심고, 낫으로 벼를 베고 지게(등짐)로 볏단을 날랐다. 많은 일꾼들이 지게에 두 개의 대나무 막대기를 덧대고 볏가리를 높게 쌓아 짊어졌다. 겅충겅충 출렁출렁 거리면서 행길을 일렬로 늘어서서 걸어 왔으며, 구루마가 겨우 지나갈만한 좁은 마을안 길로 들어섰다. 울 안, 바깥마당에 노적가리를 다섯 동이나 높게 쌓아 올렸다.
바슴은 늦가을에 했다.
찬 서리가 뽀얀하게 땅에 내린 첫새벽부터, 어둠이 채 가시기 전부터 사내들은 언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면서 바슴마당으로 모여 들었다. 마당가에 장작불을 피워서 언 몸을 녹이고, 뜨거운 국물과 새벽밥으로 빈 속을 채웠다. 일꾼이 노적가리에 올라가서 둥글게 쌓아올린 노적가리를 헐어서 볏단을 땅에 내던져 내렸다. 땅에 떨어진 볏단을 운반하고, 볏단을 새끼줄(샛나끼)로 동여맨 후 어깨 위로 쳐 들어올렸다가 절구통에다 힘껏 둘러 매쳤다. 볏낱이 우스르 사방으로 튀었다. 이러기를 몇 차례 거듭한 후 홀태(와룽꽈룽, 호롱기)를 밟은 사람들에게 넘겼다. 홀태는 와릉꽈룽 시끄러운 톱니바퀴 물리는 굉음을 내면서 벼 알곡을 쏴르르 털어냈다. 짚토매가 연방 뒤로 내던져 졌다. 사내들의 고함소리도 신났다.
내 어린 시절은 근력으로 하는 바슴이었으므로 많은 일꾼들이 필요했다. 딸딸이(경운기)가 보급된 뒤로는 경운기 엔진에 피대를 걸어서 탈곡기(계)를 돌렸다. 그러나 내가 스무 살이 넘은 이후에는 반자동화된 탈곡기의 성능이 개량될수록 일꾼의 숫자는 반대로 계속 줄어들었다. 사내들의 시끌벅적거리는 잡소리, 탁하고 거친 웃음도 점차 줄어들었다.
일꾼은 하루에 논 반마지기 일을 더 했지.
당시에는 일꾼 한 명당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즉 논 반 마지기(100평)를 살짝 넘는 분량이 하루의 일거리였다고 기억한다. 따라서 농사 일을 하루나 이틀에 끝내기 위해서는 동네 사람은 물론 타 동네사람까지도 많이 불러 모아야 했다.
한 사람이 논 한 마지기(200평)의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새벽 서너 시 경부터 시작해서 저녁 늦게까지 쉴사이 없이 일하는 경우다. 자기 네의 일이거나 한 마지기당 얼마씩 품값을 더 주기로 약속한 맡고지기의 경우에는 한 사람이 죽을똥살똥 일하는 분량이었다. 식구가 아니면 남의 일꾼을 그렇게 부릴 수는 없었다. 맡고지기 일이라도 사람들은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탈진했다.
우리 집에는 일꾼사랑방이 있었다.
안채에서 조금 떨어진 일꾼사랑방에는 일년 중 대부분 아침저녁마다 군불을 땠다. 소죽을 끓이기 위해서였다. 당시에 소는 식구만큼이나 소중히 여겼다. 쇠죽 솥에서는 볏짚과 쌀겨익는 구수한 냄새가 났으며, 밤새껏 워낭소리(방울)가 딸랑거렸다.
아랫목 웃목이 잘잘 끓은 뜨거운 구들장 방에서는 동네 머슴, 청장년 아저씨들이 항상 바글거렸다. 사내들의 거친 숨소리와 욕설 그리고 땀에 절은 냄새가 진동하였다. 비 오는 날이거나 밤중에는 짚푸라기로 삼태미, 메꾸리, 멍석, 소덥석 등을 만들었다. 벼바슴이 모두 끝낸 늦가을에는 지붕이엉도 엮었으며 나무자새로 동아밧줄을 꼬았다.
... .... 이하 생략.
2003. 10. 3.에 글 씀
첫댓글 우린 내일 23일
베 수확함
댓글 고맙습니다.
'베'라는 낱말에 빙그레 웃습니다.
벼를 '베;라고도 하지요.
부럽습니다. 논에서 모를 심고, 가을철에 벼를 수확하고... 요즘에는 콤바인 농기계가 혼자서 벼를 베고, 그 자리에서 탈곡하지요.
벼를 일찍 수확하는군요.
올해 쌀값이 많이 하락했다는 뉴스에 저는 고개를 흔듭니다.
정부에서는 쌀은 연간 45만 통 이상을 수입한다는 뉴스도 보았지요.
우리 남한의 쌀도 남는다는데도 외국에서 또 수입하면... 그 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데요?
정부의 이상한 농정에 화가 치미는군요.
오래 전 촌에서는 쌀값이 물건가격의 기준이었는데...
그래도 풍년이기를 빕니다.
저는 엄니에게 엄니 어린시절의 이런 이야기를 가끔 듣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부터 서울에서 자랐으니 알리 만무하지요.
이젠 저렇게 벼가 익어가는 초록의 들판이 점점 사라지는데도
쌀값은 자꾸 떨어진 다니 이러다 언젠가는 쌀도 밀가루처럼 다 수입해야
되는 날이 오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도 해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벼(쌀)은 오래 전부터 수입합니다.
년간 45만 톤 이상입니다. 80kg 쌀 500만 가마니가 넘습니다.
외국의 통상압력으로... 도시민은 쌀값이 싸면 좋겠지만 농촌에서 농사 짓는 농부는 어떻게 한대요?
그들도 국민인데...
와 ~! 사진이 가을 가을 합니다
한참 눈에 담았어요
계절 감각 찾은 코스모스에 눈길 주니 하늘거립니다^^
깊어가는 가을 만끽 하시고 행복 하세요^^
댓글
고맙습니다.
수십 년 전... 들판의 논둑에는 콩을 많이도 심었지요.
땅 한 뼘이라도 아꼈던 시절이 있었지요.
키 큰 코스모스가 하느적 하느적 바람에 흔들리는 정경이 제법 운치가 있지요.
가을은 수 백번 되뇌어도 행복하고 질리지 않은 단어 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저는 1년 4계절 가운데 가을을 가장 좋아하지요.
아쉽게도 가을은 가장 날짜가 짧지요.
날씨도 온화하고, 먹을거리가 풍성하고... 가난하고 추운 사람한테는 가을철이 가장 배부른 계절이지요.
저는 오늘도 서울 송파구 석촌동 재래시장 마트에 들러서 농산물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고구마, 호박, 둥근호박, 멧돌호박, 감자 등이 풍성하대요.
당뇨병 환자인 제가 농산물 마트 안을 기웃거리다니...
아무래도 농촌생활을 잊지 못한 탓이겠지요.
오래 전 시골에서 살 때에는 고구마를 큰 트럭에 실어서 팔 만큼 많이도 농사 지었는데...
지금은 시장에서 봉다리로 사다가...아껴 먹어야 할 터.
운선 작가님의 음식 맛은 어떠할까요? 궁금...
가을의 풍성한 식재료로 맛있게 요리하실 것 같기에... ㅋㅋㅋ.
다행히 평택 고시히카리는
쌀값 하락에 피해는
안보는 것으로
알고 있네요
고단가에 수매합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벼의 품종 하나인 '고시히카리'는 쌀값이 제법 되는가 봅니다.
저는 수십년 전에 '아끼바리' 품종을 심었지요.
쌀 한 가마니(80kg)가 20만 원도 채 안 되고... 18만 운운하더군요.
물론 벼 품종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서도...
올해 쌀값이 지난해보다도 더 떨어진다는 농촌 뉴스에 저는 화가 납니다.
농촌사람도 대한민국 국민이라고요!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이 56.9.kg
올해에는 더욱 줄었겠지요. 대신에 외국산 식품을 더 수입해서 먹었을 터.
직불제도 있고
제법 살만합니다
평택에서 사시는군요.
직불제...
다행입니다.
농업경영인으로 등록되셨나 봅니다.
식량안보는 국가안보에 커다란 기여를 합니다.
농촌이 풍성해야 도시사람들도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저는 시골태생이라서 그런지 배가 부르면 그냥 빙그레 웃지요.
농업직불제... 그거 돈 얼마쯤일까요?
인터넷으로 검색합니다..
1) '... 경작면적 0.5㏊ 이하 소농가는 연간 120만원을 받을 수 있다.
아울러 정부는 농가의 논·밭 면적에 따라 구간별로 차등을 둬서 최소 연간 100만원에서 최대 205만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2) '...농업진흥지역의 논 3㏊와 농업진흥지역 밖의 논 1㏊를 모두 경작하는 경우, (2㏊×205만원)+(1㏊×197만원)+(1㏊×170만원)으로 계산해 총 777만원을 지급받는다.'
* 내가 정산합니다.
위 경우 : 3ha+ 1ha = 4ha이면 농토는 1만 2천평. 논으로 치면 60마지기 대농이군요.
하나로 마트에서
ㅣ0키로 8만원 넘습니다
10kg 8만원이면 쌀 한가마니는 64만원?!
설마?
저는 지난해 쌀값으로 한 가마니당 20만원도 채 안 받았는데...
다행이군요.
위 쌀값이라면.. 더욱 농사를 많이, 열심히, 더욱 풍성하게 지으시기를 빕니다.
쌀농사가 전업은 아니고 부업이긴 하나
열심히 일하면
그만한 댓가에 다수확을 하게 되는 기쁨이요
쌀농사는 부업이면 전업은무엇일까요?
농사는 하늘이 지어준다고 하지요.
사람은 곁에서 거둘어주면 되니까요.
친환경농법으로 우리한테 영양가와 입맛을 듬뿍 안겨주실 것 같군요.
죄송요 20키로 입니다
실수네요
예. 오타가 났군요.
20kg에 8만원이면
쌀 한 가마니 80kg는 32만원.
이게 맞겠지요.
그래도 저한테는 쌉니다.
논 한 마지기에서 나오는 수학량을 비교하면...
농사 짓는데 들어간 비용/자재비, 인건비,. 농기계 임대료 등, 농토 구입비, 세금 등을 계산하면
쌀값은 더 올라가야 합니다.
ㅎ 감사 하네요
열무 한단 2000도 비싸다는 고가 아파트
주부들도 있든데
감사한 말씀에 힘 입습니다
모든 것에는 음양의 조화가 함께 하지요.
100% 일치하는 것은 없습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흐리면 비가 내리고, 밝으면 햇볕이 나고...
비와 햇볕이 늘 조화롭게 해야만 동실물 등 모든 것들이 함께 살겠지요.
주부님들이 진정한 애국자일 겁니다.
그러니 6.25 조금전에 출생을 하셨습니다 태어나시자마자 곧전쟁이 터졌군요
농경사회의 생활들을 아주 리얼하게 표현을 하여주셨습니다 거기다가 아름답게 가공을 하시고
양념을 넣고 재치와 해학이 있고 울림이 있으면 대상입니다 아름문학상에 응모를 하셨는지 모르지만 ,
예사롭지 않슴니다
어렷을적의 농촌에서 살 때 추억을 되새김 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예...
해방 이후, 한국전쟁 이전에 태어났지요. 산골마을에서 자라났기에 1950년대의 전쟁 후유증도 조금은 보았고요
팔이 없는 상이군인들이 몇명씩 떼를 지어서 동냥을 구하러 다녔지요.
1960년대의 가난했던 시절을 겪었고, 1970년대 초... '잘 살아보자'라는 새마을운동에도 참여했고...
2020년대인 지금 세상은 엄청나게 변화되었고, 발전해서, 모두가 다 부자되었대요.
저는 아름문학에 응모하지 않았습니다.
내년에 한번 도전해 볼까요?
네 농사일 힘듭니다. 수고 하세요,
모든 일은 다 힘이 듭니다.
농사일이 더욱 힘이 들겠지요.
'자연이다'의 닉네임.
무슨 뜻인지를 저는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친환경농법으로 농사를 짓다가 서울 올라왔지요.
예컨대 가을철 배추 모종을 심고는 농약을 전혀 뿌리지 않는다면 가을철 배추수확은?
95%는 벌레가 파먹고, 나머지 5%는 겨우 잔챙이만 ....
적고 좁은 면적이라면 농약 전혀 안치고도 농사 짓겠지만 시장 판매용이라면 어쩔 수 없이 친환경농약을 살포해야겠지요.
댓글 고맙습니다.
요즘 농사는
예전 비하면 힘들지 않습니다
기계가 발달해서
예전 20명 하던거
1시간 반이면 뚝딱 해치우는 일이 많으네요
2000평 벼베기 2시간 채안걸려 후딱 탈곡 했네요
육신의 힘으로 농사 지으셨던 부모님이 불쌍하심니다
2000평이면 논이 10마지기.
예전 일꾼을 구한다면 최소한 15명 쯤 구해서 낫으로 베어야 하며.
부인네들은 일꾼들이 먹어야 하는 밥을 하루에 여러 차례나 지어야겠지요.
부엌짝 앞에서 불을 때서.... 가마솥에 ....
아침때것, 점심밥, 저녁때것, 저녁밥을 지어서 들판으로 가져가야 하며. 막걸리통도 숱하게 날라야 하고...
그런데 지금은 기계가 2시간 작업을 하면 벼를 베고, 탈곡까지 끝내는군요.
배 과수원
4000평 합니다
과수농원이군요.
4,000평이면 엄청나게 넓군요.
저는 1,500평 과수원을 경영하다가는 실패했지요.
어머니와 둘이서 살다가 그 어머니 돌아가신 뒤... 손을 툭툭 털고는 서울로 올라와 아내와 합류했지요.
아내는 시골생활 부적응자라서....
요즘 시장에 큼직한 배가 많이도 나오더군요.
오늘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재래시장으로 구경 나가서 농산물을 구경하다가 귀가했지요.
몸은 서울에 있어도 마음은 서해안 산골마을에 내려가 있지요.
님이 부럽습니다.
대농이군요. 그것도 과수농원이라니...
요즘은 논 가까운
편이점 에서 커피나 음료를 해결 하고 식당에서 식사들 하고
여자들 많이 편해 졌지요
예
예전 제가 농촌에서 살던 1970년대 초에는 가을철 벼바슴을 하려면
여자들이 죽어났지요.
첫새벽부터 먹을거리를 준비했고, 아침밥, 아침때것, 점심밥, 저녁때것, 저녁밥, 밤중까지 작업하면 야침도 내놔야 했고...
7번이나 먹을거리를 장만해야 했던 제 어머니, 제 누나를 생각하면 그 당시의 농촌에서는 하루 종일 먹고 일하고를 반복했지요.
많은 옛기억들이 떠오릅니다.
45년 됐네요
곧 수확기가 다가 오네요
10월 중순에 수확 하는데 올해는
계절이 유난히 빨라서
10 월초에
수확 가능 할듯 싶네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