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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5일 연중 제23주일
제1독서 : 이사 35,4-7ㄴ
제2독서 : 야고 2,1-5
복 음 : 마르 7,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사람이 식당에서 식사하고 있는데 종업원이 물을 자신에게 쏟았습니다.
날벼락 맞은 기분이었고, 기분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화를 전혀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하게 웃으면서 물을 쏟은 종업원을 향해
“괜찮아요. 놀라지 않았어요?”라며 오히려 배려하는 모습까지 보이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화부터 내지 않나요?
이분은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신앙인도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남을 배려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글쎄, 그 종업원이 자신의 이상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즉, ‘이만한 일에 격분하지 않고 신사적으로 행동할 줄 아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목적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호감 가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소위 갑질하는 사람의 모습이 종종 인터넷에 나옵니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없습니다.
그와 반대로 상대방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모습은
그 마음이 어떤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외적으로는 보기에 분명히 좋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 하나,
주님께 우리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있습니까?
주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는 우선 주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절대로 대충 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오늘 복음에서 잘 드러납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자, 여러 과정을 걸친 행동을 하십니다.
우선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고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에파타!”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전지전능한 힘으로 그냥 치료해주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에게는 이런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스스로 느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를 보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그래서 계속 대화를 나누고 싶고, 깨물어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런 좋아하는 마음을 아이도 느낍니다.
어떻게 보면 귀찮게 하는 것인데 싫어하지 않습니다.
주님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이런 과정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병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그에게
이렇게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인해
용기를 내어 힘차게 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일상 삶 안에서 느껴보십시오.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주님께 잘 보여야 하니까요.
‘에파타, 들어라’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군중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어
손가락을 그의 귓속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려라’라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어느 신부님의 소중한 삶의 체험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삶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 삶에 있어서
‘잘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사제생활을 시작하신 지 15년 되는 즈음
이탈리아의 피렌체 근교에 있는 ‘사제학교’로 연수를 떠나셨답니다.
그곳에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온 사제나 부제, 신학생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공부도 하고 작업도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 한번은 세탁소에서 작업을 하게 되셨는데,
당시의 체험을 아래와 같이 적으셨습니다.
“저와 같이 일하게 된 짝지는 17살의 앳된 예비신학생이었습니다.
너무 어려서 마치 아들과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도미니코라는 예비신학생은 슬로바키아에서 왔습니다.
그는 순하고 착했습니다. 그리고 저와 100% 일치를 해주었습니다.
제가 흙 묻은 옷을 손빨래하자고 하면,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기계로 빨래하자고 하면, 그렇게 했습니다.
또 빨래를 밖에다 널자고 하면, 두말하지 않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으니 실내에 빨래를 널자고 하면, 동의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완전히 일치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습니다. 도미니코와 하는 세탁소 일은 평온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치도 굳건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저와 도미니코와의 일치가 진정한 일치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제 의견을 중심으로 일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제가 의견을 말하면, 도미니코는 제 뜻을 따라주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를 중심으로 일치해야 함을 깨닫게 된 저는 그의 의견을 먼저 물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의견을 먼저 물어보던 날, 도미니코는 무척 수줍어하였습니다.
그러나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작은 소리로 자기 의견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날부터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미니코의 뜻을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제 뜻을 중심으로 일하다가, 형제의 뜻을 중심으로 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날 이후, 도미니코의 얼굴을 더욱 밝아졌고, 더 적극적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물어보지도 않는 자기 집안 이야기와 성소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둘 사이의 일치가 깊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가운데 서 있던 귀먹은 반벙어리를
당신 가까이 불러내셔서 그의 귀를 열어주시고
또 혀를 풀어서 말을 할 수 있게 치유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에파타(열려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전혀 귀 기울일 줄 모르는
귀머거리인 우리를 향한 말씀이 바로 ‘에파타’입니다.
우리는 때로 너무 무심해서 가난한 이웃들은 배려하지 못합니다.
바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간절한 외침이 ‘에파타’입니다.
지난 오랫동안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살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주님의 음성이 바로 이 ‘에파타’입니다.
지금 이 순간 코로나 19로 비록 경제적으로 힘들고 고통이 따른다고 해도
우리 삶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이며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달으라는 주님의 권고가 ‘에파타’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청명한
가을이 열린다.
닫혀있는
아픔을 통해
우리를
치유로 초대하시는
주님이시다.
치유를 통해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된다.
사랑받는
주님의
자녀들이다.
다시
예수님을 향하는
치유의 시간이다.
예수님의 치유는
지극히
인격적이고
과감하게 친밀하다.
닫혀있는
귀와 입을
열어주신다.
우리의 아픔을
주님께
숨기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치유의 시작이다.
주님께서는
치유를 통해
행복을 전달하신다.
주님께서는
자녀들의
행복을 원하신다.
행복은
병든 마음이
치유되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자유롭게
갈 수 있다.
정말이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진정한 치유는
주님과의 소통이다.
건강한 삶은
건강한 소통이다.
소통은
다시금
존재의 가치를 일깨운다.
사람의 삶이란
관계가 회복되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는
사랑의 소통이다.
건강한 소통을
성찰하는
은총의 주일이다.
소통의 여정이
치유의 여정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태풍 아이다의 영향으로 뉴욕에 엄청난 비가 내렸습니다.
제가 있는 신문사도 지하에 물이 들어왔습니다.
아침에 미사에 가니 퀸즈 성당도 지하에 물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낙담하지 말아라, 내가 머무는 집도 이렇게 물이 들어왔단다.”
아무쪼록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이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면 좋겠습니다.
비가 온 뒤에 밝은 태양이 비추듯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친구 따라 갔는데 좋은 일이 생기는 경우입니다.
친구의 결혼식에 축하해주러 갔다가 거기서 신랑 측 친구와 인연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친구 따라 갔다가 평생의 배우자를 만나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허리가 아프다는 신부님을 차로 물리치료 받는 곳까지 함께 갔습니다.
기다리면서 저도 같이 치료를 받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친절하게 엑스레이까지 찍어 주셨습니다.
처음으로 저의 허리와 목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아직은 큰 이상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트레칭을 자주하라는 말을 들었고, 덤으로 목과 허리에 물리치료를 받았습니다.
친구 따라 우연히 갔는데도 정성껏 치료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가게는 몫이 좋아야 하고, 집도 학군이 좋아야 하듯이
좋은 친구가 있으면 덤으로 주어지는 것도 많습니다.
돌아보니 저의 사제성소도 친구의 영향이 컸습니다.
할아버지의 유언으로 형제 중에 한명은 사제가 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제가 사제가 돼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습니다.
저는 집안 형편상 공고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려고 했습니다.
다른 직업을 갖는다면 교사나 군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978년 성당 주일학교에서 3박4일 여름 산간학교를 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권유로 산간학교에 참석하였습니다.
거기서 운명처럼 성당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친구 중에 몇 명은 신학교에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본당 주임신부님도 학생들을 무척 아껴 주셨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신학교에 가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때 만난 친구 중에 저를 포함해서 3명이 사제가 되었습니다.
한 친구는 서울에 저는 뉴욕에 그리고 또 한 친구는 시애틀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언제나 힘이 되어주는 친구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이 메시아입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보시오.’
안드레아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형 시몬에게 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리고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너는 앞으로 게파라고 불릴 것이다.’
게파는 베드로라는 뜻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아를 따라갔다가 반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필립보도 친구 나타나엘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나타나엘은 친구 덕분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전해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신앙인의 길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전에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눈 쌓인 길을 걸어갈 때는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그 길은 뒷사람이 따라오는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랍니다.”
신앙인은 친구가 되어주신 예수님 따라서 하느님 나라로 가는 사람입니다.
내가 가는 길이 이웃에게 하느님 나라로 가는 이정표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모두에게 쏟아지는 주님의 축복을 봅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 7,32)
사람들이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이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 옵니다.
몸이 건강한 이웃들이 그를 위해 수고해 준 것입니다.
듣지 못하니 스스로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겠지요.
그는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셨다."(마르 7,33)
말씀 한 마디로도 충분히 그를 고쳐 주실 수 있으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치유 행위를 하십니다.
먼저 그를 따로 데리고 나가신 것은 지금 당신이 온전히 그에게 집중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가난에 약함까지 겹친 상황에서
타인의 이목을 견디어야 하는 게 마냥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었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마치 고대 주술사가 치료 행위를하는 느낌이지요.
만일 그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단호한 목소리의 한 말씀으로도
당신의 사랑과 의지를 충분히 전달하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귀와 입이 불편한 이에게 딱 알맞는 맞춤형 치유 행위를 해 주시는 겁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자기 앞에서 움직이시는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
그리고 귀와 혀끝으로 느껴지는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
아주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정성과 힘을 느낍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34)
예수님은 이 치유를 홀로가 아니라 성삼위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행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성부 하느님과 통하시고, 한숨으로 성령의 숨과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지요.
이어서 말씀으로 치유 행위를 완성하십니다. "에파타!" 그리고 열립니다.
제1독서에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울려 퍼집니다.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이사 35,4)
마음이 불안한 이들, 눈멀고 귀먹고 말 못하고 움직임이 불편한 이들,
결핍과 갈망으로 마음이 헤집어진 모든 이들을 위해 주님께서 오십니다.
주님은 그들이 겪어온 고통과 설움을 아시고 각자에 맞는 치유와 힘을 불어넣어 주실 겁니다.
제2독서의 저자는 재력이나 겉모습만 보고 가난한 이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이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야고 2,5)
부자들이 이 세상에서 누린 복을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상속받습니다.
부자들이 무얼 잘못해서라기보다 이미 이 세상에서 재물과 명예, 안락과 향락 등으로
"받을 상"을 다 받은 까닭이 아닐까 합니다.
반면 가난한 이들에게는 아직 열리지 않은 선물이 천상의 축복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공정하시고 정의를 사랑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겸손의 축복은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궁핍 가운데서 온유함과 친숙해지고
부유한 사람들은 풍요 가운데서 교만과 친숙해집니다.“
(성 대 레오 교황의 [참된 행복에 대한 강론]에서)
이 가르침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는 무조건 구원되고 부자들 무조건 멸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만의 위험에 쉽게 노출되기 마련인 어떤 부자가 오만과 이기심을 버리고
관대하게 나눔을 실천하며 가난한 이들도 차별없이 존중한다면
그가 쌓은 겸손의 덕이 주님께 얼마나 큰 공로이고 기쁨이 되겠습니까!
반면 가난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 불평불만으로 온유와 겸손의 덕을 획득하지 못하면
그 고통이 또한 얼마나 크겠습니까!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마르 7,37)
오늘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하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이 경탄하며 말합니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의 결핍을 채워 주시면서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부여하신 온전함을 회복시켜 주시니, "모두 훌륭할" 수밖에요!
이처럼 주님은 모든 이가 온전해지기를 바라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빈 곳이 채워져 더욱 신명나게 겸손해지기를,
그리고 부유한 이들은 과욕과 오만으로 넘치기 전에
행복하게 겸손을 배우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그분이 하시는 일은 모두의 구원을 향하기에 모두 훌륨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현재 물질적으로 부유하건 가난하건 구원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 있답니다.
분명한 건 하느님과 일치하여 누리는 영원한 행복이 온유하고 겸손한 영혼에게 허용된다는 점이지요.
그래야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분과 이질감 없이 하나가 될 수 있으니까요.
우리 각자가 지닌 부유함과 가난함을 성찰하고,
모든 부분이 구원의 자리가 되길 희망하며,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기도로 얻는 세 가지: 손가락, 숨, 혀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기도할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세 가지가 나옵니다.
오늘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의 귀와 혀를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이 치유 사화는 단순한 육체적 장애의 치유를 넘어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를 치유하기 위해 하시는 모든 행위가 상징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를 ‘군중 밖으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이는 ‘세상 밖으로’와 같은 의미입니다.
세상의 소리가 우리 귀를 먹게 만듭니다.
옛날에 경찰이 허위 진술을 하도록 유도할 때
잠을 며칠 동안 재우지 않아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진술하도록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머묾은 그런 세상에서의 탈출을 의미합니다.
이를 ‘광야’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광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다음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십니다.
손가락으로 본인의 귀를 막고 잠시 있어 보십시오. 무슨 소리가 들릴까요?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세상과 단절되고 자신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남은 바깥세상에서가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이뤄집니다.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은 바깥세상만이 아니라 ‘자기 생각’입니다.
나와의 대화에서도 귀를 막고 내면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내 가장 깊은 곳에 계십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하늘을 향해 ‘한숨을 내쉬십니다.’
왜 그를 향해 숨을 내쉬지 않고 하늘을 향해 내쉴까요?
온 공기 안에 당신의 숨이 머물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동양에서는 이를 ‘기’(氣)라 표현하고 호흡을 통해 이 기를 자신 안에 모으는 명상이 발달했습니다.
물론 ‘숨’은 그리스도교에서 ‘성령’에 해당하는 단어와 일치합니다.
세상을 끊고 생각을 끊고 자기 내면 안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말씀하십니다.
귀를 막았을 때 결국 나에게 들리게 되는 것은 ‘본인의 호흡 소리’입니다.
모든 명상에서 호흡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여러 호흡법이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호흡을 마치 성령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소리처럼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손에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그에게 “에파타!”(열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사람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예수님의 ‘침’은 또한 ‘성령’을 의미합니다.
‘숨’이 성령의 진리 말씀을 나에게 전하는 역할이라면,
‘침’은 그 말씀이 입 밖으로 나오게 만드는 힘입니다.
성령 강림 때 제자들이 불혀와 같은 형상의 성령을 받고 복음을 전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세상과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귀를 막으심’
- ‘당신의 목소리를 듣게 하심’ - '들은 말씀을 세상에 전하게 하심’.
이렇게 세 단계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이 과정을 적용해 볼까요?
한 자매님이 귀를 막고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고
그 말씀을 전하는 기도의 체험을 말씀하신 것을 옮겨봅니다.
“그때 제 나이가 47세이고 3남 2녀 중고등학생의 엄마였습니다.
남편은 대학병원 의사로 근무하다가 막 개업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게 되어
집을 이탈리아 가구들로 장식하고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혈안이 되어 살았습니다.
손님들을 초대하여 그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줄도 모르고 교만과 자만심으로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노하셨는지 병원에 의료 사고가 생겼습니다.
환자가 주사를 맞다 다리 신경이 마비되었습니다. 그 환자는 준재벌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 다리를 제대로 해 놓지 않으면 병원을 망하게 만들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때 제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망하게 되었을 때 친구들에게 창피당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세례는 받았지만, 하느님을 찾기보단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다니고
부적이란 부적은 다 써서 붙였습니다.
심지어 점쟁이 말대로 보따리를 싸서 피신까지 했었습니다.
2~3개월 후에 정신을 차리고 하느님께 매달렸습니다.
성지로 매일 미사를 다니고 심혈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할 때는 두 시간 넘게 걸렸습니다.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 하면
아버지가 진정 내 아버지로 여겨질 때까지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면
아버지의 영광만을 위하는 마음이 들 때까지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주님을 만났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저의 본성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된 것 같았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이제 의료 사고가 해결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완전히 사라지고
그 큰 두려움도 사라져 우리 집이 거지가 된다 해도
주님만 있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를 두렵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참 평화와 행복, 참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보답하기 위해 성당에서 갖은 봉사를 다 했습니다.
남들이 꺼리는 일들부터 땀 흘리며 했습니다.
몇 달 후에 그 환자가 스스로 연락을 줘서 조건 없이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주었습니다.
그 분의 완고하던 마음을 주님께서 돌려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이후에도 힘든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 목소리만 생각하면 지금도 모든 것에 감사하고 행복할 뿐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한 사람의 귀를 막으시고, 그 사람에게 당신 목소리를 들려주시며,
그 사람을 통해 당신 사랑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내가 세상과 나 자신에게 죽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그분의 사랑이 나를 통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