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간
ㅡ우리는 서로의 앞면만 본다
김지율
사라진 사람들과 우리 사이
몇 명의 사람들이 더 살고 있을까
어떤 밤은 침묵으로 또 어떤 밤은 피투성이로
꼭 무엇이 되려고 살았던 것은 아닌데
너로부터 시작된 기억이 각목처럼 천천히 굳어갈 때
인간이라는 말과 사랑이라는 말과 슬퍼하지 않기 위해 슬퍼한다는 말이 같은 의미라면 우리 오늘만 살기로 하자
너는 아직도 그 겨울 끝에서 흰 눈 위에 글씨를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가 지운다 스스로의 흔적을 지우며 사라지는 것들 앞에서 자꾸 입에 침이 고일 때, 그러니 다시 묻겠습니다
사라지지 않는 돌은 진실에 가깝지 않니
굳어지는 순간에 무너진 것들이 가슴에 푸른 알을 낳습니다 창밖으로 반쯤 잘려 나간 누군가의 기억 속으로 내가 자꾸 미끄러져 갈 때 자꾸 무너져 내릴 때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사람은 한 단어이고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인데
사람의 일을 사람처럼 하는 사람과
사람의 일을 사람처럼 하지 않는 사람과
긴 여름이 지나가고 서로에게 달라붙어 함께 사라진 것들은 정말 사람이었을까 사람이 아니었을까
물을 주지 않아도 길게 자라는 나무 사이로 어떤 사람의 이름과 어떤 사람의 얼굴이 지나간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웹진 『시인광장』 2025년 2월호 발표
김지율 시인
2009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등단. 문학박사. 저서로는 시집으로 『내 이름은 구운몽』(한국문연, 2018)과 『우리는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야 한다]』(파란, 2022), 시인과의 대담집 『침묵』, 詩네마 산문집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들』과 학술 연구서 『한국 현대시의 근대성과 미적 부정성』, 『문학의 헤테로토피아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공저로 『교차하는 페미니즘』 등이 있음. 2013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 현재 경상국립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