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하-몽산포夢山浦 일기
1
그대와 함께 걷는 길이
꿈길 아닌 곳이 어디 있으랴만
해 질 무렵 몽산포 솔숲 길은
아무래도 지상의 길은 아닌 듯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참으로 아득한 꿈길 같았습니다.
어딘가로 가기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함께 걸을 수 있는 것이 좋았던 나는
순간순간 말을 걸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 속마음
서로가 모르지 않기에.
그래, 아무 말 말자. 약속도 확신도 줄 수 없는
거품뿐인 말로 공허한 웃음 짓지 말자.
솔숲 길을 지나 해변으로 나가는 동안
석양은 지기 시작했고, 그 아름다운 낙조를 보며
그대는 살며시 내게 어깨를 기대 왔지요.
함께 저 아름다운 노을의 세계로 갈 수 없을까.
그런 생각으로 내가 그대의 손을 잡았을 때
그대는 그저 쓸쓸한 웃음만 보여 줬지요.
아름답다는 것.
그것이 이토록 내 가슴을 저미게 할 줄이야.
몽산포 해 지는 바다를 보며
나는 그대로 한 점 섬이고 싶었습니다.
그대에겐 아무 말 못했지만
사랑한다, 사랑한다며 그대 가슴에 저무는
한 점 섬이고 싶었습니다.
2
걷다 보니 어느덧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여전히 바다는 우리 발밑에서 출렁이고 있었는데
우리는 이제 제 갈 길로 가야 합니다.
또 얼마나 있어야 이렇게 그대와 마주할 수 있을지.
이런 날이 우리 생애에 또 있기나 할는지.
둘이서 함께한 이 행복한 순간들을
나는 공연한 걱정으로 다 보내고 말았고.
몽산포, 그 꿈결 같은 길을 걸으며
나는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내 발밑에서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그대 또한 내 삶의 한가운데
밀려왔다 기어이 밀려가리라는 것을.
그대와의 동행이 얼마간은 따뜻하겠지만
더 큰 쓸쓸함으로 내 가슴에 남으리라는 것을.
몽산포, 솔숲 길 백사장은 그대로 있겠지만
그대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으리라는 걸.
몽산포, 그 꿈결 같은 길.
아아 다시 돌아와야 하는 길을 간다는 건
못내 쓸쓸한 일이라는 걸.
*이정하(1962.~, 대구 출생) 시인은 사랑에 대한 감정을 비교적 솔직하고 쉬운 언어로 표현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는 시집이 1995년 발간되어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적도 있었습니다.
*시인의 대표작으로는 “사랑의 이율배반”, “사랑하는 이유” “낮은 곳으로”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사랑”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 “한 사람을 사랑했네” “간격” “종이배” “숲” “바람 속을 걷는 법” “기다리는 이유”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 “별” “꽃잎의 사랑” “그 저녁 바다” “눈이 멀었다” “황혼의 나라” “삶의 오솔길을 걸으며” 등이 있습니다.
*위 시는 시인의 시집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는 제목의 시에 실려 있는 것을 올려 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