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광주(夜光珠)가 침몰하면
정약용(丁若鏞)의 「자찬묘지명(집중본)」과 그의 현손인 정규영이 1921년에 편찬한 『사암선생 연보』에 의하면(사암俟菴은 정약용의 호) 정약용이 40세가 되던 해(순조 원년, 辛酉, 1801)에 신유옥사(辛酉獄事)에 걸려들어 그 해 음력(이하 모두 음력) 2월 8일에 입옥되었다가 27일에 경상도의 장기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 해 10월 ‘황사영(黃嗣永) 백서사건(帛書事件)’ 때 다시 체포되어 입옥되었다가 11월에 강진으로 이배(移配)되었다. 무슨 죄가 그토록 무거웠던가. 「상례사전서」(喪禮四箋序)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강진은 옛날 백제의 남쪽 변방으로 땅이 낮고 비열한 풍속이 특이했다. 이때에 이곳 백성들이 유배된 사람 보기를 마치 큰 독(毒)과 같이 해서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문을 부수고 담장을 허물고 달아났다. 한 노파가 나를 가련하게 여겨 머무르게 해 주었다. 이후에 나는 창문을 막아 버리고 밤낮 혼자 외로이 처해서 더불어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다. 이에 흔연히 스스로 경하하기를, “내가 여가를 얻었도다(余得暇矣)."라고 하고…….
고독을 여가로 전환시킨 정약용. 그는 문을 닫아걸고 예서(禮書)를 읽게 되지만 이내 오직 『주역』 연구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유배된 지 7년이 되기까지 네 번을 고쳐 다섯 번을 써서 드디어 『주역사전』(周易四箋)(처음에는『周易心箋』이라 했다)이라는 정약용의 일생일대의 회심작을 완성하게 된 거다. 이때가 47세(순조 8, 戊辰, 1808)였지만 풍비(風痹)를 얻어 폐인이 된 지가 한참 되었다. 장자 학연(學淵)에게 주는 「학연에게 보이는 가계」(示學淵家誡)라는 글에서 “나는 지금 풍병으로 사지를 못 쓰니 이치로 보아 오래 살 것 같지 않다(吾今風痹癱瘓理不能久)."라고 했듯이 자신의 죽음이 멀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이 책을 얼른 세상에 펴게 되기를 조바심하면서 경상도 사람 윤영희(尹永僖, 字는 畏心, 정조 1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校理 등을 역임. 신유옥사 때 정약용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는 등 평생 동안 정약용과 친한 친구였다.)라는 친구에게 서찰을 띄웠다. 이 서찰에서 문왕(文王)이 유리(羑里)의 7년 감옥살이에서 『주역』을 연역한 것에 빗댄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또한 귀양살이 7년 만에 『주역사전』을 완성하게 되었다면서 그 내력을 이렇게 말했다.
옛날의 성현들은 우환이 있을 적마다 『주역』으로 처리하였습니다. 내가 오늘의 처지를 감히 옛날 성현들께서 조우하셨던 바에 비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고생스러움과 궁액을 만난 사정은 현불초(賢不肖)가 같은가 봅니다. 7년 동안 유락하여 문을 닫고 홀로 칩거하니, 노비들도 나와는 같이 서서 얘기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낮에 보는 것이라고는 오직 구름의 그림자와 하늘의 빛뿐이요, 밤에 듣는 것이라곤 벌레 소리와 바람결에 불리는 대나무 소리뿐이었습니다. 정적이 오래 되니 정신과 생각이 모여서 옛 성인의 글에 전심치지할 수가 있어, 자연히 울타리 밖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엿볼 수가 있게 되었을 따름입니다.
옛 성현들이 우환이 있을 적마다 『주역』으로 처리했다는 말은 “역을 지은 분은 아마도 우환이 있었을진저(作易者其有憂患乎)."라고 한 공자의 말을 의미한다. 성현의 울타리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자신의 공부의 경지를 겸손하고 완곡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주역』은 진정 난해한 경전이었던 모양이다. 『주역』 연구에 몰입하게 된 경위를 이 서간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릇 천하에 사고(四庫)의 많은 책과 이유의 비문(二酉之祕) 등 책이라고 이름한 것은 어느 것이나 실망하여 책을 덮은 적이 없었는데 홀로 『주역』만은, 바라보면 기가 꺾여 탐구하고자 하여도 감히 손을 못 댄 적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신유 년(순조1, 1801) 봄에 장기로 귀양 가서, 가을에 나의 운명을 점쳐서 준지복괘(屯之復卦)를 만난 꿈을 꾸고 깨어나서는 기뻐하여, 처음에는 준(屯)했으나 그 준이 변하여 양(陽)이 돌이켜진다는 것이니 아마도 종국에는 경사가 있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점은 맞지 않았고, 또 서울로 체포되어 왔다가 다시 강진으로 귀양을 왔습니다. 그 이듬해 봄에 「사상례」(士喪禮)를 읽고, 이어서 상례에 관한 여러 책을 읽어 보니 주(周)나라의 고례(古禮)는 대부분 『춘추』(春秋)에서 증거를 취하였다는 걸 알게 되어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읽기로 하였습니다. 기왕 『좌전』(左傳)을 읽기로 한 것이니 상례에 마땅치 않는 것이라 해도 널리 읽지 않을 수가 없어 마침내 『춘추』에 실려 있는 관점(官占)의 법에 대해 때때로 완색하여, 「진경중적제지서」(陳敬仲適齊之筮, 莊公 22년)와 「진백희가진지서」(晉伯姬嫁秦之筮, 僖公 15년)와 같은 곳의 상하(上下)를, 실마리를 뽑아내어 찾아 한눈팔지 않고 깨닫는 듯하다가도 도리어 황홀하고 어렴풋하여 도저히 그 문(門)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의심과 울분이 심중에 교차되어 거의 먹는 것을 폐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모든 예서를 다 거두어 갈무리하고 오로지 『주역』 한 벌만을 책상 위에 놓고 밤낮을 이어 깊이 잠심하고 완색했으니, 대개 계해 년(42세, 순조 3, 1803) 늦은 봄부터는 눈으로 보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 입으로 읊는 것,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 필묵으로 쓰는 것에서부터 밥상을 대하고, 변소에 가고, 손가락을 튀기고, 배를 문지르는 것까지 어느 것도 『주역』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공부는 『예서』에서 『춘추』로, 『춘추』에서 『주역』으로 성난 불길처럼 옮아가게 되고, 이렇게 하여 그는 마침내 『주역』의 이치를 꿰뚫어 알아 가면서 『주역사전』의 집필에 들어갔다고 적고 있는데, 이 무렵에 그는 「우래십이장」(憂來十二章)이라는 시를 남겼다. 12장 가운데 제3장을 옮겨 본다.
一 顆 夜 光 珠
偶 載 賈 胡 船
中 洋 遇 風 波
萬 古 光 不 白
한 알의 야광주가
우연히 중국 장삿배에 실렸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풍파를 만나니
만고에 그 빛을 다시는 볼 수 없네
『주역사전』을 쓰고 있는 자신과 그 연구의 성과를 두고 야광주에 비기고, 그러나 자신이 이대로 침몰하고 말면 만고에 『주역』의 빛은 다시는 볼 수가 없을 것이라고 탄식하고, 체념하고, 또 자부하고 있다.
정약용이 보낸 『주역심전』(周易心箋)에 그의 중형 정약전이 서문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 만년에 바닷가(강진)로 귀양을 가서 『주역사해(주역심전)』를 지었는데 나는 처음에는 놀랐고 중간에는 기뻤고 끝에는 무릎이 굽혀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미용(美庸:정약용의 字)은 동이(東夷)의 사람이요, 후생의 끝이다. 사승(師承)의 도움도 없었고 홀로 보고 홀로 깨쳤으나 조그만 칼로 가르고 베는 기세가 대를 쪼개는 것과 같다. 구름과 안개가 걷히면 노예도 하늘을 본다. 이제부터는 누가 미용을 삼성(三聖)의 양자운(揚子雲)이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으랴! …… 가령 미용이 편안하고 부하고 높고 영화로웠다면 반드시 이런 책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미용이 뜻을 얻지 못한 것은 곧 아우 자신을 위해서 행운이요, 홀로 우리 유학계만 행운인 것이 아니다. 내가 미용보다 몇 살 위지만 문장과 학식은 그의 아래가 된 지 오래다. 거칠고 얕은 말로 이 책을 더럽힐 수 없으나 선배가 영락하면 백세(百世)를 기다리기 어려우니 하늘 아래 땅 위에 이 책을 만든 자는 미용이요 이 책을 읽는 자는 오직 나인데, 내가 또 어찌 한마디 칭찬이 없을 수 있겠는가. 단지 나는 바다 섬에 갇힌 죄인으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미용과 더불어 한세상 한 형제가 될 수 있으랴! 이 책을 읽고 이 책에 서문을 쓰는 것으로 또한 족하다. 나는 참으로 유감이 없다. 아! 미용도 또한 유감이 없을 것이다.
선배가 영락하면 백세(百世)를 기다리기 어렵다는 말은 ‘사암’(俟菴)이라는 정약용의 호에 빗대어 한 말이다. 사암이란 말은, “백세(百世)로써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되지 않는다(百世以俟聖人而不惑)."라는 『중용』의 한 구절에서 얻어 왔거니와 손암 자신이 죽고 나면 이 책을 후세에 성인이 나와야 알아볼 터인데, 성인을 두고 어찌 백세 즉 3천년을 기약하겠는가라는 뜻이다.
불운이 행운이라는 정약전의 이 역설에 점두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이 저술이야말로 그의 만년 대작 정법삼서(政法三書)인 일표이서(一表二書])로 표방한 그의 국가개혁 사상의 뿌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일표이서가 나오기 전이니 정약전은 차치하고라도 오늘날의 학자들이 정약용의 국가개혁사상을 논하면서 하나같이, 유배 초기에 확립된 정약용의 역학사상이 그의 개혁사상의 뿌리였음을 보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두 아들에게 보이는 가계」(示二子家誡)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학연(學淵) 학유(學游) 두 아들을 꾸짖어 가르치고 있다.
내가 죽은 뒤에 아무리 정결한 희생과 풍성한 안주를 진설해 놓고 제사를 지내 준다 하더라도 내가 흠향하고 기뻐하는 것은, 내 책 한 편을 읽어 주고 내 책 한 장(章)을 베껴 주는 것보다는 못하게 여길 것이니 너희들은 그 점을 기어해 두어라.
『주역사전』은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은 문자이며 절대로 인력으로 통할 수가 있거나 지혜와 생각이 다다를 바가 아니다. 능히 이 책에 잠심하여 오묘를 두루 통하는 자가 있다면 곧 자손이며 벗이니 천재일우이더라도 애지중지하여 보통의 인정을 배로 하여 대하여라.…… 이『주역사전』과 『상례사전』만 전습할 수가 있다면 다른 것들은 폐기한다 하더라도 괜찮겠다. 나는 가경 임술 년(순조 2, 1802) 봄부터 곧장 저술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 붓과 벼루를 울타리와 담장으로 하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았다(蚤夜不息). 왼쪽 어깨가 마비되어 마침내 폐인이 되고, 시력이 아주 어두워져서 오직 안경에만 의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째서냐? 너희들(두 아들)과 학초(學樵:중형 丁若銓의 長子)가 있기에 전술(傳述)하여 떨어뜨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금 학초는 불행히 단명하였고, 너희들은 영락하여 사람이 적은 데다, 성미마저 경전을 좋아하지 않고 오직 후세의 시율(詩律)만을, 얕은맛을 조악하게 알고 있으니 『주역사전』과 『상례사전』 두 책이 결국 멸하고 어두워져서 빛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까 참으로 두렵구나.
이 글은 “가경 무진 년(47세, 순조 8, 1808) 중하에 여유병옹(與猶病翁)이 다산정사에서 쓰노라.”라고 되어 있으니 『주역사전』을 완성하던 해가 된다.
이리하여 정약용은 『상례사전』과 『주역사전』 두 책 가운데 특히 『주역사전』만이라도 세상에 펴주길, 미거한 그의 아들들보다 그의 친구 윤외심에게 기대를 걸게 되었던 것이다. 「윤외심에게 드림」(與尹畏心)이라는 서찰은 그것을 위하여 쓰게 되었고, 이 서신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중풍으로 마비되고 뼈가 아파 죽을 날이 멀지 않았는데, 드디어 입다물어 펴지 않고 머금은 채 땅속으로 들어가면, 성인을 저버리는 것이 심하다고 스스로 생각하였습니다. 온 세상을 두루 살펴보아도 오직 그대만이 비루하다 하지 않고 버리지도 않을 것 같아 작은 종이에 침울한 심정을 대략 밝혔사오니, 그대는 잘 살펴 동정해 주십시오.
정약용은 자신의 『주역사전』을 두고 “하늘의 도움을 얻은 문자(得天助之文字)이며” “절대로 인력으로 통할 수가 있거나 지혜와 생각이 다다를 바가 아니다(萬萬非人力可通智慮所到)."라고 했다. 야광주에 비기기도 했다. 그것이 전해지지 않을까 애를 태운 건 당연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