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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공동체가 될 때 건강하다 (행3-9)
2026년 8월 10일 (월요일)
찬양 : 우리는 주의 움직이는 교회
본문 : 사도행전 9:1-31절
☞ https://youtu.be/lmGKKdCN3iw?si=dTkCXdpKXx_8qVq9
주일을 보내고 이제 계절이 바뀐 듯 선선한 아침을 만난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능력을 보며 다시금 인간이란 존재의 연약함과 세상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묵상하며, 찬송하게 된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
금주 간은 그간 미뤄둔 일들을 처리하며 새로움을 향한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 나를 다시 백지로 드리되 주님이 쓰실 수 있는 그릇으로 나를 만드는 시간을 출발한다.
주님이 나를 어디로 이끄실지, 무엇을 말씀하실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선하신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가장 선함을 믿기에 나를 버리고 오직 주님의 생각에만 온전히 맡기려 한다. 주님 말씀하시고 나를 인도하소서.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은 교회를 잔멸하려던 야생 멧돼지 같은 사울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거듭나게 하셨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소중한 장면을 담고 있다.
복음이 핍박에도 오히려 예루살렘을 넘어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을 향해 번져가고 있을 때 사울이란 변화되기 전 바울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1-2절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여기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를 알아야 한다. 당시 다메섹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220km나 떨어진 수리아(시리아) 지역의 도시였다. 그런데 어떻게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이 다른 나라에 있는 사람들을 체포하여 압송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는가?
당시 로마 제국은 피지배 민족의 종교를 인정하는 관용 정책을 폈지만, 특히 유대교에 대해서는 파격적인 특혜를 주었다. 주전 47년경,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유대인들이 제국 어디에 살든 자신들의 율법을 따라 살 수 있도록 허락하는 '자치권 칙령'을 내렸다.
이 칙령에 따라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은 유대 지역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모든 유대인의 '최고 종교 지도자'로 공식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이것을 제시하면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 있는 회당장은 사울이 요청한 것을 넘겨줄 의무가 있었다.
따라서 로마 관할인 다메섹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이단 문제'에 대해서는 로마가 개입하지 않고 대제사장이 자체적으로 재판하고 처벌(체포, 태형 등)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한 것이다.
사울이 요청하여 받은 것은 바로 산헤드린 공회의 전권 대사로 막강한 권력을 위임받은 것이다. 이렇게 사울은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그리스도인을 붙잡기 위해 아니 교회를 잔멸하려는 멧돼지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이다. 교회를 잔멸하려는 살기 등등한 사람이 준비되었고, 그것을 합법적으로 이룰 공문과 권력까지 손에 쥔 상태이니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교회는 멧돼지 사울에 의해 완전히 잔멸되어야 할 상황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 무더위를 하루 아침에 사라지게 하듯 이 모든 계획을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게 하고 도리어 복음의 증인으로 바꾸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난다. 3-4절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러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이 짧고 강렬한 빛과 음성은 사울의 믿음과 지식과 경험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시는 이 장면은 사울이 그간 믿고 달려온 자신의 삶 전부를 송두리째 뒤집는 사건이었다.
그는 누구시냐고 물었고, 주님은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를 믿는 자들이 신성을 모독하고 율법을 깨뜨리는 자라고 확신하며 살기 등등하게 달려왔는데 이들을 완전히 잔멸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가장 선한 길이라고 믿었는데 그 세계관이 완전히 깨진 것이다.
사울은 예수님을 찾지도, 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예수 믿는 자를 죽이려고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맹렬한 적대자를 압도적인 빛으로 덮으시며, 폭력적인 열심을 꺾으시고 은혜로 강권하여 굴복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그가 행할 일을 위해 시내로 들어가라고 명하신다. 6절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핍박하던 자를 굴복시켜 돌려보낸 것이 아니다. 그에게 행할 일을 지시하려고 부르신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며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사흘을 기다린다. 9절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생각해 보면, 자신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행했던 살기와 핍박이, 사실은 영광의 주님을 대적하는 무서운 반역이었음을 깨달았을 때의 그 심리적 충격과 절망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거기에 시력의 상실까지 겹쳤으니, 이런 충격은 사울에게서 음식을 먹고자 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마저 완전히 앗아가 버렸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주님께서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신 그 음성을 기억하며 겸손히 기도하며 기다렸을 것이다. 이 사실은 주님이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확인된다. 11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주님이 인정하는 진정한 사울의 기도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님을 나의 주로 인정하는 첫 기도의 자리였으며, 그분에게 절대적인 항복을 선언하는 순간이었고, 주님의 언약을 기다리는 기도였다.
그렇게 사울은 사흘이란 시간을 통해 자신의 이전 삶을 장사지내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시간을 거쳤다. 이 시간 하나님은 급히 아나니아를 환상 중에 부르시고 사울에게 안수하라 명을 내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15-16절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어제까지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을 가하던 자(박해자)'였던 사울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할 자(순교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다. 이것은 사울에게 준 명령이 아니다. 사울 스스로 선택하게 될 은혜의 결과였던 것이다.
아나니아는 순종해서 사울에게 안수하며 주님의 뜻을 전했다. 그 평범한 제자의 안수를 통해 바울은 즉시 눈을 떴고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회복했다. 성령의 충만함이 그를 이끌었다. 그는 다메섹의 제자들과 며칠을 있다가 즉시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한다. 20-21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참으로 놀라운 성령의 일하심이다. 그분이 사울을 깨우시며 생각나게 하시고 알게 하신 것이다. 다메섹 회당이 얼마나 놀라고 분주해졌을지 상상이 된다.
여러 날이 지나 유대인들은 이런 사울을 죽이기를 공모하고 성을 지키며 죽이려 할 때 사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려 도망가게 한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와서 사도들을 만나려 한다. 26절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해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도들은 사울의 변화를 믿지 못했고 두려워 했다. 이때 바나바가 사울을 만나 그의 변화의 과정을 듣고 그의 진심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후 그를 사도들에게 중재하여 사울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음을 확인시킨다.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와 사람을 세우심을 사도들조차 분별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바나바란 사람의 중재가 필요했음을 본다. 그리고 이 일로 드러난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마무리 한다. 31절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는 결국 모든 사건이 주님의 비전을 이루는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며 그 길목에 사울이란 한 사람이 이제 땅끝의 선교사로 준비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날 주님은 내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의 하루아침에 사울을 변화시켜 상황을 뒤집는 능력과 지혜를 묵상한다.
아울러 바울의 삼일간의 절망처럼 보이는 외침을 기도로 받으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본다.
또한 성령이 임할 때 가지는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즉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깨닫는다.
그리고 사도들도 어쩔 수 없이 두려움에 눈이 가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을 때 바나바란 사람의 중재가 꼭 필요함을 배운다.
첫째, 계절을 바꾸시는 날씨처럼 하루아침에 판을 뒤집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지혜를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을 향해 가려진 내 눈이 열리기를 소망한다.
둘째, 위대한 사도들에게도 분별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하며, 그때 바나바의 중재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긴다.
교회는 철저히 공동체로 존재할 때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음을 배운다. 만일 사도들이 바나바의 의견을 거절했다면 과연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사도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감추지 않았고 바나바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사울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싶다.
오늘 주님은 교회는 절대 혼자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나로 보게 한다. 아무리 위대한 사도도 모든 것을 다 분별할 수 없다. 그는 주님이 아니다. 공동체로 주신 손과 발과 눈과 귀가 필요하다. 나의 후반전 주님이 나를 어떤 모습으로 사용하시든 겸손히 혼자가 되지 않고 모두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목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한다. 아울러 하나님을 향해 닫혀진 눈과 귀와 마음을 다시 열고 그분의 위대하심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종이 되기를 다짐한다. 주님 이 종을 받아 주소서.
한줄 묵상 :
<하나님은 평범한 제자 아나니아와 바나바를 통해 교회를 잔멸하려는 사울을 세우시는 통로가 되게 하셨다.>
적용 질문 :
1. 사울이 흑암 속에서 절망의 기도를 드릴 때, 주님은 그것을 진정한 첫 기도로 인정하셨습니다. 나는 오늘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2. 위대한 성령의 사람인 사도들도 영적인 눈이 가려져 하나님의 세우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내가 안다는 것이, 혹 장애물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3. 사도들이 두려움에 갇혀 있을 때, 바나바는 사울을 품고 중재하여 교회의 하나 됨을 지켜냈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내가 선입견을 내려놓고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어야 할 '사울'은 누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