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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2:11~18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 2:19~22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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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이방인이요 할례받지 않은 무리요 그리스도 밖과 이스라엘 밖에 있어 언약에 대해 외인이고 소망도 하나님도 없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져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화평이요 모퉁잇돌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새사람이 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져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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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2:11~18
예수님을 믿으면 신분의 변화가 생깁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무할례당이었으며, 영적으로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와 무관한 외인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11~12절).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13절).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시키던 율법 조문은 화목제물인 ‘그리스도의 피’로 폐기되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는 ‘한 새사람’(교회)이 탄생했습니다(14~15절). 먼 데 있는 이방인과 가까운 데 있는 유대인에게 평안을 전해 준 십자가로 인해, 모두가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17~18절). 그리스도는 하나 됨과 평안의 근원이십니다.
● 더 깊은 묵상
‘그리스도의 피’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요?
예수님 사랑 안에서 내가 하나 됨을 회복할 지체는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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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거하실 처소 2:19~22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새로운 신분이 주어집니다. 이방인이라도 그리스도를 믿으면 외인과 손님이 아니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가족’입니다(19절). 바울은 건축 이미지를 사용해 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연합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모퉁잇돌이신 그리스도 위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터를 놓아 세운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입니다(20절).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벽이 연결되어 건물이 완공되듯, 유대인과 이방인도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합해 ‘성전’이 되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건축되어 갑니다(22절). 인간적인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연합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은 건축 이미지와 교회 연합을 어떻게 연결 지었나요?
공동체의 하나 됨과 연합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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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해법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게 된 이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좋으나 인간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을 의외로 자주 볼 수 있다. 많은 경우 그들은 교회 활동에 열심이다. 각종 모임에 빠지지 않으며, 뜨겁게 기도하고,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한다. 그렇게 믿음이 좋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가족이나 이웃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하고 화평하지 못한 신앙인이 의외로 많다. 믿음 좋다는 시어머니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않는 며느리가 있는가 하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성실한 부모의 자녀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과연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우리를 나와 너, 우리라는 공동체로 창조하셨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관계 가운데 나타나길 원하신다. 이런 하나님 뜻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 좋은 사람이다. 지금 내 인간관계에 풀리지 않는 갈등이 있다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가장 먼저 점검해 봐야 한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모든 관계의 해법이 십자가에 있다.
일상 영성의 힘 / 진재혁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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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에베소서 2장 13~14절
모든 막힌 담을 허무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적대감이라는 넘을 수 없는 높은 담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던 그 담을,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그분의 피로 허무셨습니다.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고도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성숙한 성도가 있는 곳에는 다툼이 아닌 화평이 있습니다. 화평은 자기 결단으로 되지 않습니다. 자기 부인과 희생으로만 가능합니다.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평강과 기쁨이 넘치는 소망의 삶을 기대할 수는 없다. - 앤드루 머리
오늘의 기도
주님, 죄로 막힌 담을 십자가 죽음으로 허무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은혜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요. 산 소망을 가진 하나님 백성이 되었으니 날마다 아버지께 나아가는 은혜를 놓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이 충만히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 화평의 삶을 이어 가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04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아주 특별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개인적 적용
1.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며,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거룩하고 정결하며, 섬김을 실천하는 자가 되도록 노력하자
2.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풀어 주신 그 큰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도록 하자
3. 억지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저 주님의 자녀로서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부분만 열심히 감당해 나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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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이방인 성도들에게 하나됨을 설명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우선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었던 막힌 담이 그리스도로 허물어져 이방인과 유대인 성도들이 연합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있었던 단절이 십자가로 화목되어 이방인과 유대인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이 거할 처소로 지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이방인 성도의 과거와 현재, 그리스도의 공로, 이방인 성도들의 새로운 신분, 하나님의 거쳐로 함께 지어져 가는 성도들 등입니다.
‘너희는……(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라’ - 이방인 성도의 과거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너희는’은 당연히 에베소교회 이방인 성도들로서, 유대인 성도들에게 멸시받은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에게 소속된 증표인 할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증표가 없는 이방인들을 무할례당이라고 부르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증표가 있어 할례당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순히 육체에 흔적을 남기는 차원을 넘어 영적인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 있는 것과 같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해야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이야기한 참 할례로, 외적 표식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입니다. 또한, 그들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서는 외인입니다. 여기서 언약들이라는 것은 아브라함, 야곱, 출애굽시의 이스라엘, 그리도 다윗 등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독특하고,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은 그 관계에서 제외되므로 언약들에 대한 외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따로따로 하나님과 이루는 화목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다시 태어난 새 사람으로서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 간다는 것입니다.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한다’는 말은 골고다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멀리 있던 이방인들과 가까이 있던 유대인들에게 화평의 복음이 선포된다는 말입니다. 모퉁잇 돌은 신약성경에서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 곧 건물의 기초석과 모퉁이의 주춧돌입니다. 본문의 모퉁잇 돌은 모두 다 포용하는 개념입니다. 즉,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또한 기초석인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10월18일 인천대공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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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둘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셨습니다’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공동체의 영적 질서를 위해 화목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이 둘을 하나로 만드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보혈을 흘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는데, 이제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화목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더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화목의 본이 되십니다. 그분의 제자로서 우리도 화목할 의무가 있습니다. 화목과 화합은 세상이 원하는 바도 되기에 그렇다면 우리가 화목의 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가 있다고 봅니다. 우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자기희생입니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화해하려는 마음이죠. 그것이 없이는 화목이 좀처럼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씩 손해 봐야 거래가 성사될 수 있습니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양보해야 원만하게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이치도 그런데 하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희생은 당연할 것입니다.
다음은, 다가가는 마음입니다. 즉, 먼저 화해하고자 손을 내미는 행동입니다. 실은 그것은 손해 보기보다 더 어렵다고 할 수 있으니, 얼듯 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용기를 내어 먼저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영영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상대방에게 그런 기대를 건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 - 그것이 예배보다 낫다는 말씀입니다. 설령 차가운 시선과 무안을 받더라도 먼저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하고 나선 후회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시행한 만큼 영적 진도가 나가기 때문이지요.
‘땅에서는 평화요, 하늘에서는 영광’ - 화목의 강점과 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평안이 저세상에서는 상급이 주어진다는 것으로, 우리 주님이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해지니, 그것보다 더 큰 영광도 없을 것입니다. 이는 자기희생, 그리고 다가가는 마음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결실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라고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면 화목의 첫걸음은 손과 발이라고 봅니다. 그 손과 발은 단연코 거룩한 손과 발이 될 것입니다.
10월18일 인천대공원역에서 세상과 주님을 연결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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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왜냐하면 아무도 할 생각도 없고 하지도 못한 것을 했고, 하고 있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주린 자를 집에 들여 먹이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나 집에 들여 살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간혹 가난한 자에게 돈을 좀 주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을 상속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간혹 아이를 입양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나 흉악한 범죄자를 입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십자가는 능력이 있어서 원수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에 살게 했고, 나라를 상속받게 했고, 흉악한 죄인을 하나님 자녀로 입양되게 했습니다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2:12~13)
또한 십자가는 능력이 있어서 원수된 먼 데 있는 이방인과 가까운 데 있는 유대인도 화목하게 하여 이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합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6~18)
지금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이 불구대천 원수가 되어 전쟁합니다 누가 이들이 화목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십자가는 능력이 있어서 팔레스타인 사람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여 유다의 한 성읍처럼 되게 할 것입니다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그의 입에서 그의 피를, 그의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거하리니 그들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지도자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슥9:6~7)
또한 십자가는 능력이 있어서 지금도 우리를 거룩한 성전으로 짓고 있고 곧 완공 되게 할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1~22)
‘제외된 사람(12절)’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야곱에 이르러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집트에서 구원을 받았고 12지파의 족속으로 오랫동안 여호와의 택하심과 인도하심을 받았던 이스라엘은 스스로 어리석은 선민사상에 빠져 그들이 받은 율법이 죄와 심판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 착각하고 그 법도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멸시하며 허물 수 없는 높은 담으로 나뉘기를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선택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는 예외 없이 그 준엄한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고 불의와 불경건의 자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평케 하신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그분의 백성으로 초청받은 후에도 그 초대에 응하지 못한 이들과 끊임없이 나뉘고 제외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한 몸, 한 새사람이 되기를 쉬지 않는 것이 바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의 합당한 반응이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비밀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온전히 이뤄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거룩한 성전(21절)‘
느헤미야는 훼파된 이스라엘 성벽을 재건하면서 한자리에 모여 일정한 방향을 정하여 완성시키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각자의 맡은 자리에서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에는 벽돌을 쌓으며 지어진 건물이 서로 이어질 수 있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의 공동체는 그 믿음의 여정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 아래 변화되고 세워진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그 믿음을 굳게 지키고 모든 악하고 방해하는 세력과 담대하게 싸워 승리의 깃발을 세운 각 지체들이 서로 연결되어 더욱 든든하게 세워지는 성장과 성숙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모든 악한 것들과 불순종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퉁이 돌이 되고 강한 산성이 되어 모든 남은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든든히 지키시고 흔들리지 않는 방패가 됨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거하실 거룩한 처소로 더욱 자라 가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손길을 붙들고 오늘도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는 주님의 백성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어떤 삶입니까?
➲ 십자가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합니다(11~13절).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과거와 현재의 상태에 대하여서 ‘그때와’와 ‘이제는’을 써서 그들에게 일어난 변화를 이야기 합니다. ‘...그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할례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었으며,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이 살았던 자...’(11~12절)들 이었다고 말합니다.
할례 받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민족적 우월의식을 가졌고, 그래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이방인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제외된 사람들이라고 하는 노골적으로 차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13절)고 설명합니다.
이방인과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이 바로 내 자신입니다. 이방인과 같은 존재였던 내 자신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철저하게 버려진 존재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의 약속과는 무관하게 비참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던 내 자신이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받은 삶이 내 자신에게 얼마나 값지고, 얼마나 귀한 은혜인가를 다시금 마음에 새겨봅니다.
나아가 유대인들처럼 비본질적이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차별하는 편협한 세계관에 갇혀있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적 기준을 벗어나지 않는 한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 십자가 앞에서 모든 차별은 무너집니다(14~18절).
바울은 예수님을 ‘우리의 화평’이라고 정의합니다(14절). 막힌 담을 허시므로 이방인과 유대인을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한 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셔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루셨습니다(15절). 예수님께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율법에서 사셨습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롬 10:4)이 되셨습니다. 그 결과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18절)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앞에서 동일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는 결코 영원한 반목과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치 노비문서와도 같았던 율법을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폐하셨고, 완성하셨습니다. 율법을 폐하시고, 이방인과 유대인,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화평케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즉, 막힌 담을 허무시기 위하여 당신을 십자가에 바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는 모든 분열과 분쟁과 갈등의 요소들을 제거하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해 나아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차별을 무너뜨리고, 평화의 사도로서 하나님과 화평하고 이웃과 화평하고 분열과 분쟁이 있는 곳에 화평을 심는 자로 사는 인생이어야 하겠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 십자가 앞에서 모든 편견은 사라집니다(19~22절).
‘그러므로’ 이제는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19절,새번역)이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들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습니다(20절). ‘모퉁잇돌’은 벽과 벽을 연결하기 때문에 건물의 중심이 됩니다. 즉, 그리스도는 성도와 성도를 연결하여 교회를 세워나가게 하는 중심이요 기초이며, 교회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역시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갈 것(21~22절)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교회의 일원으로 내 자신을 부르셨습니다. 내 자신이 사역하고 있는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실 만한 교회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다스리시며, 성도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하나님의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이는 결코 나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세상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서로 동역하고, 연합할 때에 온전한 교회 공동체로 세워갈 수 있습니다.
그동안 내 안에 있었던 편견에 빠져 판단하고 배척했던 사람들 마저도 이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함께 아름답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외면하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편견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 위에 굳게 세워져 그 어떤 풍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교회로 만들어 가길 힘쓰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차별하는 편협한 세계관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성장을 막고, 복음을 들고 나아가야 할 소명을 막고 있는 담을 십자가의 능력을 허물어뜨릴 수 있기를(엡 2:11~22절)...
은혜의 내용을 설명한 사도는, 이제 구원이 가져온 평화가 어떻게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래 에베소 교회의 신자들 대다수는 이방인들로서,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고 불렸습니다(11). 그때 그들은 ‘그리스도 밖에’(이것은 얼마나 무서운 표현인가!) 있었고, 이스라엘과는 상관이 없었으며, 약속 언약의 대상이 아니며,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었던 자들입니다(12). ‘그러나 이제는’(13)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멀리 있던 자들이 서로 가까워졌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멀어진 그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회복시키셨고, 그리스도는 당신의 육체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로막고 있던 담을 허무셨습니다(14). 그 담은 모세 율법의 의식법이었는데, 주님은 이것을 완성하심으로써 폐하셨습니다(15).
이로써 하나님과 화목해진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나누는 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함께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갈 자격을 얻었습니다(18). 이제 교회 안에는 과거의 배경 때문에 외인이나 나그네가 될 자가 없으며, 모두가 완전한 권리를 가진 성도로서의 동일한 시민이고, 하나님의 권속(가족)이 되었습니다(19).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교회는, 모퉁이 돌인 그리스도를 통해서 서로 연결되는 한 건물에 비유됩니다(20~22).
교회의 하나됨을 경험하는 길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신 그 큰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축복을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누리고 깨닫는 길 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유지하는 방법은, 시스템이나, 조직이나, 리더십이나, 재정이나, 건물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이며, 그 복음의 은혜를 참되고 진실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성도가 누리는 축복과 그 부르심의 소망을 위하여 기도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성경적 교회로 회복되는 길도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알고 그 영광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복음의 영광과 복음의 은혜와 복음의 기쁨을 진실로 알고 경험하는 교회와 성도가 얼마나 될까요?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갈수록 교회가 기업을 닮아가고, 세상의 여타 조직들과 다르지 않은 수상한 냄새를 풍기는 이 때, 오직 복음의 영광과 기쁨으로 세워지는 교회를 소망하오니, 이 땅의 교회들에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바른 길을 가게 하옵소서. 성도마다 복음의 은혜를 깊이 만끽하게 하시며, 그 은혜를 경험한 성도들을 통하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세워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의 앞부분에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힘입어서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사람의 발달 단계와 같이 성도들도 발달 단계를 거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밖에 있었을 때
성도들의 처음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밖에 있었을 때"의 상황입니다.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에베소서 2:12,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말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구원과는 상관이 없고 예수님과도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이방인의 신분이므로, 하나님 나라와도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 심판과 멸망 밖에 남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과거를 생각해 볼 때, 우리 역시 그리스도 예수밖에 있었을 때는 세상의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때는 구원과 상관이 없었고 소망과도 상관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구원과 소망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밖에서 살아가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전하고 가르친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에베소서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전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과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가질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머무를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변화를 말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속 머무를 때 일어나는 놀라운 일에 대해 21절과 22절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21-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고 본능적으로 자기밖에 모르는 존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속 머무를 때는 완전히 변화하게 됩니다. 나만 바라보던 시각이 남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변화하게 되고, 나의 유익만을 구하던 자세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의 자세로 변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서로 '연결'됩니다. 바울이 말한 '연결'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συναρμολογέω'(쉬나르몰로게오)인데, "튼튼하게 결속력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모퉁이 돌이 되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도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튼튼하게 결속력을 가진 교회를 이루게 되면, 그 교회는 어떤 비바람이 몰려와도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흔들리지 않는 우리 교회, 우리 가정을 세워 나갑니다.
우리는 성장하는 중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즉시 완전해지지 않습니다. 단번에 거룩함을 이루고 성화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단한 경건한 생활을 지켜 나감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기도하기에 힘쓰고 주의 말씀을 사모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와 같은 수고와 노력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속 머무를 때, 우리의 삶은 거룩해지며 다른 이들을 돌아보고 그들과 연결되어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이기주의로 가득 찬 교회가 아닌, 예수님 안에서 서로를 돌아보는 연결된 교회가 되길 바랬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권면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연결된 교회, 예수님을 중심으로 연결된 가정을 세우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성장하고 예수님처럼 내가 먼저 섬기고 발을 씻어 주는 겸손함과 희생적 사랑으로 함께 연결되어, 사랑이 넘치는 교회, 교회다운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 우리가 됩시다.
함께 하는 기도
우리를 선택해 주시고 복음의 말씀을 듣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구원받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되었기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고 날마다 말씀을 사모하면서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기로 결단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아름다운 가정, 복된 교회로 연결되어 나가길 원하오니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바울은 앞에서 계속 교회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지위는 이제 교회로 옮겨져 왔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스라엘이 교회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스라엘 중에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의 자리를 이방인들로 채우셨을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눈에는 이전에는 유대인들만으로 이뤄졌던 이스라엘에 여러 인종과 언어와 문화가 섞여 들어오다 보니 과거의 이스라엘처럼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예수님 이후로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 교회)은 혈통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생육하고 번성해” 갑니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그 이스라엘의 빈자리에 들어온 이방인들인 에베소를 비롯한 아시아의 성도들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실 원리는 똑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과거에 자신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했듯이,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도 원래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바울은 앞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발생한 영적 차원의 과거와 현재의 변화에 대해서 설명했다면 이제는 인간적, 민족적 차원으로 본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볼 때 과거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2:1) 에베소의 교인들은 인간적인 차원으로 볼 때에는 이방인이요,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으면서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어서 세상에서 소망도, 하나님도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하나님과 멀었던, 하나님 바깥에 있었던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워졌다는 말입니다. 이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그 차이가 없어졌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이 이스라엘(유대인)이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우월성을 갖추고 있다는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기에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라면 이스라엘이 이방민족과는 다른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 세상을 통치할 백성을 만드시기로 하신 때로부터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유대인)은 분명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혈통에 의해 규정되는 이스라엘은 의미가 없습니다.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둘이 하나”라는 말이 이 다섯 절 안에 네 번 반복되고 있고, 화평, 화목, 평안이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사역 전반에 걸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의해서 더 이상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이 의미가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고, 십자가에 의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던 벽이 허물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혈통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새로운 이스라엘이 구성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민족적인 구분은 의미가 없으며, 모두가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즉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공동체는 이제 화평과 화목과 평안의 공동체가 됩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교회’라는 혈통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민족이 탄생한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 갈등을 뛰어넘고 하나가 되는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논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별로 크게 와닿지 않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이나 할례와 율법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교회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원칙을 포함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들은 모두 하나입니다. 피부색이나 언어나 문화가 전혀 다르다 하더라도 예수를 믿는 자들은 모두 하나입니다. 또한 예수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죄로 규정되는 행위가 아니라면 그 문화, 삶의 방식을 바꿀 것을 요구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용납하도록 요구받습니다.
이는 현대교회를 섬기는 우리에게 강력한 도전일 수 있습니다. “과연 교회는 하나인가?”라는 질문 앞에 당당히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세기 당시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화적 간격과 비교해 볼 때 훨씬 작은, 거의 차이라고 볼 수도 없는 문제 때문에 교회가 갈라지고 경쟁하고 서로 손가락질 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현실은 분명 오늘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이 편지에서 선포하는 내용과는 완전히 달라 보입니다.
이제는 무엇보다 서로 다름을 용납하는 훈련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의 교회 안에도 서로 파당을 짓고 나뉘는 현상이 너무나 자주 나타납니다.
이런 문제를 안고 다른 교회, 다른 교단, 다른 나라의 교회와 하나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먼저 각자 섬기는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확인해갈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개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이 나라의 모든 교회, 세계 교회로까지 퍼져나가는 능력을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였던 나를
긍휼과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함께 하늘에 앉게 하셨다.
나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였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서 그때는...이제는...그러므로 이제부터라는 단어가
눈에 띄게 들어온다. 시제로 보면 과거 현재 미래에 해당하는 것 같다.
과거에 우상숭배하고 있던 에베소 교인들에게 바울이 편지한 것이지만
그대로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첫째 그때에는
1. 육체로 이방인이다.(11)
2.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12)
3. 약속의 언약에 대하여 제외되어 있었다.(12)
4. 이 세상에서 희망도 없었고(12)
5. 하나님도 없는 자이다.(12)
과거의 바로 나의 삶이었다.
둘째 이제는
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13)
2.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우리의 화평이시다.(14)
3. 율법을 폐하고 둘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케 하시고(15)
4.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되게 하시고(16)
5.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다.(18)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고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하나님이 없었고, 소망이 없었고,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나를
전에 멀리 있었던 나를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워 졌다.
아직도 정통 유대인은 이방인을 개취급하고 사진도 같이 안찍고
예배도 함께 안드리는 것을 보았지만
예수님의 보혈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님과 이방인을 하나 되게 하셨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한 성령 안에서 막힌 담을 허시고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셨다.
화평이신 예수님이(14)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15)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였으니(17)
예수님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을 허물으셨다.
화평하게 하시고 평안을 전하셨다.
나에게도 이방인 처럼 생각하는 그룹이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다. 배운 자와 못배운 자,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실 내 안에도 무서운 계급투쟁적인 사상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예수님은 원수 같이 생각하고 개처럼 생각하던
선택 받았다고 착각하던 유대인과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방인에게도
이방인이 성전 뜰 안으로 넘어 올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문이 있을 정도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은 넘을 수 없는 견고한 것이지만
이 모든 장벽을 허물셨는데 나는 아직도 장벽을 쌓고 있으니....주여!!!
주여 나도 장벽을 무너 뜨리게 하옵소서.
평안을 전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이제 부터는
1. 외인도 아니요(19)
2. 손님도 아니요(19)
3. 동일한 시민이요(19)
4. 하나님의 권속이다.(19)
5.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21)
6.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지어져 간다.(22)
이제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요.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한 가족, 한 교회가 되어가는 것이다.
주님 내가 거룩한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