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심.
눅4:16-30절, 190.235.241장. 3927 Bible 말씀연구소 박봉웅 목사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며 말씀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은총의 종교이며 구원의 종교입니다. 설교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말이 있듯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의 말과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롬10:17절). 또한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롬1:16절) 이 복음이 설교로 선포되어질 때 비로소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가 없는 기독교는 죽은 기독교이며, 의식적인 종교가 될 때 세속화되고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교회가 부흥될 때는 곧 하나님의 생명의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활기찰 때이고, 교회가 쇠퇴 할 때는 곧 하나님의 생명의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들이 사라졌을 때 입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번째로 하신 일이 설교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당당히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하여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이 본문의 저자인 누가의 관심사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보다 고향인 나사렛에서 선교활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설교는 예수님의 모든, 이적 기사보다 먼저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복음의 설교는 병 고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는 것보다 더욱 소중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예수! 메시아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던 나사렛 고향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좀 독특했을 것입니다.
고향 사람에 대해서는 바른 평가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그를 잘 안다느니 또는 그와 내가 동창이라느니, 또는 그의 형과 내가 막역한 사이라느니 그의 어머니와는 절친한 사이라든지 하고 잘 아는 척 하는 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가장 잘 아는 듯 하는 사람이 가장 잘 모를 수가 있습니다.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자기 자녀를 부모가 가장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님 자신의 사역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설교했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오해하는 고향 사람들에게 소상히 알릴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는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인데다 더구나 조그만 나사렛 고향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 곧 우리의 구주인 것을 설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참으로 어렵고 부담되는 만만치 않은 설교(說敎)였을 것입니다.
사실 조그마한 동네는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다는 것도 다 아는 처지이고 가정의 배경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기에 얼마나 힘든 설교이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고향에서의 첫 번 설교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 가장 확실한 성경 진리의 핵심을 설교했습니다.
아마 이 설교는 기독교 진리의 본질을 밝히는 가장 웅장한 메시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날 회당에서 공식예배에 참석해서 말씀을 증거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이사야 61:1-2절을 택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본문을 택한 그 자체가 벌써 그가 말씀하고자 하는 복음의 내용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사람들은 주로 성경보다도 탈무드나 미드라쉬 같은 유대의 전통적인 교훈 집에서 많이 설교한데 반해서 예수님은 성경 그 자체를 본문으로 택하되 특히 예언서를 읽었습니다.
특히 이사야서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600여 년 전에 기록된 말씀인데 그 예언의 내용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이 성경을 보는 시각은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시각에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5:39절에 말하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선포는 바로 성경을 보는 시각을 우리에게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께서 택하신 본문이 던지는 메시지는 결국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가난하다는 말은 물론 말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당시의 유대인들의 삶은 가난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설교하실 때 어린 아이가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조그마한 물고기 두 마리가 점심 메뉴였고 다른 사람은 그나마도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었다면 그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것은 불행한 것이지만 복음을 받는 데는, 아주 좋은 텃밭이 될 수 있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런 부자들은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에 구원의 주이신 예수를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고 부자는 절대 안 된다면 그것은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의 설교의 첫 마디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절)라고 말씀했습니다.
영적으로 자기가 늘 부족한 줄 알고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줄 아는 자에게 예수의 복음이 필요하고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넘친다는 사실입니다. 이 메시지의 핵심은 벌써 복음의 내용은 사람이 자기 행위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마음이 상한 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다윗은 그의 회개의 시인 시편 51:17절에서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은 일그러지고 갈기갈기 다 찢어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밖에서부터 오는 도전과 충격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완전히 걸레조각처럼 되었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가정적으로,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 중에서 서로가 마음이 상해서 백약이 무효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한 마음을 고칠 약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참 위로와 사랑과 용서 그리고 구원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마음의 질병을 고쳐주실 줄 믿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유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죄악의 포로가 되고 욕심의 포로 욕망의 포로가 되어 진정한 양심의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나의 의지대로 사는 것보다 마귀의 쇠사슬에 포로 된 삶을 살고 마귀가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과 우리의 질병과 우리의 처지를 아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權勢)를 주시고 자유(自由)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길거리에 마음껏 활보한다고 모두 자유롭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자유는 죄의 용서와 기쁨으로 말미암아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을 돌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절)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진리를 알고 진리를 알아야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사실 참 자유가 없는 것은 죽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유!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갈구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참된 자유는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악에서 놓임 받아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넷째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소경된 자를 다시 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우리의 영적인 소경을 다시 보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죄 가운데서 출생했기 때문에 복음을 받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모두가 영적으로 소경이었습니다. 진리를 깨닫지도 못하고 영원한 세계를 볼 수는 없고, 자기 자신의 죄악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령한 눈이 열려져서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육신의 눈이 밝아지는 것만이 이적이 아니라 어두웠던 우리의 심령이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된 것 그 자체가 이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35:5절에도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어두워진 것은 빛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영적인 눈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밝은 세상을 만들어야 될 줄 믿습니다.
다섯째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억울하고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함입니다. 세상에는 정말 억울하고 눌린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승리하여 억울하고 눌린 자에게 반드시 자유(自由)를 주실 줄 믿습니다.
이사야는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며…라고 했습니다. 희년 때 50년 되는 해는 옛날의 상태로 완전히 역전시켜서 토지를 되돌려 받아 새로운 풍성한 삶을 살듯이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사는 삶은 희년의 나팔 소리를 들으며 참된 자유를 누리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안다는 이유로 목수의 아들이라는 선입관으로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잘못된 선입관, 잘못된 전제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데 장애 요인이 되었습니다.
똑같이 설교를 듣는데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고 어떤 사람은 왜 그렇지 못합니까? 그것은 말씀을 받는 쪽의 사람들의 마음 밭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가시밭, 돌 짝밭, 길가에 씨앗이 뿌려지지 않고 옥토에 씨가 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오늘 아침에 생명의 메시지를 들고 오셨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복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선입관, 우리들의 잘못된 세계관! 돌같이 완고한 우리들의 마음을 깨뜨려 버려야 합니다. 호도알은 먼저 단단한 껍질을 부셔버려야 고소한 호도를 먹을 수 있습니다. 수십 년 교회 출입을 하고 있으나 아직도 자신이 깨어지지 않았기에 복음의 진수를 알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아멘으로 영접하여야 하는데도 쑥스러워서 아멘소리도 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우리 주위에는 생각보다 많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에 큰 소리로 아멘 하고 화답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료출처 3927bible 말씀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