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 돌보는 데 반세기 헌신한 작은 자매 관상선교회 강칼라 수녀
다 닳은 몽당연필처럼 가난한 이웃 위해 몽땅 내어준 삶
50년 동안 전북 고창 호암마을서 한센인·결핵 환자 돌보는 데 헌신
초등학교 분교 세워 교육에도 힘써 ‘한센인들의 낙원’ 가꾸며 동고동락
‘한국의 마더 데레사’ 강칼라 수녀가 평소 사용하는 몽당연필을 들어보이며 웃고 있다. 칼라 수녀는 “몽당연필에도 하느님의 섭리가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 한국의 마더 데레사 ‘마더 칼라’ 수녀
한국에도 마더 데레사가 있다. 작은 자매 관상선교회 ‘마더 칼라’ 수녀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여기고 과거
한센인 정착촌이었던 전북 고창군 신월리 호암마을에서 반세기를 헌신했다.
전북 고창군 고창읍에서 북서쪽으로 4㎞ 떨어진 호암마을 입구에는 검은색 표지석에 ‘호암’(虎岩)이라는 마을 이름과 호랑이 그림이
보인다. 호암마을에는 고창읍내 주민들에게 ‘천사 할매 수녀’로 알려진 강칼라 수녀(74)가 생활하는 작은 자매 관상선교회(책임자
김윤숙 수녀) 고창 분원이 자리하고 있다. ‘칼라’는 칼라 수녀의 수도명인 ‘카를라’를 호암마을 신자들이 발음하기가 힘들어 칼라라
부르면서 이름으로 굳어졌다.
호암마을은 과거 1990년 무렵까지는 ‘동혜원’이라 불리던 곳으로 광복 후인 1948년 경 전국 여러 곳에 형성된 한센인 정착촌 가운데
하나였다. 한센인 정착촌이라는 이미지가 한센인 후손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와 사회적 불이익을 준다하여, 마을 뒷산에 호랑이 모양
바위가 있다는 뜻의 호암마을로 바꿔 부르게 됐다.
■ 시골 살림집 같은 수녀원
고창읍내를 벗어나 호젓한 시골길을 달려 ‘전봉준 장군 생가’를 거쳐 호암마을에 도착해도 수녀원으로 짐작되는 건물은 눈에 띄지 않
아 위치를 잘못 찾았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든다. 60년 넘게 같은 자리를 지키는 호암마을 동혜원공소만이 근처 어딘가에 수녀원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연상을 일으킨다. 주변을 한참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나무로 된 대청마루가 보이고 마당 한켠에 커다란 싸리비
가 놓여 있는 평범한 시골 살림집이 수녀원임을 알게 된다. 이곳 고창 수녀원 책임자가 칼라 수녀다. 수녀원 문을 열고 들어가면 ‘기도
와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라고 쓴 예쁜 손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교회에서는 수도회 명칭이 생소한 작은 자매 관상선교회 소속 칼라 수녀는 지난해 12월 2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국민훈장 모란장
을 받았다. 외국인 수녀로는 처음이었다. 칼라 수녀는 국민훈장 수상을 한사코 사양했다. 동혜원공소 회장이면서 호암마을 회장이기
도 한 방부혁(요셉·62)씨를 비롯한 호암마을 천주교 신자들, 고창읍 주민들이 칼라 수녀를 국민훈장 후보자로 추천한 줄도 모르고 있
었다. 하느님의 섭리와 수도회 정신에 따라 당연한 봉사를 기쁘게 했을 뿐이라는 것이 수상 거부 이유였다. 방 회장이 “칼라 수녀님의
활동을 알려 실의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고 어렵사리 설득하고 나서야 칼라 수녀는 국민훈장을 받았다. 칼라 수녀와 작
은 자매 관상선교회 고창 분원에서 생활하는 한국인 우을리 수녀는 “우리 선교회는 수도자들의 사도직 활동을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작은 자로서 수행한다는 원칙을 중요시 한다”고 설명했다.
1951년 이탈리아에서 안드레아 가스파리노 신부가 설립한 작은 자매 관상선교회는 1963년 한국에 진출했지만 50년 넘게 교계 언론
에 국내 활동상이 한 번도 소개되지 않은 것도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수도회 정신에 따른 것이다.
작은 자매 관상선교회 전북 고창 분원. 수녀원이라기보다 소박한 시골 살림집 같다. 50년 전에 지은 것을 조금씩 고쳐가며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 한센인을 위해 운명처럼 이역만리 한국으로
1943년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쿠네오에서 태어난 칼라 수녀는 1962년 12월 19세 때 작은 자매 관상선교회에 입회해 1968년 10월 이
탈리아에서 부산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부산에 내려 작은 자매 관상선교회 본원이 있는 경남 진주에 잠시 머문 뒤 버스를 몇 번 갈
아타는 힘겨운 여정 끝에 고창에 도착했다. 칼라 수녀가 작은 자매 관상선교회 고창 분원에서 맡은 사도직은 한센인들과 폐결핵 환자
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작은 자매 관상선교회가 고창에서 한센인들을 돌보기 시작한 것은 칼라 수녀가 고창에 정착하기 1년 전인
1967년 역시 이탈리아인인 서이멜다 수녀를 통해서다.
올해로 한국에 온 지 50년이 된 칼라 수녀는 1980년대에는 서울 봉천동 빈민촌에서 가난한 이들과 동고동락하며 봉사하기도 하고 진
주 본원에서 지낸 적도 있지만 50년 중 40년 이상을 고창에서 보냈다. 고창을 떠나 있을 때도 수시로 고창에 오갔기 때문에 고창을 떠
난 적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재 호암마을에는 한센인 정착촌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작은 자매 관상선교회가 호암마을에서 한센인 치료를 마지막으로 맡은 것
은 2000년대 초까지다. 지금은 한센인 후손들과 호암마을에 이주한 주민 등 60여 명이 마을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이들 중 대부
분은 70대 전후 노인들이거나 기초생활수급자들이다.
칼라 수녀가 가장 가난한 이들이면서 기피와 편견의 대상이었던 한센인들을 위해 이역만리 한국에까지 와서 헌신적인 삶을 살 수 있
었던 배경에는 가족이 있었다. “사제였던 두 살 터울의 오빠, 같은 선교회 소속으로 방글라데시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언니, 독실한 신
자로 아버지에 대한 섬김과 배려가 몸에 배어 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작은 자매 관상선교회에 들어가 처음에는 전쟁고아들을 돌봤습
니다. 6·25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던 한국에도 전쟁고아와 한센인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운명처럼 고창에 오게 됐습니다.”
그 옛날 한국 사회는 한센인들을 치료하기보다 사회로부터 격리하려고만 했지만 칼라 수녀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한센인 치료약
하나 제대로 보급되지 않던 1960~70년대 이탈리아에서 치료약을 들여오려고 동분서주하고 한센인 환자 고름을 짜고 상처를 닦아줬
다. 인권침해와 학대, 심지어 신체 해부와 강제 단종시술이 자행되고 자녀들은 학교에 갈 수 없었던 다른 한센인 정착촌과는 달리 호
암마을에서는 한센인 환자들이 차별 없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호암마을은 한센인들의 낙원이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다가가 한 없이 제 몸을 낮추고 싶어 1968년 당시 동혜원이라 불리던 호암마을에 와 한국과 첫 인연을 맺었
습니다. 와서 보니 마을 아이들이 부모가 한센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 못 가고 있었습니다. 한센인 자녀들이 입학할 수 있는 초등학교
분교를 세우고 살레시오회 야학에 입학도 시켰습니다. 그렇게 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이 120여 명이나 됩니다.”
강칼라 수녀가 호암마을 명상의 집에서 스테인드글라스 십자가를 바라보고 앉아 ‘무한을 향한 기도’를 바치고 있다.
■ 몽당연필에 깃든 섭리
칼라 수녀는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가난한 이들 곁에 있었고 지금도 가난하게 산다. 맑은 가난, 청빈(淸貧)의 삶이다. ‘가난하게 살지
않으면 가난한 이들의 뺨을 치는 것’이라는 설립자 신부의 정신을 따라 사는 것이다. 가난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매년 연말이 되면 통
장 잔고는 0원이 된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모든 것을 남김없이, 아낌없이 주기 때문이다.
칼라 수녀가 얼마나 근검하게 사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물건이 있다. ‘몽당연필’이다. 3cm도 안 돼 다른 사람 같으면 손가락으로 잡
기도 힘들지만 칼라 수녀는 능숙하게 잡아 또박또박 한글을 쓴다. “이 작은 몽당연필에도 하느님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칼라 수녀
가 말하는 섭리는 이웃을 위해 기쁨으로 택한 가난과 끊임없는 기도다.
“오전 6시에 일어나 수녀원에서 30분 남짓 기도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주민 전체가 가톨릭 신자인 호암마을 주민들은 60년
째 동혜원공소에 모여 매일 아침, 저녁 기도를 빠뜨리지 않습니다. 저희 수녀들도 50년 동안 주민들과 아침, 저녁기도를 함께 드리고
있고요.”
칼라 수녀는 2000년대 초까지는 한센인 환자들을 주로 돌보았다면 지금은 호암마을 어르신들 ‘뒷바라지’에 눈코 뜰 새가 없다. 손빨
래 하느라, 마을 어르신들 병수발 하느라, 주민들을 대신해 읍내 관공서, 은행, 시장 다니느라, 주일에는 공소 미사 준비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기도 하고 승합차 운전도 직접 한다. 마을 어르신들은 119구
급차를 불러야 하는 다급한 상황이 생기면 새벽에도 칼라 수녀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하지 119를 부르지 않는다. 칼라 수녀에 대
한 신뢰는 절대적이다.
동혜원공소의 종을 치고 있는 강칼라 수녀.
■ 모두를 위한 치유와 회복의 공간
올해 한국 나이로 75세인 칼라 수녀는 지난 50년 동안 한센인과 도시 빈민, 노약자들을 돌봤지만 정작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 못했다.
양쪽 무릎에는 인공관절 수술 자리가 남아 있고 발은 류마티즘으로 뒤틀렸다. 그럼에도 남을 위해 헌신하는 칼라 수녀의 얼굴에는 행
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오랜 세월 한센인들의 낙원이었던 호암마을은 이제는 피정센터와 명상의 집, 도자기공방이 들어서 신자, 비신자 모두에게 치유와 회
복의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인근에는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등재된 운곡습지도 있어 자연 안에서 기도하며 하느님을 찾
기에 더없이 좋은 명소다.
칼라 수녀는 “호암마을이 순교자가 나온 곳은 아니지만 작은 자매 관상선교회 수도자들이 한센인들과 함께했던 역사가 배어 있는 곳
이고 지금도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이룬 곳이어서 성지로 가꿔지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톨릭신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