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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기행 8 ‘황음무도(荒淫無道)’ 수양제((隋煬帝)
마지막 날 비를 맞으며 상해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나니 시간이 어중간 하군요. 일행들은 상해의 큰 책방 순방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역사학 전공자들의 중국 여행에는 일반 여행과는 다른 아이템이 하나 더 포함됩니다. 서점 순례입니다. 책방을 그냥 둘러보는 정도가 아니라 큰 도시의 책방에서 1-2 시간은 꼭 할애합니다. 낮에 1–2시간 쓴다는 건 방문지 하나를 놓치는 것과 같지요. 국사 전공자들이게 중국 자료들은 아주 중요합니다. 서점에 들어서자 각자 전공별로 흩어지는데 곧 책을 바리바리 들고 나와 준비한 륙색에 담습니다. 책을 화물로 보내면 무겁기 때문에 비행기에 가지고 들어가기 위해 큰 등지게 가방을 이용합니다. 나는 20여 년 전부터 책을 사지 않아 책방 구경하고 차 한 잔 마시면서 쉬는 편이죠.
한가롭게 이곳저곳 다니다가 중국 역대 황제들의 전기를 모아 둔 칸이 보였습니다. 20권 넘는 황제들의 전기가 있더군요. 대부분이 당고조 이연, 당태종 이세민, 한고조 유방, 송태조 조광윤 등 이름으로 제목이 나와 있는데 세 명만이 업적을 앞세우고 있군요. ‘천고일제 진시황’, ‘일대웅주 한무제’, 그리고 ‘황음무도 수양제’였습니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첫 번째 황제(千古一帝)이며, 한무제는 중국의 강역을 넓히고 오늘날 중국이 국가정책으로 추진하는 실크로드를 개척한 인물입니다. 그러면 수양제는? ‘황음무도’가 업적은 아니죠. 수나라 두 번째 황제입니다. 수양제는 아들이 당고조 이연에게 잡혀 허수아비 황제가 잠간 있었지만 사실상 수양제가 망국의 군주입니다. 그렇더라도 그 앞에 수식어로 ‘황음무도’라니 좀 지나친 것이 아닌가요? ‘황음’이란 여색을 지나치게 밝힌다는 의미일 것이며 ‘무도’는 인간의 도리를 잊은 패륜아라는 말일 겁니다. 그런데 위키 등을 간단히 찾아보면 그의 황음무도한 짓거리들이 많이 나와 있군요. 수양제를 다룬 드라마들이 지나치게 각색한 것이 아닌지 의심했지만 사실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양주는 수양제의 땅입니다. 수양제는 그가 진왕(晉王)이었을 때 아버지 문제의 명을 받아 남쪽의 진(陳)을 멸망시킨 뒤 이곳 풍경에 반해 별궁을 짓고 자주 놀러온 것이라 합니다. 진왕이었다는 것은 태자인 형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양제 양광(煬帝 楊廣, 569-618)은 수(隋)를 세운 아버지 문제 양견(文帝 楊堅, 541-604)의 둘째 아들인데 형인 태자 양용(楊勇, 564-604)을 몰아내고 태자가 됩니다. 원래 시호는 명제(明帝)이지만 수를 이은 당이 비하하여 양(煬)으로 지어 오늘날은 수양제로 알려졌습니다. ‘양(煬)’은 ‘불에 쬐다’, ‘말리다’, ‘쇠를 녹이다’라는 뜻인데 여색을 좋아하고 예를 무시했으며 정사를 위태롭게 하여 하늘의 뜻에 거역하고 백성을 착취했다는 악의적 시호, 악시(惡諡)랍니다. 양제 양광에게 망한 진(陳)의 마지막 황제 진숙보((陳叔寶, 553-604)의 시호도 양(煬)입니다. 양제와 비슷하게 놀아 같은 시호를 받았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겠지요. 수양제가 진숙보를 낙양으로 잡아 갔지만 패자의 악행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으니.... 그의 종말은 당연하다고 해야겠지요. 그의 묘는 양주 부근 뇌당(雷塘)이라는 곳에서 황릉으로 불리지 않은 채 양광지묘(楊廣之墓)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었으나 2013년 양주에서 진짜 무덤이 발굴되었다고 하군요.
다음 시를 보시죠. 수양제가 지은 강도궁락가(江都宮樂歌), 강도(양주)의 궁에서 행락을 즐기며 부른 노래라는 겁니다.
揚州舊處可淹留 양주구처가엄류,
臺榭高明復好游 대사고명복호유。
風亭芳樹迎早夏 풍정방수영조하,
長皋麥隴送餘秋 장고맥롱송여추。
淥潭桂楫浮青雀 록담계집부청작,
果下金鞍駕紫騮 과하금안가자류。
綠觴素蟻流霞飮 록상소의류하음,
長袖清歌樂歡州 장수청가락환주。
양주 옛 거처 오래 머물 만하고,
밝고 높은 누각은 놀기 좋다네,
풍정(風亭, 양주에 있는 누각) 꽃나무가 이른 여름을 맞더니,
언덕 밀밭이랑은 남은 가을을 보내주네
푸른 못에 계수나무 노 젓는 청작배 띠워놓고,
과일나무 아래 조랑말 몰아보네
잔거품 인 술잔으로 마시는 선주(仙酒),
펄럭이는 긴소매 맑은 노래 즐거운 양주여.
청작(青雀)은 원래 ‘백로’와 비슷한 ‘고지새’라는데 풍파를 잘 견디어 뱃머리에 이 새 머리 모양을 새겨 넣어 순탄한 항해를 기원했습니다. 이후로 ‘청작’은 ‘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 답니다. 여주군의 새(郡鳥?)가 청학(Blue heron)이라는데 아마도 이게 아닐까 합니다. 과하마는 과일나무 아래를 지날 만큼 작은 말인데 백제와 신라가 당에 진상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시 번역은 친구에게 부탁한 겁니다.
감상이 어떤가요? 저는 이 시를 읽고 ‘뭐 이런 게 임금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황제라는 인간이 아무리 노는데 미쳤어도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은 생길 것인데 그런 낌새는 묻어나지 않습니다. 양주는 놀기 좋은 곳이라는 말 일색입니다. 말인즉 맞는 것 같습니다. 당(唐) 시대 양주의 봄을 노래한 시(揚州春詞三首, 姚合)를 보면 ‘봄바람이 성곽을 흔들고/노래 소리는 귓전에 가득 울리네(春風蕩城郭, 滿耳是笙歌)’라고 하니 놀기 좋은 곳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행궁(수도가 아닌 곳에 지은 왕궁)들을 짓고 행락을 벌였던 겁니다. 수양제의 시에서 ‘향기 풍기는 나무들은 초여름을 맞이하고/ 언덕 밀밭이랑은 늦가을을 보내주네’라는 구절은 좋군요.
진시황도 폭군이라 하지만 그가 벌인 사업들은 반 이상은 국가경영과 관련된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병마용으로 유명한 진시황릉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당시 왕들은 보통 즉위 초에 자기 무덤을 조성하기 시작합니다. 진시황릉은 39년 간(기원전 246-208년) 걸린 사업입니다. <사기>에는 70여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국가 예산의 절반 이상이 들어갔다는데 매년 그렇다는 건 아닐 겁니다. 행락을 위한 진시황의 두 번째 사업은 생전에 완성을 보지 못한 아방궁(阿房宫)입니다. 그는 여기에 자신이 통일한 6국의 미녀를 모았다지만 항우가 함양을 점령하면서 태워버렸지요. 폭정의 대표적 사례인 만리장성은 북방 유목민들을 방어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국경선까지 신속한 군대배치를 위한 직도(直道)와 황제 전용도로로 건설된 치도(馳道)는 물자-군대 수송용으로 통일국가 건설을 위해 필요한 조치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양제에게는 이런 흔적들이 들어나지 않습니다. 400여년 계속된 위진 남북조 시대를 마감하여 통일을 이루었다면 그리고 아버지 문제(文帝, 581-604)의 뒤를 이어 받았다면 사회통합과 황폐해진 나라를 부흥시키려는 노력이 보였어야죠. 아버지 문제는 통일을 이룬 뒤 세금을 낮추고, 과거제를 도입하고, 토지개혁에 착수하고 궁궐의 소비를 줄이는 등 새로운 사회건설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대운하 건설에도 착수하지만 백성들이 고달프다하여 중단하지요. 아들 양제가 운하건설 사업을 재개합니다. 그러나 대운하를 따라 행궁을 40여개 지었다니 이건 경제적 필요성이 아니라 놀이용이었던 겁니다. 낙양에서 운하를 따라 양주로 가는 데 운하를 양쪽에서 끌기 위해 동원된 인원이 20만이라네요. 양제는 대형 용주(大龍舟)를 타고, 황후와 후궁을 거느리고 수행선이 1,000척을 넘어 행렬은 100리 이상 이어졌다고 합니다. 소동파가 적벽부에서 노래한 ‘축로천리(舳艫千里)’, 배는 꼬리를 물고 천리를 이었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위의 시 ‘양주춘사’에는 ‘놀이터가 된 땅 가련하니, 양제가 나라 망하게 했다(可憐遊賞地,煬帝國傾亡)는 구절 그대로입니다.
여기까지 쓰고 한동안 중단했습니다. ‘황음무도’한 여자관계 이야기는 너무 어치구니가 없고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황당했기 때문입니다. 또 이 나이에 이런 걸 쓰려니 흥이 별로 나지 않네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양제가 한 짓은 ‘나를 낳아준 어머니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누이들을 제외하고는 세상의 어느 여자라고 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놀았는지 짐작이 가나요? 이 말의 출처는 분명치 않습니다.
한 가지 연상되는 게 있습니다. 수와 당은 원래 관롱집단(關隴集團)에 속하며 당 고조 이연과 수문제 양견은 인척관계입니다. 관롱이란 위수(渭水), 관중(關中), 농서(隴西) 지역입니다. 오늘날 섬서성 서안과 감숙성 남부이겠지요. 내몽고와도 접해 있으니 원래 유목민들이 남하하여 중국화 되었다고 보면 맞을 겁니다. 그러나 유목민 전통이 남아 있어 아버지의 후처나 형수와 혼인도 합니다. 인적, 물적 자원이 빈곤한 지역이라 가임여성을 농경 유교사회와 같이 윤리적 이유로 방치하지 않습니다. 수양제의 호언은 이같은 관습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중국사 최고의 군주라는 당태종 이세민도 형과 동생을 죽인 후(626) 동생 이원길(李元吉)의 정실부인을 차지합니다. 바로 수양제이 딸인 소왕비(巢王妃) 양씨입니다.
수양제의 ‘여인열전’은 어머니 독고(獨孤)황후(543-602)부터 시작해야겠군요. 남북조 시대 당시 최강국인 북주(北周)의 명문집안으로 남편 양견이 선위를 받아 수를 창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양견과 혼인 때 다른 여인을 가까이 두지 않고 다른 여인에게서 아이를 보지 말 것을 약속 받을 정도였다니 대단한 여장부이지요. 황제가 되면 ‘6궁을 갖춘다’는데 이것은 6 x 12명, 즉 72명의 후궁을 거느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직 도고황후에게서만 5남 4녀를 두었지요. 문제는 ‘황후에게서만 아들들은 보았으니 자식들 간에 황위를 두고 싸우지 않을 것이다.’고 자랑했다는군요. 권력은 아비와 자식 간에도 나누질 않는다는데 하물며 형제 사이겠습니까? 또 자식 일이 어디 애비 마음대로 되던가요? 남녀관계에 멍청했으니 권력의 속성에 대해서는 더 멍청한 것 같습니다. 독고황후는 남편을 독점했을 뿐만 아니라 검소하고 금욕적 생활을 하여 아들들이나 조정 신하들이 첩실을 두는 걸 참지 못하고 파직시키기도 합니다. 장자 양용을 태자에서 폐한 것도 양용의 첩실문제로 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양제 양광은 어머니 비위를 잘 맞추고 형 양용을 모함하여 궁지에 빠트립니다. 여러 드라마에서는 양제가 궁에 비밀 아지트를 만들고 어머니 몰래 음탕한 생활을 한 것으로 묘사되는 데 이건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고황후가 죽은 뒤 본색을 드러내 그의 ‘황음무도’한 방탕은 시작됩니다.
‘여인열전’ 두 번째가 바로 아버지의 후궁을 범하는 사건이죠. 양광이
멸망시킨 진의 마지막 황제 진숙보의 누이 진씨(陳氏 577-605)은 수의 궁중으로 끌려와 독고황후가 죽은 뒤 문제의 애첩 선화부인(宣華夫人)이 됩니다. 워낙 이뻤다고 합니다. 양광은 아버지 문제가 병약해지면서 오래 동안 눈독을 들이던 이 여인을 겁탈하죠. 이 사건이 아버지 귀에 들어가고, 문제는 격노하고, 폐태자 양용을 복위시키려 하고, 양제가 먼저 손을 써서 아버지와 형을 죽인다.... 등등으로 이어집니다. 이게 어머니가 죽은 뒤 2년간에 일어납니다. 양광은 황제가 된 뒤 선화부인을 진귀비(陳貴妃)로 책봉하죠. 귀비는 황후 다음으로 높은 후궁의 지위입니다.
마지막 등장인물은 수양제의 정실인 양민황후 소씨(煬愍皇后 蕭氏)입니다. 이 여인 역시 중국 여인 열전에서 희대의 인물로 꼽힙니다. 남북조 시대 남조 양(梁)의 공주로 582년에 양광의 왕비가 됩니다. 양제보다 한 살 아래인 570년생입니다. 재색이 뛰어나고 덕행이 바르고 효성이 깊어...등등 유교적 품성을 갖추어 문제와 독고황후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죠. 그런데 팔자에 모의천하(母儀天下) 명대도화(命帶桃花)라, 천하의 어머니가 되겠지만 도화살이 들었다나요? 남편과 이별할 팔자란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여러 드라마에서는 수양제가 태자 시절부터 음행을 저지르데 함께한 여인으로 나오지만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수양제가 대운하 유람에 나설 때 소황후는 수많은 궁녀들과 동행합니다. 백성들의 고초를 목격했을 겁니다. 그러나 양제에게 적극적으로 간언을 하는 등 정치적 역할은 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지냈던 것 같습니다. 당 현종의 비위만 맞추다가 비극을 맞은 양귀비(楊貴妃)와 비슷합니다. 양귀비의 친인척들은 출세하지만 양귀비는 정치현안에 별로 간여하지 않았습니다. 618년 수양제가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죽고 수나라가 망합니다. 우문화급은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군을 이끈 우문술의 장남입니다. 소황후는 양제의 장례를 성대히 치룹니다. 그리고 우문화급이 황제에 오르자 그의 애첩 숙비(淑妃)가 됩니다. 이 때 나이 48세. 수가 망한 뒤 혼란스러운 정국이 이어지고 우문화급이 낙양전투에서 반군 두건덕(竇建德)에게 죽자 소황후는 두건덕에게 끌려가 애첩이 됩니다. 하왕(夏王)이 된 두건덕은 소황후를 얻은 뒤로 천하에 뜻을 잃은 채 여색을 탐닉하다 당태종 이세민에게 당하죠.
두건덕과 지내던 소황후는 돌궐로 갑니다. 수양제는 여동생 의성(義成)공주를 돌궐에 보내 정략결혼을 시켰습니다. 수양제와 돌궐관계는 <삼국사기>에도 나옵니다. 양제의 고구려 침공(612)이 있기 전 북방을 순례하면서 동돌궐 왕 계민(啓民)의 장막을 방문했을 때(607) 계민이 고구려 사신이 와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어’ 양제에게 그 사신을 인사시켰다고 합니다. 고구려가 돌궐과 동맹을 맺어 수에 대항했다는 해석은 여기에서 나오지만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의성왕후는 강성해진 돌궐의 힘을 배경으로 두건덕에게서 양제의 자식들과 소황후를 찾아 돌궐로 데려갑니다. 소황후는 돌궐에서도 두 부자(父子) 칸인 처라가한(處羅可汗)과 힐리가한(頡利可汗)의 마음을 사로잡아 차례로 왕후가 된다고 하군요. 세월은 흘러 흘러 건국 초 돌궐에 조공을 바치던 당태종 이세민이 630년 드디어 돌궐을 대파하고 힐리가한의 항복을 받습니다. 고구려는 이를 축하하는 사절을 보냅니다. 소황후는 다시 전리품으로 이세민 앞으로 끌려갑니다. 그리곤 이세민의 소용(昭容)이 된다는 데 이건 역사의 왜곡이고 지나친 상상력입니다. 이때 소황후는 환갑 나이이고 이세민 보다 28살이 많습니다. 소황후는 당나라 궁중에서 18년을 더 지내고 사망하는데 이세민은 황후의 예로 수양제의 능에 합장하고 민황후(愍皇后)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이후 역사는 소황후에게도 ‘양’을 부쳐 양민왕후라 부릅니다.
여인 열전은 다시 읽어보니 별로네요. 필력이 좋은 분이 쓴다면 ‘즐거운 사라’ 정도는 될 것 인데... 다음은 좀 고상한(?) 주제인 ‘운하의 정치학’입니다.(2017.10.6.)
사진1: 양주당성 정원에 있는 정몽주 동상
사진2: 양주 대운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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