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백두산에서
한라산에서
지리산에서
무등산에서
그리고 피어린 한반도의 산하 곳곳에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모든 혁명전사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
1.
지금으로부터 어언 120여 년 전
미국과 유럽 제국주의가 세계의 약소국들을 침략해
식민지쟁탈전을 벌이던 약육강식의 19세기 후반
프랑스 해적선이 대동강을 붉은 피로 물들이고
미국 해적선이 먼 훗날 한국현대사의 무덤을 파듯
평양의 왕릉을 도굴해 조선국왕의 수염을 뽑고
일본이 다시 강화도까지 침략해 쇄국의 빗장을 부수자
이제 조선반도는 영국, 독일, 러시아까지 몰려와
마지막 동북아의 교두보로 치열한 각축장이 되어
서양제국주의 맹수들에게 온몸을 물어뜯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목에 이빨이 박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아플 권리도 약탈당하고 죽을 권리도 약탈당하고
슬플 권리마저 약탈당한 긴 긴 세월 동안
무당에게 홀린 ‘붉은 여우’의 국정농단으로
나라살림은 거덜 나고 민초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앉으나 서나 고통밖에 잃을 게 없는 민초들은
이왕이면 벌떡 일어나 서서 죽기로 결심했으니
황토현에서 치솟아 우금치 고개에서 장렬하게 꺼져버린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그것이요,
멀리 바다 건너 제주도 산방산의 들녘을 삽시간에 불태운
‘이재수 난’의 들불이 그것이다.
그러나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장수들이 참수되고
민초들이 총탄에 겹겹이 쓰러져 겹겹이 포개지자마자
한일합방으로 나라 잃고 하염없이 피눈물만 삼키다가
어느 날 도둑처럼 불쑥 찾아온 1945년 불볕 여름
일제식민지 36년의 치욕과 악몽이 끝나기도 전에
한 손엔 빵과 또 한 손엔 해방군의 탈을 쓰고
발톱까지 무장한 채 이 땅을 점령한 미제국주의자들은
마침내 순결한 조선의 푸른 산하를
두 토막으로 분질러 놓았다.
그리고 다시 40여 년의 기나긴 세월이 흘렀건만
일본총독부가 미국대사관으로 바뀌었을 뿐
미제의 창살 없는 감옥
이 식민지 산하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미제국주의 침략사 120여 년
다시 써야 할 피어린 민족해방투쟁의 한국현대사
압제의 사슬을 이빨로 뚝, 뚝 끊으며
붉은 피로 얼룩진 그 장엄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우리 어찌 잊을 것인가.
바람 부는 대로 쓰러지는 풀잎이 아니라면
결코 그들의 노예가 아니라면
우리 어찌 보고만 있을 것인가.
2.
이 땅은 아메리카의 한 주(州)
그들의 병영에서 짐승처럼 사육되었던 수많은 날들
그 수많은 신음의 밤들을 누가 잊을 것인가.
누가 잊으라고 하는가.
1948년 4월 3일 ‘제2의 모스크바’
밤마다 먼저 간 동지들의 피를 묻고
살을 묻고 뼈를 묻는 혹한의 한라산
그 눈 덮인 산하
붉은 피를 흘리며 끝내 숨져간
이름 없는 혁명전사들의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끝내 이어지는 저 붉은 핏자국을 누가 잊는가.
누가 잊을 것을 강요하는가.
동상으로 썩어문드러진 발가락을 자르고
뼈를 깎는 모진 고문과 추위에
여성전사들의 생리마저 얼어붙는 밤
그들은 기어이 갔다.
총알 박힌 다리를 절룩거리며
동지들의 어깨에 매달려
진지로 돌아가다
진지로 돌아가다
끝내 쓰러져버린 그들은 갔다.
아-
기어이 갈 곳으로 가고야 마는가.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의 혁명전사들은 그렇게 갔다.
미제의 각을 뜨다가
적들의 심장에 불을 지르다가
끝내 다 뜨지 못한 채
끝내 다 지르지 못한 채
한줌 피 묻은 뼛가루로 날아갔다.
적과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인공(人共)의 깃발을
그 밑에 죽기를 맹세한 깃발
….
3.
검은 상복을 입고 40년만에 처음 찾은 한라산
내가 나를 운구하듯 걷는 이 학살의 숲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산등성이마다 뼛가루처럼 쌓여있는 흰 눈이며
나뭇가지마다 암호를 주고받는 새들의 울음소리며
삐라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에도
깜짝 놀라 피했던 새가슴이며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오름과 무덤마다
자지러질 듯 반짝이는 별들이며
청보리 일렁이는 생가슴마다 차곡차곡 돌 쌓아
멀리 수장하러 배 떠났던 바다며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허겁지겁 땅을 파헤쳐
씹고 또 씹었던 이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며
마지막 남은 낙엽마저 가솔린 냄새를 풍기며 불탔던
이 학살의 숲은
그러나 아직도 총소리로 가득하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보고 쏘았지만
그들은 보지 않고 쏘았다.
학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하늘에서는 미군 정찰기가 살인예고장을 뿌리고
바다에서는 미군 함대들이 경적을 울리고
지상에서는 미군 장교들과 토벌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모든 처형장을 진두지휘하던 그날
한국판 ‘KKK단’인 서북청년단이 아편에 취한 채
한림의 금악리를 빨갱이 마을로 지목해
80여 명의 남녀 중학생들을 금악벌판으로 끌고 가
집단총살을 하고 바다에 수장한 다음
서귀포 정방폭포와 천지연폭포로 몰려가
빨치산의 젊은 아내와 딸들을 발가벗겨
나무와 바위에 묶어 표창연습으로 삼다가
마침내 모두 대검으로 젖가슴을 하나씩 천천히 도려내
폭포 속으로 던져버린 그날
석양에 물든 사라봉 봉수대 동백숲에서는
서청에 뒤질세라 더 포악해진 반공청년들이
하나님을 외치며 열아홉 살 처녀들을 윤간해 생매장하고
서귀포 임시감옥에서는 친일경찰이
빨치산과 그 가족들의 손톱과 발톱 밑에 못을 박고
일제 뺀찌로 혓바닥 뿌리까지 뽑아버린 그날
바로 그날 관덕정 인민광장에서는
온몸이 총탄에 맞아 벌집으로 변한 사람
머리가 돌과 소총 개머리판에 맞아 함몰된 사람
복부가 대검에 찔려 창자가 삐져나온 사람
음부에 긴 쇠꼬챙이가 꽂혀 있는 사람
손톱과 발톱과 이빨과 혓바닥이 모두 뽑힌 사람
손바닥과 발등에 대못이 박혀 있는 사람
두 젖가슴이 모두 잘려나간 사람….
그런 사람들이, 한때는 사람이기도 했던 그런 빨치산들이
십자가 나무기둥에 묶여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이 간나새끼들과 에미나이들이 바로 빨갱이들이다!”
“폭도 빨갱이들의 종말은 이렇다!”
강제로 끌려나와 광장에 운집한 도민들을 향해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 같은 미친(美親)놈들이
팔짱 낀 미군 장교들에게 서로 충성이라도 하듯
니뽄도로 시체들을 쿡쿡 쑤시며 소리쳤다.
처참한 모습에 여기저기서 도민들이 말을 잃고 실신했다.
부모들은 손바닥으로 아이들의 두 눈을 가리기 바빴고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속으로 속으로만 어림잡았다.
저건 김운민
저건 박남해
저건 김병남
저건 양미선
저건 남 진
저건 현애란
저건 이덕구….
통곡도 오열도 없었다.
도대체 사람이어야 통곡이라도 하지,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결코 죽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것은 한낱 푸줏간에 걸린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한 개의 총알이 가슴에 박힌 것은
차라리 행복한 죽음이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한라산을 미친 듯이 뒤흔들었다.
“미군은 즉각 철수하라!”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조국통일 만세!”
“제주 빨치산 만세!”
붉은 저녁노을이 꽃상여 따라 관덕정 위로 지고
붉은 파도가 바람 따라 만장기처럼 출렁이며
사라봉 지나 성산 일출봉을 돌다가 피를 토하고
산방산 지나 송악산을 돌다가 다시 피를 토하고
그렇게 제주바다를 한 바퀴 돌면서 피를 토한다.
40년 전의 산은 다시 한 번 빈산이 되고
그 빈산에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살아도 흘러가고
죽어도 흘러가고
마침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흘러갔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고 산 자들은 더 말이 없는
이 참혹한 한라산
마지막 몇 사람이 기적처럼 살아
이젠 상주가 되어 걷는 이 학살의 숲
옆에서 동지들이 쓰러져 시체가 쌓이고 쌓여도
오래 슬퍼할 시간이 없었던 이 겨울 숲
이제 이 숲은 누가 지키며
지키는 자는 또한 누가 지킬 것인가.
앞으로도 갈 수 없고 뒤로도 갈 수 없던 세월
죽은 자가 산 자를 운구하듯
운구 된 자가 마지막 생의 수순을 밟듯
걷고 또 걷지만 여전히 맴도는 한라산
동지들이 토벌대의 삽자루에 생매장 당한 이 숲속
동지들이 토벌대의 작두에 목이 잘린 이 숲속
동지들이 토벌대의 총칼에 쫓겨 몸을 던진 이 절벽
이 아득한 숲을 내 어찌 벗어나리.
이 지극한 절벽을 내 어찌 벗어나리.
생의 절벽은 곧 나의 궁극이요
나의 궁극은 곧 생의 절벽일지니
그 백척간두에서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그 백척간두에서 내가 나를 위해 죽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한 발짝 진일보할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진일보한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과연 나의 존재근원은 어디서 비롯된 핏자국이란 말인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올해도 물은 여전히
높은 곳에서 숲을 지나 낮은 곳으로 흘러가고
흘러가면서 스스로 부서져 길을 만들 것이니.
그렇게 낮은 방향으로만 흘러 길을 만들 것이니.
능히 그러할 것이니.
해마다 꽃 필수록 아픈 4월은 어김없이 다시 오는데
누가 그날의 제주바다를 기억하지 않는가.
누가 그날의 한라산을 추억으로만 기억하는가.
4.
돌려주자.
오늘도 노란 유채꽃이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는
아- 피의 섬 제주도, 그 4․3이여.
우리의 심장에서 피어나는 이 진달래꽃을
그 누가 꺾을 수 있으랴.
돌려주자.
친일매국노의 대를 이은 친미매국노들을 죽창에 꽂아
친일자본가의 대를 이은 친미자본가들을 횃불에 태워
그들에게 돌려주자.
그리고 꽃 피는 광주코뮌의 수천 명을 학살한
저 피 묻은 5월의 원수들을 찢어서
갈가리 찢어서
‘조국 아메리카’의 후예들에게 돌려주자.
그리하여 역사가 고발하듯
태생부터 수천만의 인디언들을 학살하더니
태생부터 수백만의 흑인노예들을 학살하더니
그것도 모자라 태평양 건너 한반도까지 서부개척을 하더니
멀쩡한 땅을 남북으로 갈라 늙은 허수아비를 조종하더니
수백만의 양민들을 빨갱이로 만들어 무차별 살상하더니
평양 상공을 날며 움직이는 것들은 모조리 총질을 해대더니
대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네이팜탄으로 불태워버리더니
나치 같은 홀로코스트로 북녘을 병영국가로 만들더니
마침내 성조기의 51번째 별을 그리듯 휴전선을 그어
자유와 평화라는 이름으로 남한을 반공인질로 잡아
우리가 간신히 다시 일어나 간절히 다시 꽃 피울 때마다
가차 없이 민주주의의 동맥을 끊어온 너희 양키들은 들어라.
우리 한반도 인민들의 피가 더욱 붉은 것은
우리의 사상이 빨갱이에 물든 탓이 아니라
바로 너희 학살의 원흉들 때문임을
바로 너희 학살의 부역자들 때문임을
그리고 침묵하라.
어둠과 야만의 20세기, ‘자비로운 학살’을 주장하며
세계 곳곳의 전쟁터와 대량학살의 현장을 지휘하고도
국제법상 단 한 번도 전범으로 재판 받지 않은
세계 악의 축이자 근원인 우리의 가증스런 ‘혈맹우방’이여.
당신들이 발톱을 감춘 채 인간의 정의를 외치는 한
당신들이 총구를 감춘 채 인류의 평화를 외치는 한
우리는 잠들 수가 없다.
당신들의 춤추는 칼날 위에서
우리는 결코 잠들 수가 없다.
그 누구도 잠들 수 없는 이 해방의 산하에
아직도 펄펄 끓는 노동자 농민들의 붉은 피가 있어
아직도 미제와 맞짱 뜨는 세계 유일의 동지가 있어
민족해방의 이름으로
조국통일의 이름으로
저 간악한 미제의 각을 뜨고
저 미친(美親) 매판자본의 심장에 불벼락을 안겨주자.
가슴에 폭탄 한 다발씩 품고 적들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아직도 눈 감지 못한 동지들의 원한을 갚아주자.
그리하여 노동자 농민들의 여윈 손들이
마침내 혁명의 숲을 이룰 때까지
결코 용서하지도 말고 결코 잊지도 말자.
5.
거듭 말하노니
한국현대사 앞에서는 우리는 모두 상주이다.
오늘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
그 아름다운 제주도의 신혼여행지들은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뜬 별들은 여전히 눈부시고
그곳에 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 별들과 꽃들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_이산하 <한라산 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