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사시대부터 사용해온 온 뗏목배가 차츰 발달해가는 동시에 통나무를 반으로 쪼갠 다음 돌도끼로 속을 파낸 통나무배도 함께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통나무배는 호수나 강을 건너거나 고기를 잡는 데에 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 통나무배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유물로는 옛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통나무배 모양의 토기'와 신라 경주 지방에서 출토된 ‘통나무배 모양의 토기', 그리고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세 쪽으로 된 통나무배가 있다.
◎가야 통나무배의 특징
이중 가야시대의 ‘통나무배 모양의 토기'는 투박한 통나무배의 초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뱃전(배의 양쪽 가장자리 부분) 위에는 여러 개의 멍에가 걸쳐져 있는데, 이 멍에는 양쪽이 서로 오므라들거나 벌어지려는 것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또, 한판의 멍에에는 돛대를 세울 수도 있었다.
뱃전 위에는 모두 8개의 ‘놋좆’이 있는데, 여기에다 노끈으로 ‘박'이라고 불리는 노를 매달아 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되는데, 통나무배의 외판(外板)에 철판 조각 같은 것을 붙인 흔적이 있다.
◎삼한과 가야시대의 해상교류
일본 미야자끼현(宮崎縣)의 사이도바루(石原) 고분에서도 이와 같은 통나무배 모양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같은 배 모양의 토기가 출토되었다는 것은 매장된 사람이 같은 종족, 또는 같은 문화집단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으로 보아 삼한 및 그 후의 가야와 왜국 간에 해상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낙동강 유역을 그 강역으로 했던 삼한과 그 이후 가야 사람들은 배를 타고 낙동강 하류, 즉 김해강 하구로, 다시 김해강 하구에서 쓰시마(對馬島)를 거쳐 북규슈(北九州)로 이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헌을 보면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왕비인 허씨 부인은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배를 타고 김해 해안에 도착했는데, 김수로왕이 이를 미리 알고 가야의 배와 신하들을 보내 허씨를 영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허씨 부인이 타고 온 배나 가야의 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원천자료-

제목 :가야 통나무배 모양 토용
출처/소장 :한국해양대학교(모형)/호암미술관(원형)
설명 :통나무배의 형태와 구조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배의 길이 너비 깊이 등의 비율은 맞지 않으나 통나무배를 상징적으로 묘사해서 표현한 것 같다. 이러한 통나무배를 타고 바닷가에 나가서 고기도 잡고 섬과 섬을 왕래하기도 한다.
-복원과정-

가야시대 통나무배의 복원 도면은 <반구대 암각화 탁본>, <자랑스러운 울산을 연다(중)>, <고선도보>, <선-일본>, <우리배의 역사>, <한국의 배>, <안압지- 통나무배>, <대한수산지> 등과 주로 가야시대 배모양 토용과 안압지 통나무배를 참고로 하고 전통 한선의 설계 기법으로 기본 도면과 공작 도면을 작성하였다.(참고문헌 참조)
▷고증 복원 설계 :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소장
출처: 디시인사이드 역사갤러리 '쿠쿠'님의 글
(http://kr.dcinside7.imagesearch.yahoo.com/zb40/zboard.php?id=history&page=1&sn1=&divpage=6&banner=&sn=on&ss=on&sc=off&keyword=가야&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3066)
첫댓글 배 생겨먹은게 어째 그리스로마신화에나 나올법한 배 모양같습니다... ㅡ.ㅡ;;;
당시에는 아직 조선기술이 미흡해서 그런 듯 .. 하지만 이런 배로 바다를 가르며 일본 규슈부터 낙랑까지 항해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