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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弱者)의 사전적 의미는 힘이나 세력이 약한 사람 또는 생물의 집단을 뜻 하는 말이다. 이 말에 관형사를 붙여 사회적 약자라 사용하기도 하고 지체가 부자연스러운 이들을 교통약자라 부르며 교통편익시설에 대한 확 층을 언급하기도 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심신의 기능적 퇴화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스스로 생물학적 약자라 칭하는 버릇이 생겼다. 생물학적 약자이면서 더불어 면역체계의 이상은 여러 가지 증세를 유발하며 괴롭히고 있지만 하나 둘 체험해 가며 약복용, 음식조절, 운동요법을 병행해 가며 면역을 다소 회복시칼 수 있는 것은 되돌리고 노화에 따른 것은 별도로 분별해 가며 정리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나의 속도 모르고 고산준령을 함께 넘어 다니던 악우들이 단풍계절이 찾아오자 부쩍 연락이 늘었다. 후배들에게는 적당히 돌려세울 수 있었지만 동기에 속하는 친구신분을 지닌 우정 앞에서는 솔직할 수밖에 없었다. 매월 갖는 월산행 모임에도 나가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아주 오랜 시간 허리병으로 고생한 것을 알고 있는 산악 모임이기에 허리병이 노환처럼 달라붙어 물러서지 않아 당분간 나갈 수 없다고 팀을 이끌고 있는 후배에게 일러두었다. 최근 들어 자주 허리부근에 근육이 사라지면서 통증이 유발되어 근육이완제, 소염진통제를 복용하고 한방 물리치료를 받는 횟수가 잦아졌다. 옛적엔 이러한 진료를 사나흘 집중하고 나면 효과가 뚜렷했었지만 노년기가 성숙되면서 지지부분한 상태로 이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나이를 먹어가면 쉬지 않고 운동을 게을리하면 안 되기 때문에. 기본근육은 유지해 주어야 탈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기에 근력운동과 걷기는 매일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요즈음 동기생들과 부르는 호칭은 각자 성 뒤에 옹(翁)을 붙여 부른다. 60년 지기 全 翁이 소식을 보내와 오랜만에 서로 시간을 내어 상봉할 기회를 갖었다. 무척 오랜만이었다.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눔 끝에 가을산을 가자며 스케줄을 잡아 회람 후 희망자를 추려 가을 단풍 산행을 하자는 의견을 구해 왔다. 할 수 없이 현재 자신이 처한 입장을 세세하게 설명해 주고 양해를 구했더니 오히려 그럴수록 움직이는 것이 현재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며 종용하는 것을 내려놓지 않았다. 자연치유 주의자가 본의를 상실한 것이 문제라며 끈질겼다. 심기일전의 기회이고 반전효과가 분명한데 왜 기피하느냐 질책성 항의가 지속적이었다. 인간에게 자연이 주는 혜택은 무제한이지만 때로는 재해로 돌변하기도 하지만 그 재해마저도 극복하며 자연을 사랑해 온 자연 중심적 思考者께서 외람된 자세라고 설득에 설득을 포개왔다. 무너진 마음을 바로 세우는 것을 心機一轉이라 한다. 이 자세를 친구는 나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와 헤어져 돌아온 후 전환에 대한 사유의 공간을 마련하고 기획의 자리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명산을 선택하고 그중 단풍이 아름다운 곳을 추억 속에서 채집하기 시작하였다. 설악산 소청부근, 남설악 주전골, 오대산 선재길, 대관령 옛길, 치악산, 화양구곡, 지리산, 칠선계곡, 덕유산 구천동계곡, 지리산 노고단 일대, 태백 당골, 소금강, 한라산 영실계곡, 소백산 등등을 추억하며 가장 강렬했던 추색의 기억을 기억의 연못가에 앉아 뜰채로 건져 올리기 시작하였다. 생물학적 약자가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에 가장 합당한 근거를 제공해 줄 곳은 두 곳으로 압축되었다. 차량을 이용하여 1300m 고지까지 오를 수 있고 바로 그곳에 일박할 수 있는 산장이 마련된 곳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확인의 변죽을 우선 全 翁에게 보냈다. 어련히 잘했겠느냐 하면서 늘 자네의 전권에 따른 것이 자네의 산 제자로서 불문율이니 사족을 달 수 없다면서 전권 위임이라는 매듭으로 답을 해 주었다. 주관이라는 독선을 경계하라는 삶의 철학의 근거 지키려 두 곳을 선정하여 알린 곳인데 주관적 기획을 따르니 알아서 하라는 全 翁의 답을 듣고 바로 결정한 것이 소백이었다.
白頭大幹
백두대간(白頭大幹)은 백두산 병사봉에서 지리산 천왕봉에 이르는 산줄기로, 크게 한반도인 우리나라를 종단하는 지형이다. 대간은 산줄기가 이어지는 지형이라, 지리학에서 지질을 중심으로 구분하는 산맥과 비교하면 개념이 매우 다르다. 대간의 간(幹)이란 한자가 '줄기 간'이므로,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는 큰 산줄기라는 뜻이다.
14세기 고려의 공민왕 때 사람인 우필흥(于必興)이 공민왕에게 올린 상소문에 "아국(我國)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난다."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늦어도 14세기나 그 이전에 백두대간을 가리키는 개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헌상으로 백두대간이라는 단어 자체는 18세기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 (1751)에 처음 나타난다. 비슷한 시기 이익의 성호사설 (1760)에도 백두대간이란 단어가 사용되었다.
휴전선 이남에서 대간은 설악을 지나 오대산을 경유 두타산으로 흐른 대간은 그 아래 매봉산에서 내륙으로 방향을 틀어 태백산을 세우고 이어서 육산인 소백산을 만든다. 그리고 대간은 다시 내륙 안쪽으로 파고들어 속리산과 민주지산, 북덕유와 남덕유산으로 가르며 육십령을 넘어선 후 지리산 노고단에 도착 잠시 숨을 고른 후 지리산의 최고봉 천왕봉에서 걸음을 멈춘다.
소백산은 安氏 본관인 순흥이 있어 인연이 깊은 산이다. 순흥은 조선초기 순흥 도호부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순흥 안 씨 안향과 주세붕에 의하 세워진 소수서원과 선비촌이 있는 곳이다. 순흥 안 씨 시조인 안 자미(安子美)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안영유, 안영린, 안영화는 각각 1파, 2파, 3파로 이어져 나가게 된다 시조의 안 자미의 증손인 안향 이후 안 씨는 크게 번성했다. 안향은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 한 뒤, 교서랑(校書郞)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상주판관(尙州判官)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충렬왕 복위 때 판판 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고 후진 양성에 진력하여 유학의 학풍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문하에서 백이정과 우탁을 비롯한 훌륭한 유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이제현(李齊賢)과 이색(李穡)으로 이어졌다. 또 이색의 문하에서 권근(權近)이 나와 조선조로 이어졌다. 안향은 우리나라 주자학의 태두로 추앙되고 있으며,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순흥의 소수서원 곡성군의 회헌영당에 제향 되었다. 묘소는 장단 대덕산에 있다.
순흥 안 씨 추원단(順興安氏 追遠壇)은 경북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산 21번지에 있다. 시조공(安子美)을 비롯하여 12분 선조의 묘소(墓所)가 실존됨으로써 그 묘대신 단(壇)을 모셔 놓은 곳으로 순흥의 명산(名山) 비봉산(飛鳳山) 남쪽 4만 3천 평에 조성하였다. 출입구 왼쪽 기둥에 숭조보본영세돈목(崇祖報本永世敦睦) 글귀가 있고, 오른쪽 기둥에는 순흥 안씨추원단(順興安氏追遠壇)이라는 글귀가 있다. 「순흥 안 씨(順興安氏) 추원단비(追遠壇碑)」에는 시조이하 7대에 이르는 선조님들의 빛나는 사적과 관향지 종사(宗事) 연혁, 종사에 힘쓴 선조들의 기적(紀蹟), 시조사단을 이전하여 중건한 사실들을 기록해 놓았다. 이곳에서 매년 음력 10월 1일 전국의 후손들이 모여 세사(歲祀)를 지내고 있는 중이다.
개인적으로 1979, 5.26은 부부의 연을 맺은 날이다. 첫 살림을 차린 곳은 강남구 반포동이었다. 몇 년 살다 논현동으로 옮긴 후 그곳에서 두 아이를 안아줄 수 있었다. 당시 논현동 성당에 교적을 두고 열성적으로 몰입하던 시기였다. 원래 친구였으나 서로 잊고 살다 태니스 동호회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을 때 가입하기 위하여 방문하여 코트장에서 다시 재회한 친구도 교적을 논현동 성당에 두고 있어 운동과 더불어 자주 만나던 친구였다. 주말마다 조를 만들어 시합 후 회식을 나누는 일은 당시의 보편적인 일이었다. 재회 후 잘 지내던 친구는 소백산 천문대 연구원으로서 직을 옮겨 근무하는 시기가 있었다. 산을 좋아하는 나에 대하여 잘 알고 있던 친구는 주말에 외출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면서 마침 휴가를 받아 쉬고 있는 날 차에 태워 천문대 관사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 꼬불꼬불한 죽령 오르는 길을 지나 죽령휴게소 광장 서쪽방향으로 열린 산 길을 한 참을 달린 후 천문대에 도착하여 이틀 묵고 희방사역까지 차로 데려다줘 청량리행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온 적이 있었다. 이 추억과 순흥에 대한 연고가 소백산을 선택한 가장 큰 동기다.
생물학적 약자인 관계로 혈기를 내세우지 않고 조신하게 다녀오려면 아무래도 활동반경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조건에서 후배들과 동행한다는 것은 스스로 후배들에게 짐의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고심하게 되어 全翁과 단 둘이 가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라는 판단에서 공지를 포기하고 둘이 떠나기로 한 것이다. 출발당일 07시까지 친구가 산막으로 오기로 하였다. 4 끼니의 주부식과 커피, 과일, 행동식과 버너와 코펠, 그리고 슬링핑백과 메트레스, 각종 기본장비를 꾸려 놓으니 45리터 어택이 가득 찼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국내 모든 대피소에서는 그동안 제공해 왔던 침구용 모포제공이 전면 취소 운영되고 있는 중이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당시 위생과 관련된 문제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대피소 난방형태가 공기 중심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마루형식으로 만들어진 대피소 숙소는 바닥이 엄청 차 메트레스는 필수다. 더불어 슬리핑백도 준비해야 한다. 출발 당일 도착한 친구 차량에 짐을 싣고 8시 정각에 출발하였다. 중간 커피를 마시기 위하여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다시 달려 2시간 15분 만에 죽형 휴게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대피소가 있는 연화 1봉 대피소까지는 차량으로는 20여분 소요되고 보통 걸음으로 1시간 30분 소요된다. 그리고 등고선 따라 계속 오름이 이어진다. 길도 전구간 시멘트 포장도로라 흙길보다 상대적으로 피곤이 중첩되는 것이 단점이다. 대피소에서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까지는 다시 1시간 30분 소요되고 길은 흙길과 시멘트 포장도로가 공존하고 있다. 연화봉(1,376.9m), 과 연화 1봉(1,357.5m) 사이 길에는 봄이 되면 철쭉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소백산 국립공원은 1987년 산악형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총면적 321,264 m2 지리산, 설악산, 오대산에 이어서 4번째로 넓은 산악형 국립공원이다. 1,439.5m 비로봉을 중심으로 국망봉 1,420.8m, 연화봉 1,383m, 도솔봉 1,214,2m 백두대간 마루금에 우뚝 서 있으며 퇴계 이황은 봄날 철쭉이 핀 모습을 보고 비단장막 속을 거닐며 호사스러운 잔치 집에 초대된 기분이 든다고 표현한 내용이 전해 내려고 오고 있다.
어렵사리 도착한 연화 1봉, 내륙으로 이어지는 산맥과 그 위를 올라타고 각각 다른 모습으로 자태를 드러내는 산, 산, 산 들이 호쾌하면서도 이름답게 서남쪽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월악산이 눈 가에 머물고 그 너머로 맥은 속리산으로 이어져 달렸다. 동안 갇혀 지냈던 옹졸한 근심과 생물학적 약자에 대한 처세들이 뭉개져 가을하늘 저 먼 곳으로 흩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억새풀이 가을 하늘과 겹쳐져 서정적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어 다가 가 몇 장의 사진을 담아 두었다. 짐을 들고 우선 음식조리와 식당을 겸하고 있는 대피소 옆 부속실로 자리를 옮겼다. 취사 및 식당으로 사용될 증축공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매점에서 물을 구매한 후 버너와 조리기구를 꺼내 점심준비를 하였다. 햇반을 꺼내 덮이고 이어서 육개장 2인분이 들어 있는 봉지를 털어 끓였다. 파김치와 겉절이 배추김치, 김, 산채나물 등등을 꺼내 점심을 챙긴 후 사전예약되어 있는 침실로 이동하여 짐을 풀었다. 메트레스를 깔아 놓고 슬리핑백을 펼쳐 놓은 후 선반에 짐을 정리해 두고 과일과 행동식과 카메라와 여벌재킷과 물을 챙긴 후 오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하여 길을 나섰다 오늘 연화봉까지 산책을 다녀 올 계획을 세워 둔 것이다. 오늘 중요한 일정은 오후 5시 저녁식사, 이후 일몰시간 전경 촬영, 대피소 뒤 전망대에서 은하수 물결과 쏟아지는 별 감상, 끝낸 후 밤 10시경 입실하여 취침할 계획이다.
저녁준비를 해 놓은 주부식과 주방용품들을 잘 정비하여 한쪽 구석에 놓아둔 후 간편한 냅색을 지고 대피소를 나와 연화봉으로 가는 초입 흙길로 나섰다 참 하늘이 가을 하늘이다. 젊은 시절 아내와 설악 마등령을 넘으면서 이러한 옥빛을 구경하고 있었다. 천불동으로 내려서면서 이 옥빛으로 한복을 만들어 선물하면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하며 걷던 기억이 저절로 떠올랐다. 걸어가던 길을 멈추고 등을 돌려 친구의 모습을 잡아 보았다.
지금 가을은 진행형이었다.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은 늘 고요한 침전이다. 가을이 지나면 곧 닥칠 적막을 알고 있기에 가을은 오히려 계절의 넉넉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360 방향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를 준비한 친구는 동서남북 방향으로 가을채집을 열중하는 모습이 가을답게 느껴졌다. 저 친구는 공학적인 면면이 깊다면 나는 인문적 속성이 깊은 편이다. 이런 이율이 60년 동안 우정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추론하게 만든다. 나에게 없는 것을 지닌 너, 그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익힐 수 있기 때문에 우정은 늘 아름답게 진화하는 속성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S자로 휘어진 숲 길, 고도가 거의 없는 평탄의 흙 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돌아나가자 차가 서있었다 그리고 각종 가을씨앗을 채집하는 산림청 근무복을 입은 두 여인이 보였다. 단박에 그 여자들의 정체가 파악할 수 있었다. 외씨버선 길이라는 둘레 길이 있다.. 시인 조지훈 생가가 있는 영양부근에 시인의 승무의 시구를 빌려 만든 둘레 길이다. 그곳에 백두대간 수목원이 자리 잡고 있는데 생물의 보존을 위하여 대한민국 영토에서 태어나 결실을 맺는 모든 종자를 보관하는 설비가 마련되어 있는 곳이다. 그곳에 보관할 종자를 채집하는 중 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 해 인가 수목원 개원행사 때 초대받아 참관한 적이 있었다. 백두산 호랑이도 그곳에서 번식시켜 개체수를 늘려 놓은 곳이 바로 백두대간수목원이다. 지나치면서 수고한다는 인사를 남기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첨언하여 금수강산을 재현할 수 있는 종자들을 보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도 전했다.
일정한 목표를 세우고 나선 걸음이 아니라 천문대 바로 아래 고도를 높이는 언덕 초입에서 되돌아 섰다. 되돌아오는 길에 전망대에 자리 잡고 앉아 산 줄기 줄기를 타고 흐르는 빛의 명암이 너무 아름다워 찍어 두었다. 쉬며 커피와 사과를 나누며 산너울을 타고 흐르는 서정의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지금, 불현듯 나의 존재성에 대한 사유가 생겼다. 잠시 사유 속을 유영하다 되돌아와 지금 바로 순간을 직시하며 감탄하고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명암이 아름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골이 많고 깊으면 큰 산이다. 올망졸망 작은 산 큰 산이 어울려 산악지형을 섬돌처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잠시 후 해는 하루의 일정은 거두고 화려한 노을과 함께 서쪽 산 끝 자락으로 사라진 후 정적의 밤을 데려다 놓고 사라질 것이다. 이를 의식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가을은 기운다는 뜻이 어울리는 계절이다. 오후에 들면서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한다. 윈드쟈겟을 덧입고 앞서가는 친구 등 뒤에도 가을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가을이 기우는 모습도 겹쳐졌다. 숨이 살짝 가파르게 변하는 듯하는 언덕 모퉁이를 돌다 용담을 발견하고 다가섰다. 보랏빛이 참 아름다운 꽃인데 깊어진 가을의 영향으로 퇴락의 수순으로 접어든 것 같아 애상이 섞여 다가와. 곧바로 돌아서고 말았다. 나이 탓일까? 싫은 것을 껴안을 수 없도록 변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좋은 것만 보고 느끼고 싶은 감정이 늘 앞서는 것 같다. 촉박한 시간에서 찾아오는 심술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늙음이 깊어 갈수록 평소에 없던 부족하고 모자란 인성이 불쑥하고 나타난다는 자괴감 때문에 슬프게 느껴지는 경우가 점점 늘어가는 편이다.
대피소로 원점회귀, 태양광 패널 아래를 지나가면서 걸음을 조급하게 옮겨나갔다. 일몰 시간까지 남은 시간이 조급하게 마음을 당겼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침실로 가 주부식과 취사도구를 챙겨 들고 취사장소로 가 저녁준비를 끝낸 후 석식을 챙겼다.
일몰시간 17시 58분, 서두르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시간이다 전망이 좋은 긴 장의자를 선점하기 위하여 친구를 먼저 보낸 후 화급하게 설거지를 끝내고 짐을 챙겨 침실로 갖다 놓고 이를 닦은 후 밖으로 나왔다. 앗! 해는 이미 월악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놓친 것이다.
잔여 빛의 영향으로 노을이 묻어나는 대피소 서쪽외벽은 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대피소 뜨락의 풀과 쑥부쟁이는 차가운 가을바람에 쓰러지고 있었다. 풀의 시인 김수영이 다가왔다. 시인의 시상을 빌려 풀이 눕는 경우를 파악해 보려 했지만 어람도 없었다. 바람이 거칠고 강해 눕는 풀을 찾을 수 없었다. 돌무덤 사이사이에 자라는 풀은 연약했고 키는 단초가 대부분이었다.
풀과 꽃을 보는 사이 그 사이에 저문 저녁노을은 실루엣을 불러 모으기 시작하였다. 셔터 속도를 느리게 한 후 기다렸다. 한 줌의 빛이라도 더 모으기 위한 전략이었다. 빛이 부족한 환경을 이기려면 화인더를 길게 잡아 주어야 한다.
연화 1봉에 서서 몰려오는 어두운 그림자를 뒤로 하고 동북방향 전망대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이 부는 속도에 따라 흔들리는 별빛과 은하수는 희미하게 보였다. 자신의 노환이 일으키는 노안의 영향임을 깨닫고 안경을 준비하지 못한 자책에 오랜 시간 시달려야 했다. 오한이 느껴지는 22시경 침실로 입실한 후 자리에 누워 하루를 되새기고 있었다. 내일은 일출보기, 조식해결, 짐정리 후 하산하여 풍기와 순흥을 지나 무섬을 탐방하고 부석사 경유한 후 산막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오랜만에 고산 산장에서 일정, 심신에게 유익한 시간이었다. 절제된 걷는 시간은 탐탁하지 않은 일이지만 현재 처한 생물학적 환경으로 견주어 보았을 때 최상의 선택이 아닌가 한다.
이중 삼중으로 문을 달고 동선을 여러 번 꺾어 외부의 극한적 자연환경으로부터 실내를 보호하려는 시도가 강하게 다가오는 대피소 건축구조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처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회랑 같은 복도가 10m 내실 현관문까지 연결되는데 바닥을 배수로 뚜껑과 같은 철재로 마감해 두어 폭우나 강설을 맞고 들어선 등산객들의 장비와 옷에서 떨어지는 빗물과 눈 들이 바닥 뚜껑 사이로 떨어져 자연배수되도록 해 놓아 실내가 빗물과 눈으로 오염되지 않도록 해 놓았는데 이는 안전을 우선적으로 배려한 건축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옛 고산산장 건축구조와 다르게 동선과 평면과 개구부까지 자연채광에 공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침상구조도 오픈된 것이 아니라 1인이 들어갈 칸막이를 설치해 놓아 쾌적한 수면을 취할 수 있도록 한 것도 눈여겨 볼만한 시설이었다. 10시 정각 완전 소등이 이어졌다. 핸드렌턴과 플래시를 미리 준비하여 혹시 내일 일출을 보기 위하여 외부로 나갈 때 손쉽게 갖고 나갈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다.
다음날 오전 5시 수세식 양변기로 설치된 화장실을 다녀온 후 일출 맞이 전망대로 나가 해를 기다렸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 위는 어두움이 내려 있고 하늘에는 조각달이 떠 있다. 어두운 지평선 위로 붉은빛이 흐르고 그 위로 노란빛을 포함하여 무지갯빛이 산란하고 이어서 여백에는 흰빛이 일출 전 사진에 잡혔다. 생명이 다가오는 모습에는 늘 소중하고 아름다운 장엄함이 서린다는 것을 또다시 체험하며 환희심에 빠져 들었다. 요즈음 축축했던 마음에 사랑의 신비를 닮은 햇살이 파고들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아침 햇살이 퍼지기 직전이 가장 추운 법이다. 시계에 달린 온도계 버튼을 누르자 영상 8 -10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떴다.. 쌀쌀하고 춥게 느껴졌다. 우모깃을 추슬러 목과 뺨을 보온해 주며 해를 기다렸다. 찬란한 생명의 불꽃 마중 쉽지 않은 일이다.
어두움에 묻혔던 사물들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수평선에 띠처럼 퍼져 있는 운해의 영향인지 일출은 오메가처럼 명확하지 않았지만 또 하루를 알리는데 무색함은 없었다.
축 쳐졌던 쑥부쟁이가 생명의 빛이 모여들자 생기가 돌며 살아났다. 이처럼 만물은 생동하기 시작하는 때가 아침시간이다.
맺음과 시작이라는 지는 해를 배웅하고 오는 해를 맞이하며 일몰과 일출에 얽힌 삶의 빛을 재구성힐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았다.
꼭두새벽 열정을 갖고 기다리며 해맞이를 한 일을 산맥의 흐름처럼 기억해 두라는 뜻으로 우측으로 긴 공간을 남겨 놓은 사진을 찍어주었다. 다시 산장 침실로 가 짐을 꾸린 후 취사 겸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아침을 챙긴 후 후식으로 과일과 커피를 마신 후 무섬으로 출발하였다.
소백산 연화 2봉에 건축된 산장은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다른 산장과 달리 국토교통부에 의해 2023년 녹색 건축물 전환 인증을 받은 건물이다. 이렇게 시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소백산 연화봉에 천문대를 건설하면서 길을 정비하여 각종장비와 건축자재, 노동력을 원활하게 공급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무섬마을은 마을의 삼면을 내성천이 감싸듯 휘감아 돌아나가서 육지 속의 섬처럼 보이는 물돌이 마을로 풍수로 보면 매화꽃이 떨어진 모습을 닮은 매화낙지(梅花落地) 또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蓮花浮水) 모양의 지형으로 마을 이름인 무섬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수도리의 우리말이다. 원래 물 섬이라 불렀었다. 신분적으로 양반이고 인격적으로 사대라 불렀던 선비들이 그려낸 아름다운 마을이름이다. 안동으로 가는 길에 있는 하회마을에는 부용루가 있어 그곳에 줄을 매달고 불놀이를 즐겼다는데 하회마을 영향에 힘입어 생긴 마을이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국립
무섬마을은 17세기 중반부터 반남박 씨와 선성김 씨가 터를 잡아 형성된 전통마을이다. 2013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됐으며, 최근에 만죽재, 해우당 고택에 있는 유물들 까지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마을 안에는 오래된 고택과 전통가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병자호란 후 충절의 정신으로 개척되면서 세워진 무섬마을의 외나무다리는 360년의 역사와 애환이 서린 무섬마을의 상징이다. 서로 양보하지 않으면 건널 수 없는 다리로 상생협력의 마음이 고요히 흐르는 물 위를 가로지르며 발끝을 타고 흐른다. 꽃가마 타고 시집오는 새색시
이승을 떠나가는 상여의 잊히지 않은 숨결이 오롯이 피어오른다 선조의 바른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외나무다리여! 흔들려도 스러지지 않고 좁아도 이어져 영원무궁하리라 - 이렇게 무섬 미을 보존회에서 적어 놓고 있다.
저 위에 보이는 수도교가 세워지기 전에는 무섬마을의 외부 통로가 외나무다리가 유일했다.
건너온 외나무다리를 다시 건너가기 위하여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다 틈을 이용하여 다시 건너왔다. 내성천은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의 선달산에서 발원하여 남류 및 남서류하여 영주시, 예천군을 지나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유역은 거대한 산간분지에 해당되며 유역분지의 평균 해발고도는 318.2m이다. 낙동강 본류에 합류되는 예천군 일대의 하류 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가 분포한다.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에는 용이 비상하는 것처럼 내성천이 휘감아 돌아가는 예천 회룡포가 유명하다.
최근에도 반남박 씨 종가에서 새 며느리를 맞으면서 외나무다리를 이용하여 신랑을 앞세우고 신부를 꽃가마에 태워 혼인행렬과 함께 맞이하기도 하였다. 아직도 전통은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새신랑과 새색시가 정주하는 곳은 서울이지만 세월이 익어 나이가 들면 집안의 종부기되어 가문을 이끌어 갈 것이다. 흐르는 내성천의 물은 무척 맑았다. 모래톱에 수없이 흔적을 남긴 발자국을 보며 인적이 끊어지지 않는 명맥을 체험하고 돌아섰다. 차로 수도교를 다시 넘어 부석사로 향하였다.
그곳은 불가의 집으로 절을 하는 집이라 하여 절집이라 부른다. 부석사의 가람배치는 경전 중에 최고의 경전이라 하는 華嚴經의 첫차 빛날 華자를 빌려 그 모양으로 가람을 배치해 놓은 것이다, 배흘림으로 유명한 無量壽殿 옆에 뜬 돌판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 바로 浮石寺이다. 무량수전에서 소백산 죽령을 바라보는 전망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연휴가 시작되는 9일이라 가을을 찾는 행락객이 넘쳤다. 주차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맴돌듯 돌고 돌아 어렵사리 작은 공간을 발견하고 주차를 한 후 점심을 해결하기 위하여 대숲을 가로질러 식당을 찾았다. 사하촌은 많은 인파와 차량으로 몸살을 앎고 있었다.
불가(佛家)에서는 절 입구에 세워 두는 일주문(一柱門)이 있다. 일주문을 세우는 장소는 물이 흐르는 바로 옆이다. 그 이유는 속세에서 묻은 것들을 모두 씻어내고 들어 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성전에 들어서면서 벽이나 대 위에 놓여 있는 성수를 찍고 성호 긋는 의식과 같은 경우다. 불가의 탁발 의식도 일주문 바로 뒤에 이루지기도 한다. 절 아래 자연스럽게 생기는 마을을 사하촌(寺下村)이라 부르는데 부석사와 사하촌과의 경계점 길 아래 세 곳의 인공폭포가 마련되어 있다. 부석사 일주문은 산비탈에 있어 어디를 보아도 물 흐를 곳이 없다. 일주문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씻음이 이곳에 이루어지게 마련된 것이 아닌가 추론해 보았다. 왜? 세곳일까? 삼보에 대한 영향일까? 한번 익혀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라고 생각하며 지나쳐 식딩을 발 길을 잡았다.
경북 영주를 비롯하여 봉화, 예천, 안동 등등에서는 간고등어 백반 정식이 유명하여 주문하였다. 막걸리 한 잔을 시켜 반주로 겸하며 점심을 해결한 후 서서히 부석사로 걸음을 옮겼다.
부석사는 다른 산사와 달리 산기슭을 개발하여 석축을 차례차례 쌓고 그 위에 불사를 일으켰다. 무량수전의 기둥은 배흘림이다. 무량수전은 무량수불인 아미타여래를 모신 법당이다. 한자 풀이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수명을 지닌 부처를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로서.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676년에 창건하고 화엄종을 널리 전했다고 알려졌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흥교사라고 불렀다. 의상 이후 혜철을 비롯하여 무염과 징효 등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1372년 원응국사가 주지로 임명되어 가람을 크게 중창했다. 경내에는 고려시대의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조사당(국보 제19호)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무량수전 앞석등(국보 제17호)·소조불좌상(국보 제45호)·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3층석탑(보물 제249호)·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등이 있다.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의 수필작가 혜곡 최순우는 1916년 개성 출생으로 본명은 희순이다. 개성부립박물관에서 2년 근무히다 서울구립박물관으로 전근, 이후 국립박물관, 학예관 미술관장, 학예연구실장 등을 거쳐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부터 서울대 고려대, 이대 등에서 미술사글 강의 하였고 1967년 이후 문화재위원,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한국미술사학회 대표를 지냈다. 1984년 성북동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작가가 쓴 배흘림기둥에 서서 일부를 발췌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안양문·조사당·응향각 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또한 시인 송 수권은 배흘림기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천고에 몇 번쯤은 학이 비껴 날았을 듯한
저 능선들,
날아가다 지쳐 스러졌을 그 학 무덤들 같은 능선들,
오늘은 시끄럽게 시끄럽게 그 능선들의 떼 울음이
창해를 끓어 넘친다.
만상이 잠드는 황혼의 고요 속에
어디로 가는지 저희들끼리 시끄럽게 난다.
浮石寺의 무량수전 한 채가 연화장을 이룬
그 능선들의 노을빛을 되받아 연꽃처럼 활짝 벌고
서해 큰 파도를 일으키고 달려온 善妙 낭자의 발부리도
마지막 그 연꽃 속에 잦아든다.
장엄하다
어둠 속에 한 능선이 자물리고 스러지면서
또 한 능선이 자물리고 스러지면서
하는 것
마침내 태백과 소백, 兩白이
이곳에서 만나 한 우주율로 쓰러진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 바라보는 소백 능선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늦게 까 지 부석사에 남아 소백산에 물드는 노을을 보고 싶었지만 귀경에 대한 동선을 염두에 두며 해가 지기 전에 산막에 도착하려고 알맞은 오후시간에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단지 보고 싶은 소백산 능선 조망은 과거에 빌려 놓은 추억으로 대신하기로 하고 역순으로 걸음을 옮겨 일주문을 빠져나왔다. 풍기로 나와 죽령 터널을 이용한 후 중앙고속도로에서 충주 평택 간 고속도로로 바꿔 탔다. 그리고 월동기간을 대비하여 휴게소에 설치되어 있는 타이어 공기압을 체크한 후 적정공기를 보충해 주었다. 아울러 비치된 청소기를 이용하여 실내외를 말끔하게 청소를 한 후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다 앞으로 이용할 고소도로상에 위치한 주유소 가격을 대비하여 가장 싼 박달재 휴게소 찾아 들어가 주유를 마치고 산막으로 직행하여 산막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30분경, 친구는 전화를 받더니 곧장 집으로 갈 일이 생겼단다. 나의 짐만 나와 함께 내려놓고 떠나는 모습을 언덕에 서서 배웅하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은 후 약을 복용하고 잠시 운동 통해 몸을 추스르고 자리에 누웠다. 산장에서 하루살이 생활이었지만 고산준령에서 얻을 수 있는 감동을 충분하게 겪은 파노라마의 시간이었다. 혈기만 있다면 영춘에 있는 구인사에서 출발하여 국망봉과 바로봉을 경유한 후 연화봉, 제2 연화봉 대피소에서 1박 후 죽령으로 하산하는 종주등반 강행했겠지만 80을 저만치 앞세우고 있는 늙은이의 입장에서 산책 겸 소풍 같은 등반이었지만 동안 짓눌렸던 육신을 이완시킨 것은 수확이었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인데.... 생각여하에 따라 행위를 통해 미래의 시간 계획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분명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너무 외면하고 살아온 시간이 길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함께한 60년 지기 악우가 새삼 고맙다. 친구는 산막을 떠나면서 당부한 말이 있다. 산막에 머물러 있을 때 연락을 꼭 해라 달려와 같이 일해 주고 우정도 나누게 ~~ 그 말을 깊이 새겨 두었다. 사람을 뜻하는 人이라는 글자가 뜻하고 있는 것은 사람은 서로 기대어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부부가 기대고 부모와 자식이 서로 기대고 친구와 기대고 심지어 이웃 간에도 기대고 살아야 외롭지 않은 것이다. 깊은 밤을 의식하고 이불깃을 여미려는 순간 한 줌의 바람이 연이어 지붕을 쓸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불어 길을 잃은 기러기인가? 날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