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수집 2
잠시 침묵이 흘렀고, 찻잔을 들고 있는 옥진의 손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넘겨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 애태우던 노옥진은 마침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 인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것은 백수웅은 남편 허열로부터 멀리 떼어 놓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찻잔을 든 채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제게 가장 중요한 건 저도 아니고 당신도 아니에요. 미라예요. 미라보다 더 소중한 건 없어요.
백수웅을 없애 주세요. 그자는 지금 미라의 생명을 노리고 있어요."
" "
"백수웅은 또다시 제게 접근할 거예요. 여보, 용서해 주세요.
저는 당신이 집에서 수사 회의를 열 때 서류를 뒤져 보았어요."
"뭐라구? 내 서류를?"
그는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내를 바라보았다.
"네. 그래서 회담장이 워커힐이란 것도, 또 일자가 5월 29일부터 라는 것도 알아 냈어요. 고민도 많이 했죠.
하지만 저는 백수웅을 다시 만나 그대로 이야기할 거예요. 당신은 적당한 때에 백수웅을 없애 주세요.
국가도 명예도 제겐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미라예요. 백수웅이 회담장에 침투하려는 회의 기간 중,
저는 온양별장에 피신해 있겠어요. 미라와 함께 그러니, 이번에는 실수 없이 그 자를 처치하라구요."
등에서 진땀이 흘러내렸다. 가슴이 뛰고 숨이 차서 더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 말을 남겨 두고 벌떡 일어나 침실로 들어갔다.
"온양에서, 당신이 백수웅을 사살했다는 보도를 듣고 싶어요."
이제 곧 백수웅으로부터 최후의 연락이 올 것이다. 부탁한 기밀을 알려 달라고 그러면 말할 것이다.
회담장은 워커힐도 영빈관도 아닌 온양 별장이라고. 그 곳으로 백수웅을 불러 들여 마지막 설득을 할 것이다.
모두 잊고 어디로든 떠나 버리라고. 그것만이 모두가 살아 남는 길이라고. 만일 이 음모가 들통나거나 실패할 경우,
자신은 목숨을 지키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목숨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안 된다. 그건 미라 때문이다. 미라 때문에 실낱같은 목숨이라도
부지해야만 한다. 그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리고 숨죽여 흐느끼기 시작이다.
'백수웅 씨, 살아야 해요. 어떻게든 살아 남아 나머지 인생이라도 행복하게 살아야죠.
나 같은 여자는 잊어버려요. 나도 이악물고 이제는 백수웅 이름 석 자를 기억에서 지워 버릴 테니까요.'
아무리 위협하고 협박해도, 백수웅은 아직도 자신을 아끼고 있고 사랑하고 있다.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본능의 힘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백수웅은 목표를 포기할 인물이 아니다.
정말 어찌해야 좋을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숨죽이며 흐느끼던 울음도 그친 채 한동안 바보처럼 엎드려 있었다.
침실에서 아내가 번민에 휩싸여 있는 동안, 허열은 자신이 끓인 세 번째 커피 잔을 들고 있었다.
그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내는 지금 모든 것을 고백했다.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백수웅과 과거
'연인' 사이였다는 것도 묵시적인 암시를 주었고, 서재를 뒤졌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그렇다. 중요한 건 자신의 장래다. 그것은 이번 테러 저지만 성공하면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것처럼
초고속으로 승진할 것이며, 장인 어른의 격려대로 차세대 대권을 노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미라의 생명도 그에 못지않게 소중하다. 아내는 다시는 아이를 갖지 못할 것이다.
미라를 녀석의 손아귀에서 지켜야 한다. 아내는 결코 백수응의 소유가 아니며, 그 녀석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들의 과거는, 과거 속에 묻혀 버린 추억의 일부분일 따름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아내를 믿고 자유롭게 풀어 주는 일이며,
또 하나는 워커힐을 회담장으로 믿고 침투할 그 녀석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는 모처럼 아내 곁으로 가고 싶었다. 침실 문을 열고 옷을 벗고 침대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내는 끝내 받아 주지 않았다. 쥐죽은듯 돌아 누운 아내를 바라보며, 허열은 기어이 일어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렇다.' 아내가 원하는 것은 백수웅이 아니라 미라의 안전이다.
백수웅은 워커힐 회담장의 기밀을 얻어 내어 자신 있게 침투할 것이며, 거기서 일생을 마치게 될 것이다.
나는 반드시 승리한다.'
다음 날 아침.
노옥진은 남편의 머리맡에 메모를 남겨 놓은 채 집을 나섰다. 미라는 남편이 삼선교 아버님 댁에
맡겨 놓을 것이며, 이틀 동안 그녀는 별장을 정리하고 올 것이다. 별장은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낚시나 가벼운 파티를 위해 청평 호반에 마련한 것이고, 또 하나는 온천 겸 대전에 있는
공장 관리를 위해 온양에 지은 것이다. 규모로는 온양의 것이 청평에 비해 월등히 컸다.
대형 회의실이 있고, 결재실이 따로 있으며, 침실도 세 개나 있었다. 지방에 흩어진 공장의 사장단과
모임을 가질 때 주로 이곳을 이용해 왔고, 때론 온천욕을 하러 드나들기도 했다.
관리는 대전에 있는 한국 물산의 회사 중 하나인 한국 전자에서 맡아 왔는데, 한국 전자는 주로 선풍기,
전기 다리미 등 가전제품을 생산하고 있었고, 곧 에어콘 생산 라인을 준비할 계획으로 있었다.
노옥진은 관리인을 시켜 별장을 회의실로 만들어 놓았다.
대청소를 시키고 회의실을 점검한 후 모든 관리인들을 돌려보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모든 사람의 출입을 통제토록 했고, 별장 열쇠는 자신이 직접 휴대했다.
온양에 내려온 다음 날, 노옥진은 더욱 바빠지기 시작했다. 넓은 회의실 탁자 뒤에 박정희 대통령의
대형 사진과 김일성 북한 주석의 사진을 나란히 걸어 놓았고, 테이블 위에는 미리 준비한 소형 태극기와
인공기를 테이블 중앙에 세워 놓았다. 온양 별장은 순식간에 남북 회담 회의장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적어도 외형으로 보아서는 이보다 더 완벽하게 위장할 수가 없을 것이다.
노옥진은 핸드백에서 일제 소형 카메라를 꺼내 건물 외곽부터 회담장까지 차례로 찍어 가기 시작했다.
'백수웅 씨가 속지 않을 수 없지. 그가 이 곳까지 와 주기만 하면 되는데'
백수웅이 이 곳으로 침투해 들어올 시간, 서울에서는 이미 회담이 시작될 것이다. 그를 만나기만 하면
이번에는 설득에 실패하지 않으리라. 만일 여의치 못하면 함께 생명을 끊으리라.
필름 한 통을 모두 찍은 뒤, 그녀는 비로소 별장을 빠져나와 차에 몸을 실었다. 이제 다시 서울에 올라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 처럼 백수웅으로부터 연락이 올 때까지 전화기 옆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광릉 유원지로 불러 내 회담 장소와 일자를 알아 오라며 윽박지르던 백수웅, 그러면서도 자신의 승용차를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비통해하던 백수웅 그는 지금 도대체 어디에 은신해 있는 것일까?
그녀의 승용차는 어두워지는 고속 도로를 따라 서울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고, 그녀의 머리는 백수웅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옥진이 온양에 제3의 회담장을 설치하고 서울에 올라와 지내는 며칠 동안,
백수웅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회담장의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워커힐의 임시직 입사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우선 직원 유니폼이 지급되었고, 잡부로 일하는직원들과 정식 직원들을 사귀게 된 점이
그것이었다. 직원들은, 과묵하고 성실한 백수웅에게 더없는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백수웅은 자진하여 영빈관 정비 작업에 참여도 했고, 에메랄드를 지켜 보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곳이다!'라고 확신할 곳이 없었다. 양쪽 모두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로 사항은 또 있었다.
5월 21일이 내일이며 일요일이다. 그런데 도무지 회담 일자를 알아 낼 방법이 없었다. 어찌 되었건 회담장은
'워커힐 에메랄드'와 '영빈관'으로 압축되었지만, 정확한 일자를 알지 못하면 테러를 성공시킬 수 없다.
일본서 건너올 때 시한 폭탄을 준비하지 않고 직접 뛰어들어 터뜨릴 폭탄을 준비한 것이다.
그 때부터 자신은 그들과 함께 최후를 맞으려는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온실에 있는 군용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밤이 늦어도 잠조차 와 주지 않았다.
모든 신경은 금방 화살을 날려 보낼 시위줄처럼 팽팽히 긴장되어 있었다. 노옥진을 협박하기는 했지만,
가능한 한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보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노옥진에게 14일에 하기로 한 전화도 걸지 않았었다.
"부질없는 짓이야."
그는 자조적인 표정으로 뇌까리고 있었다. 장소와 시간의 정확한 정보 입수는 노옥진 아니면 절대 불가능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했다. 이제는 무엇인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이 벌써 5월 20일.
최초 도쿄에서 회담에 관한 정보를 입수할 때 5월 말 아니면 6월 초로 알았다. 그리고 지금 워커힐이나
영빈관의 분위기로 보아 회담 일자가 아주 가까이 와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앞으로 10일 이내.
이 날짜 중 어느 날 시작될 것이다. 백수웅은 초조해 견딜 수가 없었다. 월요일인 5월 22일부터는
워커힐 에메랄드도 영빈관도 일제히 출입이 통제된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가장 극적인 테러는 회담 첫 날을 이용하는 것이다. 아아, 그러나 지금 이 시간까지도 아무것도
알아 낸 것이 없다. 마지막 방법을 선택하라면 역시 노옥진을 위협하는 길밖에 없다.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던 그는 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토요일 밤 하늘은 캄캄했고,
차고 현란한 별빛들만이 하늘에서 어지럽게 명멸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서 워커힐을 빠져나왔다.
언젠가 남성우를 해치운 광나루 유원지까지 걸어 나온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끝내 공중 전화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93-6875. 다이얼을 돌리면서도 그는 제발 노옥진이
집에 없기만을 가슴으로 빌었다.
'제발 전화를 받지 마라. 만일 네 목소리가 들려 온다면, 나는 최후의 통첩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다르륵, 다르륵' 신호가 울려 갔다. 그 짧은 시간이 백수웅에게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길고도 고통스러웠다.
'절거덕' 수화기 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네, 우이동입니다."
들려 왔다. 마침내 들려 오고야 말았다.
노옥진 특유의 힘없고 불안한 목소리가 전선을 타고 울렁이는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나 나요, 백수웅."
"백 수웅, 백수웅 씨."
"긴 얘기 할 시간이 없어. 어떻게 되었지? 알려 줘."
"알려 드릴게요. 만나요."
"만나자구? 설마 나를 팔아넘길 생각은 아니겠지?"
"제발 제발 이러지 좀 말아요. 길게 전화할 수 없어요. 시간과 장소를 말해 주면 나갈게요."
"좋아. 그럼 분명히 들어 두기 바래. 워커힐 입구, 언젠가 내가 기사로 둔갑하여 습격했던 그 장소에서
내일 밤 8시에 기다려 줘, 혼자. 만일 미행자나 잠복 형사가 눈에 띌 경우, 미라는 생명을 잃어.
그런데 그 정보는 어찌 되었지? 쓸데없이 만나고 싶지는 않으니까."
"알려 드릴게요. 내일 저녁 그 곳에서 기다리겠어요."
수화기를 통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 왔고, 멀리서 미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엄마, 나 할아버지 집에서 오는 길이야."
그러나 그 이상의 말은 듣지 못했다. 노옥진이 수화기를 놓아버린 것이다. 지금까지의 태도로 보아
노옥진이 자신을 배신하리라고는 믿을수 없었다. 그러나 치밀한 성격의 백수웅은 이 긴박한 순간을
허술히 넘기지는 않았다. 노옥진과 만나기로 한 5월 21일은 참으로 더디게 찾아왔다.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작업을 마친 그는, 전날 밤 워커힐 온실 구석에 옮겨다 놓은 오토바이를 몇 번이나
손질하며 매만져 두었고, 발목의 칼과 간편한 복장을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노옥진과의 몇 번 만남을 허열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적이 불안스러웠고, 허열이 인내하며 이 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미행이나 도청이라면 아무리 조심해도 노옥진으로서는
역부족이 틀림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밤 8시라는 심야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바늘은 어느 새 7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5월 하순의 밤은 어둠을 재촉하고 있었다.
백수웅은 빗자루를 들고, 워커힐 쇼 연예인들을 출근시키기 위해 저녁 늦게 출발하는 통근차에 몸을 실었다.
통근차는 정문을 빠져나와 숲으로 우거진 입구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 한 지점에서 백수웅이 차를 세웠고,
거기서 내렸다. 노옥진과 만나기로 한 지점에서 무려 3백 미터나 떨어진 곳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차도를 벗어나 비탈길의 잔뜩 우거진 숲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리고 마치 척후병처럼
좌우 상하를 조심스레 살펴 가며 접근해 가기 시작했다. 신학 대학 정문을 저만큼 앞두고 그는 고양이 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노옥진과 만나기로 한 장소가 가까워진 것이다.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밤 7시 20분.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도 40분이나 남아 있었다. 청각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두 눈을 부릅뜨며 시각에 힘을 주었다.
적어도 잠복병력이 배치되어 있다면 지금쯤 이 야산에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리 귀를 열어도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는군."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워커힐을 향해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 온실까지 되돌아갔다.
그리고 구석에 세워 놓은 오토바이를 끌고 비탈길을 따라 명월관(한식집)으로 올라갔다.
이 곳에서부터 오토바이로 달리면 노옥진과 만나기로 한 장소까지 1~2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
그는 벚나무 가로수 아래서 다시 15분을 더 기다린 다음, 정확히 7시 58분 엔진음을 뿌리며 입구를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노옥진은 정확히 5분 전에 도착해 있었다. 다행히 남편이 이날도 철야 근무로
집에 돌아올 수 없음을 알게 되어, 다소의 여유를 가지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핸드백 속에는
온양에서 촬영한 필름이 들어 있었다. 백수웅을 유인할 유일한 무기였다.
남성우 대타로 들어온 정보 요원 박상남, 그는 장충동 회의실에서 그간의 수사 과정과 정보를
허열로부터 듣고 있었다. 아내와 백수웅의 부끄러운 과거까지 허열은 모두 털어놓았다.
"아내를 뒤쫓기도 해 보았고, 녀석의 은신처를 찾아 습격도 해보았지. 죽어 버린 기사키 하쓰요를 이용하여
역공작을 펴 보기도 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한 일은 없었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그런데 최후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역시 아내야."
"녀석의 은신처를 찾아 낸다고 해도, 이미 찾는 과정에서 접근을 눈치채 버리니, 그건 쓸데없는 짓일 겁니다.
추적 작전에서 유인 작전으로 전환하신 건 참 잘 하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일 에메랄드로 유인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시는 거죠?"
"바로 그 점일세. 자다가도 소름이 끼칠 정도라구.
어쩌면 녀석은 이미 영빈관에 침투해 들어가 있는 건 아닌가 하고"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실제 제가 영빈관 경호를 책임지고 있으면서도
목적이나 회담 일자를 전혀 알고 있지 못했으니까요."
" "
"역시 사모님을 뒤따르는 것이 가장 분명한 방법일 겁니다. 하지만 섣불리 습격하거나 접근하지는 않겠습니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허열은 남성우의 은퇴 이후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만한 충성과 용맹을 가진 부하는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락 부장이 직접 선발하여 보낸 이 박상남이라는 낯선 요원은 능력면에서만은
남성우를 한 발 앞서 있었고, 남성우보다도 훨씬 신중하고 치밀해 보였다.
"죄송합니다만, 일단 사모님을 미행하며 두 사람의 접선을 지켜볼 작정입니다. 사모님의 진심이 무엇인지도
궁금하구요. 만일 유인에 성공만 한다면 이번 작전은 1백 퍼센트 승리로 끝날 겁니다."
백수웅과 노옥진의 관계.
허열이나 남성우의 믿음대로 두 사람 간에 불륜의 관계까지는 없다고 하지만, 박상남은 믿고 싶지 않았다.
그의 뛰어난 후각이 '결백'을 의심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좋다. 그러면 나는 에메랄드 회담장 설치와 위장 경비에 최선을 다하겠다.
그대는 아내에게 밀착하여 뒷조사를 하도록 하라."
업무 분담이 끝났다. 양공 작전으로 돌입하는 새로운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 때 현관으로부터 누군가가 찾아왔다는 연락이 왔다. 정문 경비실의 인터폰이 연결되었다.
"막무가내입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한 분이 꼭 뵙겠다구요."
"나를?"
"네, 성명도 직업도 직접 말씀드리겠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좋아. 바꿔 봐."
허열이 수화기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접니다. 허 검사님."
갑작스러운 방문객의 출현.
허열은 긴장한 채 수화기를 통해 들려 오는 사내의 목소리를 들었다.
"허 검사님, 접니다. 이태일."
"네? 이태일?"
"네, 총무국의"
총무국 이태일. 그 때서야 의문이 풀렸다. 중앙정보부 총무국 차장 이태일이 찾아온 것이다.
신분 밝히기를 몹시 꺼려하는 인물이며, 장인 노범호의 추천으로 출세한 행정가이다.
"좋소. 올라오시오."
허열은 박상남 요원을 옆방으로 보냈다. 맞부딪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잠깐만 피해 있도록 해. 찾아온 이유가 있을 테니까."
박상남이 옆방으로 옮겨 간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사무실문이 열리며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어서 오십시오, 차장님."
"계셔서 참 다행입니다."
이태일은 얼굴이 몹시 굳어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계하는 빛이 역력해 보였다. 허열이 의자를 권하자,
겨우 엉덩이만 걸친 채 계속 불안한 표정을 보였다.
"절 찾아오신 용건이 뭐죠?"
"네 이거 정말 뭐라고 말씀드려야"
"말씀하시오."
"저 사실은 지난 토요일 사모님께서 절 찾아 오셨었습니다."
"뭐라구요? 집사람이?"
허열은 의외의 보고에 깜짝 놀랐다. 아내가 정보부 사람을 찾아갔다.
"그래서요? 무슨 일로 갔었습니까?"
"그게 사실은 비밀에 부쳐 달라고 하셨지만"
"빨리 말씀하세요."
"네. 대통령 각하 사진과 김일성 사진, 인공기를 달라고 하셔서 드렸습니다. 꼭 필요하다고 하셔서요."
"대통령 각하 사진과?"
"네. 용도를 여쭈어 보았지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도 비밀을 지켜 드리죠. 위에 보고는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까짓 사진 두 장과 깃발인데요. 더구나 허 검사님의 사모님에,
노 회장님 따님이란 신분이 있어 믿고 드린 겁니다."
절대 비밀에 부치라는 엄명을 내린 다음, 허열은 이태일을 돌려 보냈다.
옆방으로 피신했던 박상남이 상기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들었지?"
"네, 검사님."
"도대체 무슨 뜻인가? 아내가 각하 사진과 김일성 사진, 인공기를 얻어 가다니"
"죄송합니다. 보고는 내일 드리겠습니다. 검사님은 사무실에서 꼼짝도 하지 말고 기다려 주십시오.
중요한 단서가 될 것 같습니다."
"아니, 나도 가겠어."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오늘 일은 제게 맡기십시오. 이 곳을 지키고 계십시오. 늦더라도 보고 올리겠습니다.
만일 자정이 넘으면, 임시 숙소로 쓰고 계시는 엠배서더 호텔로라도 보고드리겠습니다."
박상남은 책상 속의 권총을 꺼내 가슴에 단단히 찔러 넣었다.
그리고 우이동 허열의 집을 향해 달려갔다.
허열의 아내는 박상남을 알아보지 못한다. 오늘은 그녀를 미행할 생각이었다.
박상남의 판단은 이러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의 사진, 인공기를 얻어 갔다면, 틀림없이 제3의 회담장을 만들려는 것이다.
그것은 노옥진이 백수웅으로 부터 받는 협박을 피하려는 의도이며, 어떻게든 백수웅을 회담장으로부터
격리시켜 보호하려는 행동이다. 틀림없이 두 사람은 깊은 관계이며, 아직도 서로 아끼고 있다.
그녀는 오늘 백수웅을 만난다.' 한 치의 빈틈도 없는 판단이다. 그런 추리는 이미 허열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허열은 뛰어난 머리와 전략은 갖추었어도 백수웅과의 맞대결에서는 절대불리하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그는 성급하게 백수웅을 향해 돌진할 것이고, 또다시 놓쳐 버리거나
오히려 다칠지도 모른다. 일대 일의 무력 대결은 허열에게 상처만 줄 것이다.
박상남은 그런 뜻에서 허열을 떼어 놓았고, 그의 아내 노옥진을 미행키로 한 것이다. 단 한 가지,
노옥진이 벌써 외출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으나, 허열의 집 앞 구멍가게(사실은 백수웅의
실질적인 은신처)에서 주인 여자를 통해 전화한 결과, 아직도 외출하지 않고 있어 다행이었다.
그는 술을 마시는 척하며 구멍가게 주인 여자에게 듬뿍 웃돈을 얹어 주고 시간을 보냈다.
세 시간이 지나고 오후 6시가 되어서야 노옥진이 모습을 나타냈다. 자신의 승용차를 이용하지 않고
택시를 이용했기 때문에, 지프를 몰고 온 박상남은 노옥진을 미행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노옥진은 구의동 워커힐 입구에서 내렸고, 다방에서 1시간 20분올 보낸 뒤 7시 40분쯤 혼자 터덜터덜
워커힐 입구로 걷기 시작했다. 박상남은 숲 속에 몸을 감춘 채 그녀의 뒤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노옥진은 신학 대학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며 시계를 들여다보았고,
박상남도 기계적으로 손목시계를 찬 팔뚝을 들어올렸다. 7시 48분이 지나고 있었다.
"음, 약속 시간은 8시다."
그는 긴장한 채 혼자 중얼거렸다. 오토바이에 귀신 같다는 정보를 입수한 터여서 더욱 긴장되었다.
오늘 밤 백수웅을 습격하거나 저격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목표는 단지 그의 은신처를 알아 내는 것이었고,
두 사람의 관계를 한번 더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 녀석이 멀쩡하게 나타날 리는 없다. 지금쯤 이 숲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뒤에서 불의의 일격을 가해 올지도 모른다. 기사키 하쓰요,
일본 경시청의 정보 요원(허열은 그렇게 알고 있었고, 그녀의 죽음을 박상남에게 말해 주었다.)을 일격에
죽여 생매장한 잔인한 놈이다. 박상남은 갑자기 권총을 뽑아 들고 획 몸을 돌렸다. 그러나 바람에 서걱이는
나뭇잎 소리와 위의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권총을 든 채 땅바닥에 잔뜩 몸을 밀착시켰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7시 58분. 노옥진의 초조해하는 모습으로 보아 약속 시간이 8시임은 이제 의심하지 않아도 좋다.
앞으로 2분만 지나면 백수웅이 나타날 것이다. 천하의 허열에게 번번이 실패의 쓰라린 상처를
안겨 주었던 사내. 긴장보다는 호기심이 앞서는 녀석이다. 그리고 보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 감히 노범호 회장 딸의 마음을 뒤흔들었을까. 무엇이 녀석의 장점일까. 그리고 지금 이 시간
두 사람은 어떤 감정으로 서로를 기다리고 있을까. 박상남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노옥진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녀는 채 1분을 견디지 못하고 계속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때다. 몇 대의 승용차가 지나간 뒤 대형 관광 버스가 저속으로 굴러 왔다.
일본인들의 시내 관광을 위해 워커힐에서 나오는 버스였다,
8시 20초 전, 대형 버스가 그의 앞을 스쳐 갔고, 엇갈리며 택시 한 대가 워커힐을 향해 지나갔다.
두 대 모두 단 1초도 멈추지 않았다. 권총을 움켜쥔 채 노옥진을 감시하던 박상남이 벌떡 일어났다.
당연히 서 있어야 할 노옥진이 귀신같이 사라진 것이다. 눈 뜨고 도둑맞은 것이다.
"그 녀석이 그 녀석이"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발을 굴렀지만 소용이 없다. 녀석은 이미 노옥진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촌놈식 방법에 당한 거야."
분통이 터졌지만, 늦은 것은 늦은 것이다. 그는 권총을 움켜쥔 채 어둠을 망연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백수웅은 정문에서 때마침 달려나가는 관광 버스를 발견했다. 도로를 중심으로 야산 위쪽은
이미 사전 수색을 마쳐 잠복 병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도로 아래쪽 숲은 뒤져 보지 못했다.
미행자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뒤쫓는 자가 있다면 여간 불편하지가 않을 것이다. 노옥진과의 시간을
빼앗길 수는 없기때문 이다. 관광 버스는 적절히 이용되었다. 버스 옆에 잔뜩 달라붙어 가다가 길에 서 있는
노옥진을 낚아챈 뒤 다시 버스의 보디옆을 따라 구의동까지 내려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노옥진이 발악하듯 소릴 질렀다.
"나는 방심하지 않아."
워커힐 입구로와 구의동이 만나는 길에서 노옥진을 내려 뒤의 좌석에 앉혔다. 그리고 워커힐 후문이 있는
광장동으로 돌아 엉뚱한 길을 이용하여 다시 온실로 갔다. 오토바이를 대형 화분 사이에 숨겨 놓고,
열쇠로 온실 문을 열었 다. 싱그러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기가 백수웅 씨의 은신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 곳은 남편 허열이 에메랄드를 접수하여 위장 회담장으로 만들고 있는 워커힐이다.
"그래, 여기 취직했지. 잡부로 말야. 일본에서 배운 모든 것들이 아주 요긴하게 활용되고 있어."
그는 몸을 돌려 온실의 문을 걸어 잠갔다.
전 워커힐의 관상수와 화초를 관리하는 온실은 1백50평 정도 되었고, 희귀한 꽃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저 쪽 구석에 판자로 짜 맞춘 침대가 있었는데, 그것은 관리인용 같았다. 온실의 문을 걸어 잠근 백수웅은,
이번에는 천장에 달려 있는 백열구가 거추장스러웠는지 스위치를 내려 불을 꺼 버렸다.
그러나 외곽등의 불빛으로 내부가 제법 밝았다.
백수웅이 의자를 내밀었다.
"앉아."
"백수웅 씨,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노옥진이 의자에 앉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은 수척해 보여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오늘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없어. 부탁한 거나 알려줘. 네 딸 목숨이 걸린 문제니까."
"수웅 씨, 이런다고 성공할 거 같아요? 이후락 씨나 청와대측이 당신에게 당할 거 같아요?
제발 일본으로 돌아가요. 오늘은 여기서 밤을 새워도 좋아요."
"거짓말했군. 그럼 돌아가."
"안 돼요. 전 가지 않아요. 생각해 보세요. 왜 화약을 들고 불속으로 뛰어들려고 해요? 무모한 짓이에요.
그리고 이건 애국도 아니에요, 이 부장이나 박성철을 테러한다고 쳐요. 그래서 그들이 희생당한다고 치자구요.
그 다음엔 뭐가 오죠? 당신이 말하는 이 땅의 유토피아? 아니에요. 전쟁이에요, 전쟁.
그 전에 당신은 죽음을 맞구요. 그게 유토피아인가요?"
"정보나 빨리 말해!"
"당신 아버지가 전쟁통에 보람 없이 돌아가셨죠? 그런데 이번엔 또 어떤 백수웅을 만들려고 이 짓이에요?
이 땅에서 백수웅 당신 하나만이 희생당한 게 아니에요. 그래도 다들 버티며 살고 있어요.
그건 목숨 때문이죠. 또 다른 어린 아이들을 제2의 백수웅으로 만들 작정인가요? 이게 당신이 부르짖던
애국인가요? 그래요. 아버지는 당신 말처럼 민족의 혼을 일본에 팔아먹었어요. 한데 당신은 조국과
민족을 전쟁의 악마에게 팔아먹으려 하고 있어요. 제발 정신좀 차려요."
"철썩!"
백수웅의 손이 기어이 노옥진의 뺨을 갈겼다.
"내가 살아 남을 확률은 없어. 제로야. 하지만 반드시 폭로하고 고발할 게 있어. 그건 이번 회담의
'위선' 이야. 통일을 위한 회담이 아니라, 분단을 고착시켜 남 . 북 양쪽에서 모두 장기 집권하자는
그런 치사한 약속을 하는 회담이란 말이야. 전쟁이 터지면 더욱 좋지. 어차피 환부는 잘라 내야
새 살이 돋는 법이니까. 나는 그 치료를 위해 죽으려는 거야."
"그런 생각이라면, 언론에 폭로해 버리면 되잖아요."
"넌 아무것도 몰라. 이 사실, 회담이 개최된다는 사실을 폭로하면 평양에서는 아무도 안 와.
극적인 효과가 없으니까. 그래서 나도 극적인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려는 거야."
"참아요. 나라 일은 당신말고도"
"나말고도? 그럼 노범호나 이후락 같은 사람한테 맡겨 두란 거야?
안 돼. 박성철, 김일성, 박정희, 이후락 모두 안 돼."
노옥진은 뺨을 얻어맞고도 외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아무리 폭력을 행사해도 백수웅의 속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며, 이번이 마지막 설득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치는 정치가에게 맡겨요. 야당도 있으니까 그 쪽에 말하든지. 제가 신민당 총무 김영삼 씨를 만나겠어요.
제 부탁이라면 생각하실 분이에요. 당신의 뜻을 전해 드릴게요."
"나는 야당 편도 여당 편도 아냐. 대다수 침묵하며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 편이야.
자, 쓸데없는 시간 보내지 말자구. 아까 때린건 용서해 줘. 그리고 약속한 정보나 주고."
" "
"더 이상 나를 설득하려 들지 마. 이미 내 결심은 확고 부동하니까."
노옥진은 잠시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러다가 떨리는 손을 핸드백에 집어넣어 필름을 한 통 꺼냈다.
"그건 사진 필름 아냐?"
"네, 회담장 준비한 거 몰래 찍어 왔어요. 흑백이니까 직접 현상하면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온양에 있어요. 읍내를 지나 도고(道 高) 쪽으로 1킬로미터쯤 가면 왼쪽 산중턱에 있는
빨간벽돌 양옥식 집이죠. 거기예요."
"온양?"
"네. 충남에 있는."
"날 속이려는 거지? 아냐, 회담장은 여기 워커힐에 있는 에메랄드나, 아니면 영빈관 둘 중 한 곳이야!"
"뭐라구요?"
노옥진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주 정확히 잡아 냈다. 도대체 정부 요인들도 모르는 회담을
어떻게 알았으며, 겨우 결정된 장소를 어떻게 알아 냈단 말인가. 그녀는 백수웅이 두려워지기 시작 했다.
이 정도 솜씨라면 정말 테러에 성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아 아네요 백수웅 씨. 그 곳은 ,그 곳은 당신을 현혹하기 위한 위장 장소예요. 제발 이러지 좀 말아요."
"믿을 수 없어."
"철썩!"
이번에는 노옥진이 백수웅의 뺨을 갈겼다.
"내겐 나라보다도, 이후락 부장이나 박성철보다도 미라가 제일 중요해요. 당신은 엄마의 마음을 몰라요.
만일 전쟁이 나면 나는 부엌칼이라도 들고 가 쌀을 훔칠 거예요. 미라를 먹여 살려야죠.
새끼가 세상에서 제일 귀한 거예요. 내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이 짓을 했는지 알아요?
다 미라, 내 딸 때문이라구요."
그녀는 기어이 손으로 입을 막으며 흐느끼기 시작했고, 백수웅은 필름을 손에 들고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그는 노옥진의 들먹이는 어깨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용서해 줘. 옥진이를 괴롭히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니까. 내가 죽으면 모든 걸 알게 돼.
하지만 절대 혼자 죽지는 않는다."
"안 돼요, 으흐흐 백수웅 씨, 당신은 죽으면 안 돼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당신이 살 길을 마련해 볼게요."
"아냐. 내 꿈은 이 땅의 유토피아야. 내 꿈을 잃지 않게 해 줘 그래, 일자는?"
"29일이에요."
노옥진은 백수웅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들어 백수웅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백수웅은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명문의 외동딸이 재산 한 푼 없는 자신을 사랑했다는 죄(?) 하나 때문에
지금까지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여인. 어쩌면, 어머니를 제외하면 세상에 태어나서
유일하게 사랑했고 사랑받았던 여인. 그러나 오늘로써 이 얼굴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백 수웅은 두 손으로 노옥진의 턱을 받쳐 들었다.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백수웅의 두 눈에서도
뜨겁고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옥진 정말 마음놓고 불러 보고 싶었던 이름이야 세월은 정말 꿈 같아.
아마 오늘 이후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못하게 될 거야."
그는 노옥진의 얼굴을 향해 고개 숙였고, 노옥진은 눈을 감았다.
따뜻한 볼에 입술이 닿았고, 감은 노옥진의 눈에서도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노옥진은 마음 속으로 하느님께 기도했다.
'하느님, 이 불쌍한 젊은이들의 영혼을 위로해 주세요. 정말 힘들고 고독한 사람들이랍니다.
그리고 백수웅 씨 목숨을 지켜주세요. 마음을 돌려 주세요. 정말 이 사람은 죽기를 각오한 것 같아요.
살려 주세요, 네? 하느님'
노옥진의 입술을 찾으며 허리를 껴안던 백수웅이, 갑자기 손을 풀고 문을 향해 후닥닥 달려갔다.
어둠 속에서 한참이나 두리번거리던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되돌아왔다.
"고맙다. 필름을 보고 내 행동을 결정하겠다. 빨리 이 곳을 떠나. 누군가가 엿보고 있었어."
그는 노옥진을 온실 밖으로 밀쳐 낸 뒤, 오토바이에 오르더니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너무나 순식간의 일이었다.
혼자가 된 노옥진은 쥐죽은듯 조용한 숲을 돌아보며 좁은 돌계단을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엿보고 있었다고? 난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데'
택시가 줄지어 서 있는 워커힐 본관까지 걸어가 택시에 몸을 실었다.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운 시간이었지만,
다소의 소득은 있었다. 태극기와 인공기가 나란히 놓여 있는 테이블 사진이나 박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는 벽면의 사진을 확인하고, 백수웅은 틀림없이 온양을 향해 달려올 것이다.
반쯤은 사태가 해결된 셈이며, 나머지 부분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고 그녀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녀가 탄 택시가 천천히 출발하자, 저 뒤에 있던 지프 한 대가 반대 방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프.
그 속에는 백수웅을 뒤쫓던 박상남이 타고 있었다. 숲 속에 숨어 노옥진을 감시하던 중
불과 20초 사이에 귀신처럼 증발된 노옥진의 그림자에 망연 자실하던 박상남이었다.
8시 정각을 불과 20초 남겨 놓고 지나가는 관광 버스 뒤에 숨어 달려나온 백수웅, 그가 노옥진을 낚아챘다고
판단했을 때는 이미 오토바이도 백수웅도 노옥진도 모습을 감춘 지 오래 되었다.
'어디로 갔을까?'
그의 두뇌가 기계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는 지금까지 어디 숨어 있었을까?'
그는 역(逆)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백수웅이 출발한 곳은 틀림없이 워커힐 내부다.
그가 워커힐에 은신해 있을 가능성은 50대 50이다. 머리 좋은 백수웅이라면, 우리 나라에서 남북 회담을
할 만한 장소로 워커힐을 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구의동 입구에
세워 놓은 지프를 향해 단거리 선수처럼 달려갔다. 숨도 고를 새 없이 시동을 걸고 광장동 워커힐
후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 자는 워커힐에 있을 것이다. 정문을 통해 들어갔다고 볼 수 없다면, 틀림없이 후문을 이용했을 것이다.'
후문에는 두 평짜리 외곽 초소가 있고, 이 곳 을 지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다.
그는 경비실 앞에서 차를 세웠다.
"이봐요, 경비 아저씨."
후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 박응열이 달려나왔다.
"조금 전 오토바이 한 대 들어가는 거 못 봤소?"
"오토바이요? 두 대가 들어갔는데요."
"두 대?"
"네. 한 대는 우리 구내 식당에 계란을 납품하는 업자 것이고,
또 한 대는 웬 여자를 뒤에 태우고 들어갔어요. 드라이브하는 데이트족 같던데요."
오토바이가 들어간 시간대와, 버스 때문에 노옥진을 놓친 시간대가 어지간히 맞아들어갔다.
더구나 뒤에 여자를 태웠다면 그건허열의 부인이 틀림없다.
"만일 밖으로 나가는 오토바이가 있거든 시간을 정확히 알아놔 주시오. 정문에 연락해서 마찬가지로 일러 놓고"
그는 신분증을 보여 주었다.
중앙정보부 요원임을 안 경비가 깍듯이 경례를 붙인 뒤 정문으로 부지런히 전화를 걸었다.
박상남은 차를 끌고 위커힐 도로를 일제히 점검했다. 그런데 본관 뒤의 관리 사무실 광장에 서 있는,
계란 박스가 매달려 있는 소형 오토바이 외에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다시 본관으로 올라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명월관 아래에 있는 대형 온실을 기억에 떠올렸다. 그 곳 말고는 전부 점검한 상태다.
그런데 명월관에서 온실을 내려다보던 그는 크게 실망했다. 온실이 불 하나 켜져 있지 않고
완전히 어둠 속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려가 온실 가까이 다가갔고, 거기서 어렴풋한 두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부가 어두워 도무지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었다. 마치 타인의 연애 장면이라도 훔쳐 보는 듯한
야릇한 기분으로 온실을 향해 접근해 갔다.
그림자가 조금 뚜렷이 보였다.
두 남녀는 무엇인가 격렬히 말을 주고받는 것 같은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생각다 못한 박상남은 주머니칼을 꺼내 온실의 비닐을 찢어 내려갔다.
구멍이 뚫리면서 두 사람의 윤곽이 보다 더 분명해졌다.
백수웅과 노옥진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난번 실패한 남성우나 허열처럼 무모하게 뛰어들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더 듣고 싶었다.
이 때, 갑자기 여자가 남자의 뺨을 때렸다. 두 사람은 또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이윽고 서로 끌어안았다.
박상남으로서는, 알고 싶은 정보는 대략 입수된 셈이었다. 백수웅은 워커힐 온실에 은신해 있다.
그것은 이 곳 잡부로 취직해 있다는 뜻이다. 백수웅이 끌어안고 있는 노옥진은
백수웅은 이미 몇 번 만난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박상남은 몇 번이나 가슴에 매달려 있는 45구경 콜트 권총을 꺼내고 싶었지만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실패할 경우, 백수웅은 허열의 아내를 인질로 삼을 것이며, 한 방에 꺼꾸러뜨리지 못할 경우,
인질에게 생명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이 때다. 한 발짝 움직이려는데, 바닥의 자갈 때문에 옆으로
약간 미끄러져 버렸다. 후닥닥 백수웅이 튀어나왔고, 이어 그는 노옥진을 끌어 내 놓고
혼자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노옥진이 택시를 타고 떠나는 것을 확인한 뒤, 박상남은 비로소 지프를 몰고 허열이 기다리는
장충동 수사 본부로 돌아왔다. 허열은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박상남이 돌아오자,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내를 뒤쫓았나?"
놀라운 추리력이었다.
"네."
박상남은 짧게 대답했다.
"앉지 아내와 백수웅이 만나던가?"
"네, 만났습니다."
"그럴 줄 알았지. 아내는 틀림없이 백수웅에게 회담에 관한 모종의 정보를 제공했을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박상남은 할 이야기와 하지 않아야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이야기했다는 말은 끝내 입 속에 감추어 두고 말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아내와 백수웅의 접선, 그리고 정보부에서 얻어 간 사진과 깃발에 대해서"
" "
"내 생각엔, 백수웅은 제3의 장소로 이동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돼."
박상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밤 녀석을 공격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습니다만 참았죠.
첫째, 사모님이 피해를 당할까봐 걱정이 되었구요, 다음은 녀석의 은신처를 알아 냈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은신처?"
"네. 녀석은 워커힐에 잡부로 취직해 있었습니다."
백수웅의 은신처가 워커힐.
'그렇다면 아내와 백수웅의 만남은 오래 전부터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허열은 오해하고 있었다. 백수웅이 워커힐에 침투한 이유는, 자신이 만든 가짜 회담장,
즉 에메랄드의 병력 배치도가 백수웅에게 넘겨졌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다시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과 아버지(노범호)의 목숨이나 장래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다시 백수웅에게 미쳐 버린 것이다.
"쏘아 죽여 버리지 그랬어. 아내가 테러리스트와 밀회하다니."
그는 불쾌한 듯 박상남을 향해 고함질렀다.
"사모님께서"
"아내는 적과 내통하고 있었어. 나를 배신한 거야."
그는 흥분을 못 이기겠는지 줄담배를 피우며 좌불안석이었다.
금방이라도 집으로 달려가 무슨 일이라도 저질러 버릴 것 같았다.
"허 검사님, 제 의견을 들어 보십시오."
새 담배를 입에 문 허열에게 박상남이 불을 붙여 주었다.
"사모님이 허 검사님을 배신하고 있다는 생각은 취소하십시오."
"취소?"
"네. 사모님은 백수웅에게 무엇인가를 격렬히 항의하고 있었습니다. 실제 백수웅의 뺨을 때렸고,
때로는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사모님이 왜 정보부에 들러 인공기와 김일성사진을
얻어 갔는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대가 튀어나간 후 나도 그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지.
혹 아내가 제3의 장소에 위장 회담장을 마련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사모님은 녀석에게 협박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녀석이 워커힐에 진을 치고 있다는 건, 아내가 위장 장소 가짜 정보를
액면 그대로 믿고 넘겨 주었다는 증거야."
"아닙니다."
박상남은 허열의 추리를 단호히 부정했다.
"사실은, 오늘 밤 저는 백수웅의 잔꾀에 넘어가 백수웅을 한번 놓친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오토바이를 이용해 워커힐에서 튀어나와 시내 쪽으로 튀었거든요. 하지만 저는,
그가 머리 좋은 놈이라면 회담장으로 워커힐을 꼽았을 테고, 그렇게 했다면 그 곳에 위장
취업하여 은신하고 있지 않을까 추리한 건데, 그게 맞아떨어진 겁니다.
녀석은 온실을 관리하는 부서의 잡부로 취직해서 그곳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흐-흠."
뛰어난 판단력의 소유자 허열! 그도 3개월간의 피 말리는 추적에 잠시 혼란을 일으킨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박상남의 정확한 진단을 높이 평가하고 짚었다. 남성우 후임으로는 너무나
믿음직스렵고 든든한 부하 영입이었다. 허열은 이후락 부장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렸다.
"아직은 사진이나 깃발의 용도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백수웅과
허 검사님 양쪽을 생각한다면, 사모님이 백수웅을 위해 움직인다고 보기는 힘든 형편입니다."
허열과 박상남은 탁자에 마주 앉아 그 동안 수집된 정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분석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백수웅은 회담장을 워커힐로 추리하고 있으며, 현재 그 곳에 위장 취업하고 있다.
(2)그는 아내를 끈질기게 위협하며 마지막 정보 입수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위협 대상은 딸 미라의 생명이다.
(3)노옥진은 제3의 회담장을 준비하고 있으며, 백수웅이 그 곳으로 유인될 가능성도 있다.
(4)옛날처럼 백수웅은 다시 오토바이를 취득하여 활용하고 있다
정보 입수는 분석으로 바뀌었고, 분석은 대책을 세우게 해 주었다.
"내일 병력 두 명만 주십시오. 최일우와 사격에 뛰어난 사람 하나면 됩니다."
"내일?"
"네. 오늘의 태도로 보아 백수웅은 저의 접근을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연애 장면을 숨어 보는
치한 정도로 생각한것이 분명합니다. 회사측에도 알리지 않고 내일 밤 습격하여 사살해 버리겠습니다.
아니면 생포하든가."
"우리 셋이 가자, 그대와 최일우, 그리고 내가 직접 나서겠다."
"만일 다치시기라도"
"죽고 사는 건 하늘이 결정해. 준비하지."
허열은 워커힐 에메랄드 경비 총책을 맡고 있는 최일우를 전화로 불러 냈다.
최일우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네, 접니다."
"내일 저녁 6시 작업복을 입고 무기를 휴대하라. 그리고 워커힐 명월관 정문 앞으로 출동하라.
나와 새로 부임한 박상남 요원과 합류하면 작전을 일러 주겠다. 내일이 D데이다."
"D데이라구요? 알겠습니다."
10년 이상을 콤비로 뛰었던 남성우와 최일우 최일우는 남성우의 피습과 은퇴에 이를 갈고 있었다.
남성우에 대한 복수심이 불같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박상남의 출현으로 한층
위축되어 있었다. 이번만큼은 백수웅은 누구에게도 넘겨 주지 않으리라고 거듭 맹세했다.
허열은 집으로 몇 번이나 전화하고 싶었지만, 박상남의 만류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화풀이라도 하는듯,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직접 하사한 콜트 코브라 권총을 꺼내 손질하기 시작했다.
"오래 기다렸다. 내일은 피 맛을 볼 것이며, 너는 오랜만에 목을 축일 것이다. 실수 없이 날려 보내라."
그는 증오하듯 총구를 닦고 또 닦았다.
콜트 코브라, 길이는 겨우 2인치. 무게는 16온스. 6연발의 자동 속사 권총이다.
근접 사격에 알맞은, 은빛 손잡이에 검은 총신이 아주 인상적인 미제 권총이다.
이 무기를 하사하신 이후락 부장님의 은혜에 보답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녀석의 가슴에 뜨거운 콩알을 박을 것이다.
저 쪽 구석에서 돌아앉은 박상남은 군용 권총인 콜트 45구경을 열심히 손질하며
격발을 연습하고 있었다. 긴장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첫댓글 제가 긴장이 되네요~~~ㅎㅎ 잘읽고 갑니다
이제는 박상남과 백수웅의 대결같네요
고맙게 잘봤읍니다~
즐감요 ~~
잘 읽고갑니다~~
감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