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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다음 텔존의 주몽 게시판에 드라마 주몽의 고증 문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제 글에 틀린 점이 있다면 가차 없이 지적해주세요.^^
역사적 기록에서의 소서노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왕 연타발의 세딸 중 둘째로 처음에 북부여(혹은 동부여)의 해부루왕(금와왕의 아버지)의 서손인 우태와 혼인하여 장자 비류와 차남 온조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우태가 죽고 홀로 과부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후에 추모성왕이 대소왕자들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여 부여를 탈출하여 나라를 세우기 위해 남쪽을 향해 달리다가 연타발왕이 있는 졸본 부여에 이르게 됩니다.
이 때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던 연타발왕은 추모성왕이 보통인물이 아님을 알고 마침 남편이 없었던 소서노와 혼인을 시켜줍니다.
비록 추모성왕은 부여에 만삭이 다 된 본부인 예씨가 있었지만,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소서노와의 일종의 정략결혼을 하게 됩니다. 소서노 또한 야망이 있는 여걸로 추모성왕과의 재혼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둘이 혼인을 할 당시의 나이는 소서노가 미중년의 32세였고 추모성왕은 패기만만하고 혈기왕성한 22세의 청년이었습니다.
원래 추모성왕이 고구려 건국의 터전으로 삼은 졸본부여 지역으로 왔을 때 그는 졸본부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외래 이주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소서노와의 혼인을 함으로써 토착세력 즉 졸본부여인들과의 마찰을 없애고 결국 연타발왕의 신임을 얻습니다.
후에 졸본 부여의 연타발왕이 승하하자, 왕위 계승권은 추모성왕에게 넘어가고 추모성왕은 왕위에 오르자,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자신의 고구려를 창업하는데에 있어 막대한 재물을 공급하고 내조를 잘한 소서노의 공을 인정하여 왕비로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우태와 소서노의 아들들이었던 비류와 온조를 자신의 친아들 처럼 대우합니다.
이렇듯 소서노는 아무런 밑천도 없던 추모성왕에게 투자를 하여 고구려 건국의 1등공신으로 치부해도 무방할 만큼 엄청난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부여에 남아 있던 본부인 예씨와 아들 유리가 증표를 가지고 추모성왕을 찾으러 고구려에 오자, 추모성왕은 크게 기뻐하며 유리를 태자로 책봉합니다. 그리고 소서노는 정실왕비에서 두번째 왕비로 밀려납니다.
아마 비류나 온조가 태자로 책봉 될 것을 예감하고 있던 소서노왕비와 그의 아들들은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소서노는 미모나 교태로 남자를 사로잡아 왕비가 된 여자가 아닌데가가 고구려는 예씨와 유리가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인 비류와 온조가 함께 세운 나라였는데 말입니다.
유리를 태자로 삼은 지 6개월 만에 추모성왕은 세상을 떠나고 소서노왕비와 그의 아들들은 입지가 매우 불안했을 것입니다.
왕위에 오른 유리명왕은 자신의 정통성과 왕실의 안녕을 위해 소서노들을 제거해야 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이 때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있습니다.
비류가 온조에게 말하길
"처음 대왕(추모성왕)께서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여기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소서노)께서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서 도와 고구려 건국을 이룩해 그 수고가 많았다. 대왕께서 세상을 싫어하시자(추모성왕의 죽음.), 나라는 유리의 것이 되었으니 우리는 한갓 여기에 붙어 있어 혹과 같아 답답할 뿐이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만 같지 않다"
라고 기록이 있습니다.
소서노 일행의 남하와 관련해 삼국사기와 조선상고사는 약간 다르게 적고 있습니다. 저는 그 둘 중에 조선상고사의 내용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지므로 조선상고사의 내용을 적겠습니다.
조선상고사에서 소서노는 추모성왕에게 유리명왕을 인정 하는 대가로 많은 금은보화(위자료?)를 챙긴 후 아들들과 자신들을 따르는 신하, 백성들을 데리고 마한땅으로 남하합니다.
마한 땅에 도착을 하자 소서노는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미추홀과 하북위례홀 등을 얻어 소서노가 왕호를 칭하고 국호를 백제라 합니다.
소서노가 61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후 비류와 온조는 상의하여 말하길
"서북의 낙랑과 예가 날로 침핍하여 어머니 같은 성스러운 덕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새 터를 보아 천도함이 가하다"
라는 대화를 합니다.
"어머니의 성스러운 덕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이니"라는 대목에서 우리는 소서노의 성스러움과 백제 창업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온조는 하북위례성으로 비류는 미추홀로 갈라섭니다.
어쨋든 소서노는 후에 만주, 한반도, 북경인근, 동몽골까지 세력을 뻗치는 대제국 고구려의 건국에 상당부분 일조하고서 한반도, 요서, 동남아, 일본열도를 아우르는 대해상제국 백제를 건국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는 여걸임에 틀림없습니다.
드라마 주몽에서의 소서노
드라마 주몽에서는 소서노를 여걸로 묘사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크게 공감하는 바가 많기 때문에 비판을 하지 않겠습니다. 아, 제가 공감해서라기 보다는 역사적 사실이 그래서 그렇다는 표현이 더 맞겠군요.
그럼 드라마에서 소서노라는 인물의 설정에 대해 비판을 해보겠습니다.
우선 드라마에서의 소서노와 추모성왕의 나이 차이는 10살이 아니라 10달입니다.
10이라는 숫자만 같을 뿐 나이 차이 왜곡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민약에 저승에서 소서노께서 자신의 나이를 10살이나 줄인 이 드라마 주몽을 보신다면 퍽이나 좋아하시겠습니다 그려...-_-
본래 소서노라는 인물을 한마디로 압축해서 표현한다면 돈많고 아이 둘 딸린 야심찬 중년의 여걸입니다.
그런데 드라마 주몽에서 과연 비류와 온조를 등장시킬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추모성왕과 소서노와의 드라마에서 말하는 것처럼 운명적 사랑이었을까요?
결론 부터 말하자면 절대 아닙니다.
Never!! No!!
단도직입적으로 정치적 야망과 재물로 시작해 정치적 야망과 재물로 끝나는 사이입니다.
그 둘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만났던 것입니다.
막말로 소서노에게서 볼 일 다본 추모성왕은 유리를 태자로 책봉함으로써 소서노의 뒤통수를 치고 열받은 소서노는 고구려에서 뛰쳐너와 백제를 세우게 된 것이지요.
최대한 객관적으로 여러가지 사료를 보고 내린 결론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 보이겠습니다.
소서노는 남하하기 직전에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유리태자를 인정하는 대가로 추모성왕에게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이혼 위자료를 받습니다. 마치 계약이라도 한 것 처럼 말이죠.
드라마에서 처럼 정말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치고는 추모성왕과 소서노의 태도가 너무 계산적입니다.
황조가의 주인공인 유리명왕과 치희와의 같은 이별할 때의 애절함은 더더욱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도 없고요.
결국 드라마의 설정 처럼 운명적 사랑은 아니란 말이지요.(소서노가 진정 사랑한 인물에 관해서는 다음편에서 쓰겠습니다.)
PS: 저의 글을 보고 많은 분들이 욕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비방, 비난이 아닌 정당한 비판을 듣기 원합니다. 비판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단 욕, 비방, 비난은 사절입니다.
그리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인데, 너무 고리타분하다는 말도 있을 것 같은데, 이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가 아닙니다. 제작진이 말하길 철저한 고증과 고구려 역사 제조명과 중국의 역사 왜곡을 막기위한 대작이라고 취지를 밝힌 바 있습니다.
차라리 태왕사신기 처럼 고증은 신경 안쓴다. 갑옷은 로마식 판갑으로 할 것이다라고 홍보하고 다니면 아무런 비판 안합니다.
참고 사료: 삼국사기, 삼국유사, 조선상고사, 수서, 북사, 위서
첫댓글 저는 사극은 어느정도 허구로 이루어질수 있다고 생각 하는 사람 입니다만 남녀간의 로맨스로 치우치는건 반대 합니다
소서노의 나이와 캐릭터라... 그정도는 작가의 자유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도 그정도는 우려할 일은 아닌듯...오히려 한사군과의 관계를 그려 놓은 모양새가 더 걱정...
좋은글입니다. 저 둘은 다분히 계산적으로 만나서 계산적으로 헤어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