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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특집 ─ 시의 공간 : 충북 옥천
그리움, 가난, 도피 그리고 향토의 재인식
―─충북 옥천
박성필
1. ‘향수鄕愁’의 땅, 옥천을 찾아서
1923년 3월의 어느 날, 정지용의 마음속은 복잡했을 것이다. 그날 그는 현해탄을 건너는 배에 몸을 싣고 있었다. 정지용은 일본의 교토에 위치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 입학하기 위해 뱃길에 올랐던 것이다. 여느 유학생의 심정처럼,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는 설레임에 그의 가슴도 쿵덕거리고 있었을까? 그러나 그날 정지용의 마음이 들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시를 쓴 지 4년 후인 1927년 3월, 『조선지광朝鮮之光』 65호에 발표한 시 「향수鄕愁」를 통해 그날의 심정을 이렇게 드러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향수鄕愁」 부분
그렇다. 그날 정지용의 가슴은 쿵덕거리기는커녕 오히려 고향을 그리는 애잔한 곡조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저 마지막 한 줄만으로 나눌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그런데, “1923.3”이라고 밝혀둔 이 시의 창작 시점은 우리에게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전해주고 있는 듯하다.
우선, 정지용은 이 시의 모든 시어들이 향하고 있는 한 곳 옥천沃川이라는 공간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던 시점에 이 시를 썼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현해탄을 건너며 이 시를 읊조렸던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라는 정지용의 원적原籍이 위 시의 공간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지만, 그는 옥천이라는 공간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곳을 그려냈다. 당시의 그에게 옥천은 ‘향수’의 공간임과 동시에 새로운 세계를 향하고 있는 한 인간의 불안을 달래줄 ‘안식처’이기도 했다. 하여,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반복되는 시구는 고향 옥천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임과 동시에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절규로 읽히기도 한다.
한편 정지용이 1923년에 고향인 옥천을 그린 시를 썼다는 점은 공간적 거리 외에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바로 시간적 거리다. 이 시를 쓴 때는 정지용이 옥천을 떠나온 지도 만 5년이나 흐른 시점이었다. 1918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이후 그는 줄곧 도시 공간인 경성京城에서 생활하며 근대를 향유하였다. 게다가 이 시의 습작이 근대의 한 본류를 향하는 뱃머리에서 이루어졌다는 점까지 감안해보면, 그가 이토록 향토적인 시를 썼다는 사실은 조금 뜻밖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근대를 향한 시·공간 속에서 이러한 향토시를 씀으로써, 또 끈질긴 천착에서 비롯되었을 시어의 발굴을 통해 현대시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렇게 되어 우리는 다분히 향토적 공간인 옥천이 ‘조선 최초의 모더니스트’를 낳은 공간이 되는 역설적 상황을 목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 빈농의 땅, 혹은 농지의 명맥
오늘에 이르러 우리는 옥천을 ‘향수의 고향’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옥천은 오랫동안 잊혀진 공간이었다. 정지용이 그 시를 썼던 당시만하더라도 그곳은 상당히 낙후된 지역이었다. 옥천은 조령산맥이 남서쪽으로부터 동북방향으로 이어지고 죽령산맥이 동서에서 남북으로 굴곡을 형성하며 길게 뻗어나가는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일제 강점기의 사료들을 두루 검토해보면, 당시의 많은 지역들이 그러했지만 옥천 역시 소읍小邑의 면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길은 험준했고, 대다수의 지역민들은 농업에 종사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서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또, 그러한 사정은 문화적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지용의 작품들이 해방 공간에서 규제되면서, 아니 1988년 해금조치가 내려지기 전까지 옥천은 이념의 뒤안길에 가려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옥천이라는 문학적 공간은 소설가 유승규의 작품을 통해 흔적이나마 찾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담속 담속 악착스럽게 되어 넘기는지 눈에서 생열이 나서 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읍내에서 말질에 뽑인다는 덧니배기라고는 하지만 그 말질하는 수법이 그렇게 능숙하고 무자비할 수가 없었다.
수북이 쏟아놓은 볏더미에다 말을 푹 질러서 말을 일으켜 세울 때 한손으로 벼를 꾹 누르며 말을 콕 굴러 세우는 솜씨도 번개같이 눈치챌 수 없는 솜씨였지만 일단 말을 세워놓은 다음 무려 네댓 번이나 끌어올려, 그냥 끌어올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끌어올릴 때마다 누르기 때문에 실상 말 안에 보다 위에 오르는 벼가 더 많은 편이었다.
“저, 저 말질을 저렇게 하― 참.” 첨지는 덧니배기가 벼를 끌어올려 누를 때마다 안타까워서 이렇게 혼자 애가 달았지만 그 이상 내놓고는 한 마디도 못 했다. 이미 부족한 것은 뻔한 일인데 과연 얼마나 모자랄 것인가 하고 점점 줄어드는 볏더미를 어림잡아 가슴을 죄었다. 헌데 예상보다 부족양은 너무 많았다. 한 가마에 한 말씩 다섯 말이나 모자라니 말이었다.
―─유승규, 『농지』 부분
유승규는 『농지』를 비롯한 다양한 소설들을 통해 우리 농민 반세기의 수난사를 생생히 형상화해냈다. 위 인용문에는 갖은 수탈 속에서 민중들이 근근이 버티며 살아가는 모습이 담겨있다. 특히 위에 인용한 부분에서는 소작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마름─지주를 대리하여 소작권을 관리하는 사람─의 중간착취를 그리고 있다. 이러한 착취는 극복해야 할 현실이 아니라 차라리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었을까. 『농지』 속의 농민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다 못해 압록강을 건너 표랑 생활을 하는데, 이는 유승규의 실제 삶과도 유사한 점이 많다.
그는 옥천 북면에서 출생하였는데, 26세 되던 1945년부터 북과 만주 등지를 방랑하며 독자적인 문학수업을 했다. 유승규는 등단작인 「빈농」을 비롯하여 「농토」, 『흙은 살아있』 등의 작품을 썼다. 그 작품들의 제명만 보아도 그가 지향했던 문학관이 무엇인지는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문학관은 오롯이 빈농의 땅 옥천에서 싹튼 것다. 다시 말하자면, 옥천은 유승규에 의해 빈농의 땅 중 하나로 그려졌고, 옥천은 『농지』를 통해 문학적 명맥을 여리게나마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3. 베스트셀러 현상과 향토성의 재인식
방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옥천은 정지용의 「향수」를 통해 조금이나마 세상에 알려졌다가 해방 공간에서 다시금 잊혀져갔다. 다른 한편에서는 유승규라는 이름을 통해 문학적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옥천이라는 문학적 터전은 매우 미미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옥천이 다시금 문학인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였다. 1980년대 옥천이 다시금 부상한 것은 정지용의 작품에 대한 해금조치가 내려진 것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것 외에도 옥천이 베스트셀러 현상의 한 터전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향토성을 재인식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3.1. 베스트셀러 현상의 한 터전
‘향수의 고향’ 옥천이 오랫동안 망각되고 있는 동안 서점가에서는 괄목할만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른바 ‘베스트셀러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혹자는 ‘독자들의 시대적 요청’이라 말했고 또 다른 이들은 ‘대중취향적’이라며 폄하했다. 그 현상의 중심에 서 있던 두 사람이 서정윤과 도종환이었는데, 그중에서 도종환이 옥천과 맺게 된 인연은 실로 기구하다. 도종환은 ‘분단시대’ 동인들의 공동시집 『분단시대 판화시집』에 「접시꽃 당신」, 「병실에서」, 「암병동」 등 5편의 시를 실었다. 그 중 한 편을 살펴보자.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도종환, 「접시꽃 당신」 부분
문학이론 중에 ‘독자수용이론’이란 것이 존재하듯, 읽는 이에 따라 작품은 얼마든지 달리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석의 차원이며, 다양성의 차원일 뿐이다. 그런데 바로 위의 시가 문제가 되었다. 당시 교사였던 도종환은 충북도교육청의 모 장학사로부터 조사를 받게 된다. 그 장학사는 이 「접시꽃 당신」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누군지를 집요하게 캐물었다고 한다. 암투병 끝에 숨진 아내가 있는 도종환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기도 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일이다. 그저 1980년대 권력의 속성이었다고만 말해두자. 여하튼 그러한 조사 끝에 1986년 초, 도종환은 자식 두 명을 청주에 남겨두고 옥천의 한 중학교로 좌천된다. 그는 옥천의 자그마한 하숙방에서 홀로 기거하며 문제가 되었던 “죽어가는 사람”인 아내를 떠올리며 다수의 시를 썼다. 도종환의 고향이 옥천은 아니지만, 옥천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도종환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현상에 관한 말이 나온 김에 시인 한 명을 더 이야기 해두자. 바로 류시화이다. 그는 옥천에서 출생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자연에 대한 인식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그 인식의 폭을 넓혀갔다.
그것이 내 안에 있다
어지러운 풀냄새가 나는 것으로
그것을 알았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이미 내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나는 그것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일종의 모래장미라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그 무엇
나는 들판으로 걸어갔다 내 현기증이
다만 풀냄새 때문이라고
곧 사라질 것이라고
열에 들떠 내가 손을 뻗자
강 하나가 둥글게 뒤채이기 시작했다
―─류시화, 「엉겅퀴풀에게 노래함」 부분
류시화는 한국의 시단에서 독특한 존재이다. 그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박덕규, 이문재, 하재봉 등과 함께 <시운동> 동인으로도 활동한 바 있지만, 민중적이며 저항적 성격의 작품을 지향했던 당대 문단의 흐름과 달리 신비주의 세계관의 작품을 쓰며 문단에서 자연스럽게 멀어져갔다. 그에게 시인 외에 명상가, 출판기획자, 번역가 등의 다양한 직함이 붙는 동안 대중과 문단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그의 다양한 저술 활동은 언론과 문단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비판을 받았지만, 첫 시집 『그대가 있어도 나는 그립다』에 이어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며 그는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물론 언론과 문단이 유독 그에게‘만’ 매정하게 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또한 그의 시에도 얼마쯤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그의 시, 특히 초기 시에는 향토적이며 서정적인 면모가 많이 담겨 있다. 위에 인용한 「엉겅퀴풀에게 노래함」이나 「유서, 나는 평민이었습니다」 등의 시들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사유가 “풀냄새 때문”이라는 점을, 그리하여 그것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것에서 일찌감치 도망쳐(?) 버렸는지도 모른다.
3.2. 향토성의 재인식
도종환이 우연 혹은 강제에 의해 옥천에 정착했고 류시화가 태생적으로 갖게 되고 길렀을 향토적인 면모를 스스로 벗어던져 버렸다면, 그들과 달리 향토성을 적극 끌어안으려고 노력했던 시인들이 있다. 바로 윤중호와 박흥식이다. 윤중호는 스스로 근대성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하며 백석의 시나 신경림의 시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으나 췌장암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박흥식은 등단작인 「소의 눈」을 비롯해 『아흐레 민박집』에 실린 다수의 시편에서 향토성을 재인식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을 했다.
돌아가라 돌아가라
펑펑 내리는 눈 맞으며
금강에 서면, 고향, 저녁 안개 속으로
서걱대는 갈대 소리 들리고, 나는
많은 것을 버리고 살아왔지만
고향 강처럼 낮게 흐르지 못하고
뒷구리 늙은 감나무처럼, 허허허
굽어 웃지 못했다. 슬금슬금
완행열차만 서는 곳이지만
할머님은 돌아가시고, 객지에서 돌아온
경운이 형도 다시 객지로
떠나갈 채비만 하는 곳
―─윤중호, 「고향, 다시 강가에서」 부분
병주둥이 붕붕 울리며 철겹게 논다
그렇게 노는 게 좋다 한다
안 떠나는 게 좋아서 아흐레민박집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던
바람의 속살이 잠을 설쳐서
마냥 이 집이 끝내 좋다.
―─박흥식, 「아흐레민박집」 부분
윤중호나 박흥식이 향토성을 재인식한 데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결과였을까. 두 사람의 시에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향토의 삶에 대한 만족을 넘어 그곳에 머물 것을 권하는 시편들이 다수 보인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향토성을 재인식하는 방법에 차이를 보여줬다.
윤중호는, 「고향, 다시 강가에서」의 “돌아가라 돌아가라”라는 시구처럼, 향토적인 삶으로 자꾸 파고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근대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향토성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근대를 경험조차 해보지 못한 전근대인의 모습마저 보이기도 한다. 그와 달리, 박흥식은 근대의 틀에서 향토성을 자꾸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 위에 인용한 「아흐레민박집」에서 ‘민박집’이라는 공간은 그러한 성격의 한 부분을 잘 드러낸다. 민박집, 그곳은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갈 이방인을 위한 공간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시적 화자는 ‘철겹게 노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 공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4. 새로운 ‘지방 문학’을 위하여
지금까지 거칠게 살펴본 바와 같이, 시의 한 공간으로써 옥천은 문학적으로 궁핍하다. 정지용이라는 거인이 우뚝 서 있는 것에 비해, 그 주변은 ‘휑한’ 느낌마저 든다. 그것은 옥천역에 내려섰을 때 정지용의 유산이 너무나 커 보여 다른 것을 모두 가렸던 것과 겹쳐 보인다.
옥천의 문학이 궁핍해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이 옥천만의 현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늘날에 이르러 임의의 한 지방을 들여다본들 그 사정은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신춘문예나 동인지가 근대문학 이후의 한국문학을 이끌어온 탓이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 문학에서 지역색을 찾는 일이 대단히 어려워졌다. 물론 신춘문예나 동인지 출신 작가들 중에도 지역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고 작품으로 승화시킨 이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 세계에서 그러한 작품은 극소수에 그치고 있으니 그들의 시 전체를 지역색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지금이라도 지방문학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서는 지역 출신의 시인·작가들을 정리하고 육성하는 작업에 나서는 한편, 그 지역 출신이 아니더라도 지역색을 그린 작품들을 발굴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옥천문학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 1980년대 후반 정지용에 대한 해금조치가 나온 이후, ‘지용제’가 거듭 개최되면서 옥천예총이 설립되었고 1999년에 이르러서는 옥천문인협회가 결성되었다. 오늘날에는 시 분야에서 안후영, 노현석, 전순표, 이명식, 김명자, 송용숙, 김동엽 등이, 수필 분야에서 이수암과 김묘순 등이 지역문학의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다.
박성필 / 1977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시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공저 『도시 공간의 이미지와 상상력』이 있고 평론 「음표와 울음, 이미지의 존재 방식」, 「거울에서 나온 소녀가 누드를 지운다―김윤이론」 등이 있다. 현재 서울시립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