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끝내 우랄알타이어를 정복하다
해서와 활자체의 시대
조광윤 이후 송나라의 황제들은 북쪽의 거란, 당항, 여진 등과 줄곧 밀고 당기는 과정 속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유지해야 하는 묘한 긴장감에 직면하게 되었다. 적이 있어야 비로소 나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협력적 긴장관계인 셈이었다. 하지만 얼어붙은 대지와 눈보라 속에서 힘과 기질을 길러온 이민족들과의 대화는 쉽지 않았다. 언어는 통역들을 세우며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었지만 따스한 강남에 대한 그들의 탐욕스러운 마음은 통역이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들로서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피하는 게 상책일 뿐.
송을 세운 조광윤은 타고난 무장이었지만 그도 선남후북(先南後北: 남쪽을 먼저 통일하고 북쪽은 후일을 기약한다)의 자기위안과 함께 물러나고 말았었다. 하지만 칼로 이루려던 ‘후북’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1127년에는 거란족의 요나라를 정복하고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에 밀려 수도를 북쪽의 카이훵(開封)에서 남쪽 항저우(杭州)로 옮기고 만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역사에서는 송나라를 북송과 남송으로 구분하게 된다.
[그림 1] 여진족의 금나라와 남송의 지역 분할도
많은 중국인들은 당시 금나라가 송나라의 휘종 등 황실 사람들을 꽃 피는 4월에 북으로 끌고 간 역사는 기억조차 못하지만 송나라가 남송이라는 이름으로 쪼개진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아쉬움을 감추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의 지식인들은 송나라 때의 이러한 역사 때문에 깊은 가슴앓이를 한다. 하지만 ‘한화(漢化: 이민족들이 중국 한족의 문화에 동화)’의 능력으로 한족의 문화와 역사가 이어졌음에 대해서는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않는다. 중국의 역사서들이 송나라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한화’의 의미를 반복하는 이유다. 민족주의 정서를 끝내 떨쳐 버리지 못하는 중국 학자들의 조바심이겠다.
사실 돌이켜 보면, 변변한 문자조차 없던 당항족, 거란족, 여진족들이 중원 한족들의 문화를 맞닥뜨렸을 때 그들은 그 거대함에 압도되어 기가 죽었을 것이다. 남쪽으로 천도를 한 송나라 고종이 일전 불사의 상소를 올린 유생을 죽여버렸을 때의 두려움 이상으로 기가 질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추측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후일 요나라나 금나라 모두 유교 경전으로 과거 시험을 치루며 관리들을 선발하는 등 적극적으로 ‘한화’가 된 흔적들을 적지 않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역시 붓이 칼보다 강했다. 그런데 ‘한화’의 핵심적인 영향력은 사실 한자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내용을 조금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당항족, 거란족, 여진족 모두의 언어는 한족의 언어와 달리 우랄알타이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자음과 모음으로 음을 나타내야 하는 표음문자가 필요했지만 초기에는 문자를 갖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음 하나하나를 구별해내는 일이 간단치 않은데다가 그것을 적당한 자음과 모음으로 구체화시키는 작업 또한 쉽사리 될 일은 아니었다. 뛰어난 학자들이 오랜 시간 조용한 연구를 통해 이루어야 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말을 타고 유목생활을 하는 민족이었다. ‘조용한 연구’란 개념조차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림 2] 당항족의 하나라 문자 한자의 필획들을 자신들의 알타이어 체계에 맞도록 재구성해 만들었다. 하나라가 송나라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흔히 서하(西夏)문자라고 부른다. 표음부호들을 한자와 같은 사각형 틀 안에 밀어 넣은 이들 문자는 ‘한화(漢化)’현상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문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밉든 곱든 한족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은 한자의 힘을 목도하게 되었고 한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당항족, 거란족, 여진족들은 모두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어보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당항족은 한자의 필획을 재조합하는 독특한 방법으로 문자를 만들어보기도 했고, 여진족의 금나라 같은 경우는 여진어 학교인 여진국자학(女眞國子學) 등을 세워 독자적 문화를 보존하려는 노력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한족이 길러온 문화의 흡인력은 거대했다. 특히 한자가 지니고 있는 역사의 힘은 이민족들의 칼날로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점차 한자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언급한 당항족 문자의 경우는 그 발상이 기발했지만 [그림 2]에서 보듯이 구조가 너무 복잡하다. 지식인들의 경우는 차라리 한자 사용이 정보 획득에 더 효과적이었기에 호응을 하지 않았다. 하층민들에겐 어차피 글이란 피곤한 존재였기에 역시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아마 당시로서는 자신들의 발음을 충분히 요모조모로 다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필획을 사용한 듯하다. 하지만 이 문자는 실험용에 그치고 만다. 당시 중원 문화의 대세를 이끌고 가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상황은 다른 종족들의 문자도 마찬가지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가 목도하듯이 거란, 당항, 여진의 문화는 역사의 늪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실 한족들의 용기는 이민족보다 약했다. 그들의 비전 또한 이민족들에 비해 흐렸다. 하지만 결국 한자는 우랄알타이어와 건곤일척의 문화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동북아에서 우랄알타이어를 사용하던 종족들이 한자를 사용하던 한족들과의 명운을 건 싸움에서 패한 것이다. 조광윤이 앞서 칼로 ‘후북’을 성공시키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와 돌이켜 보면 한자가 결국 ‘후북’을 이루어낸 것이다. 거란, 당항, 여진 세 종족은 그들의 언어, 그리고 어설픈 문자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