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동종화수회
카페 가입하기
 
 
 
 

지난주 BEST회원

 

지난주 BEST회원

 

지난주 BEST회원

 
 
 

카페 통계

 
방문
20241009
0
20241010
0
20241011
0
20241012
0
20241013
0
가입
20241009
0
20241010
0
20241011
0
20241012
0
20241013
0
게시글
20241009
0
20241010
0
20241011
0
20241012
0
20241013
0
댓글
20241009
0
20241010
0
20241011
0
20241012
0
20241013
0
 
카페 게시글
자유 게시판 스크랩 [잔차로 떠나는 성지순례] 은이성지-미리내성지(2)
주포 추천 0 조회 117 12.06.11 14: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순례일시 2012. 6.6 순례장소  미리내성지 
 순례자 미카엘.마르띠노.알로이시오  소재지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141 

 

  

 코스: 은이성지-신덕고개-와우정사-해실리-망덕고개-바래기산임도-문수봉터널-미리내골-애덕고개-미리내성지-송전삼거리-덕성리-남리-경안천-용인시외버스터미널-양지로-은이로입구-은이성지(약45km)

 

 

 

 

 

 

 

 

 

최초의 한국인 신부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천주교 103위 성인 가운데 한사람, 세례명은 안드레아. 아명은 재복 보명은 지식. 관명은 대건. 본관은 김해.

 
김대건은 1821년 (순조21) 8월21일 충청도 솔뫼 (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과 장흥 고씨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몰락 양반의 가문으로, 천주교와 관계를 맺은 것은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 때였다. 김진후는 한국천주교회가 탄생된 지 얼마 안 되어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하였다. 그는 신해박해(1791) 때 체포되어 관가에서 신앙을 고백한 적이 있고, 1801년 때 유배되었다가 1805년에 다시 해미에서 잡혀10년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1814년 옥사 순교하였다.


진후의 셋째 아들 종한은 솔뫼에서 안동 우련밭으로 피해 살다가 여기서 1815년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1816년 대구 감영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그리고 종한의 딸 데레사는 1839년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당고개에서 교수되고, 그에 앞서 남편 손연욱(요셉)은 1824년 덕산에서 옥사 하였다. 또 진후의 아우 선후의 손자 제교와 진후의 넷째 아들 희연의 아들인 제항은 1866년 공주에서 순교하였고, 김대건의 숙부 제철의 아들인 진식은 1867년 공주에서, 선식은 해미에서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그리고 김대건의 아버지 제준은 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 순교함으로써,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김대건의 가계는 순교자들로 일가를 이루었다. 김진후의 둘째 아들인 택현은 솔뫼를 떠나 용인군 이동면 묵리 한덕골에 정착하였는데, 1827년 정해박해를 피하여 이곳으로 이주한 듯하다.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이 세례를 받은 것은 1836년이었다. 그는 1836년 초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모방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모방 신부는 1836년 부활절(4월5일)을 전후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 공소'를 방문하였다. 그는 여기서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하고 세례를 주었다. 김대건에 앞서 두 소년이 신학생으로 선발 되었는데 최양업(토마)은 2월 6일에, 최방제는 3월 14일에 각각 서울로 올라와 한문과 라틴어 등 외국으로 유학 갈 공부를 하며 수련에 있었다. 그러나 김대건은 7월 11일에서야 이들과 합류하였다.

모방신부는 박해 때문에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신학생들을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보내기로 했다. 세 신학생들은 12월 2일 서울을 떠나기 전, 앞으로 공부하게 될 신학교 교장에게 순명할 것과 교구 신부가 되어 열심히 봉사할 것을 서약하였다. 그리고 12월 3일 중국으로 귀환하는 유방제 신부와 정하상, 조신철 등 신자들의 인도를 받으며 변문으로 떠났다. 이 때 조선인 신자들은 변문에서 새로 입국하는 샤스탕 신부를 맞아들여 귀경하였고, 세 신학생들은 샤스탕 신부를 안내한 중국인 안내원들을 따라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남하하여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조차지로서, 신앙인들이 극동 진출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며, 동양 전교 활동의 거점이었다. 출발할 당시에는 세 신학생들이 공부할 장소가 결정되지 않았었다. 이들은 파리 외방전교회가 운영하는 동양인 성직자 양성소인 페낭 신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만, 당시 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신학생들이 소요를 일으킨 일이 있어서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 교육을 맡았다.

세 신학생들은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인하여 1837년 8월과 1939년 4월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였다. 그 때마다 신학생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신학생인 최방제가 1838년 11월 27일 열병으로 죽었다. 김대건의 건강 역시 좋은 편은 아니었다. 두 신학생은 1841년 11월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들어갔다.

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두 신학생은 아직 수학 중이었지만, 프랑스 함대의 함장 세실은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하여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째 조선 교회로부터 소식이 끊겨 있었던 터라 대표부 신부들은 이번 일을 하느님이 주신 기회로 여겼다. 김대건은 조선 포교를 지망한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2월 15일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842년 8월29일 남경조약이 체결되자 조선 출동을 중지하고 마닐라로 회항하였다. 그래서 김대건은 하선하여 강남 교구장 베지의 도움을 받아 중국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10월 2일 상해를 떠난 그는 10월 23일 요동 땅에 도착하여 백가점에 머물면서 3차에 걸쳐 의주 변문을 통한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1843년 4월부터 거처를 소팔가자로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 곳에는 1841년부터 페레올 신부가 머물고 있었다. 김대건은 1843년 12월 양관에서 있은 제3대 조선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한 후 주교의 지시를 받고, 1884년 12월 두만강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 했지만 실패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12월 최양업과 같이 소정의 신학 과정을 마치고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았다. 그들은 사제품의 법정 연령인 만24세 미만이므로 사제품을 받지는 못하였다.

김대건은 1845년 1월 1일 변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한 뒤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하여 상해로 도항할 준비를 하고 4월 30일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작은 목선인 라파엘호에 승선하여 제물포를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했다. 그리고 8월 17일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8월 30일 상해를 출발 40여일 만인 10월 12일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의 사목 활동 기간은 짧았다. 그는 입국하던 해 11월 12월 사이에 서울과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 등을 방문했는데, 은이 공소에는 그의 동생 난식과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이 두 달이 조선에서 있은 사목 방문 활동의 전부였다.

그의 교회 활동은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서 끝났으니, 말년의 직책은 조선 교구 부교구장 이었다. 그는 1846년 5월 14일 주교로부터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출범하여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지도를 탁송한 후 순위도로 왔다 . 거기서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되고 10일에는 해주 감영으로 이송 되었다가 다음 날인 6월 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김대건은 포청에서 3개월 동안 40차의 문초를 받고,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26세였다. 그의 시체는 모래사장에 가매장 되었는데 40일 후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하여 미리내에 안장되었고, 1901년에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졌다가 1951년 그의 두개골을 혜화동 소재 가톨릭 대학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1857년에 가경자, 1925년 7월 5일에 복자로 되었다가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김대건 신부는 25편의 편지를 남겼는데. 한글본 1편, 한문본 1편 나머지는 라틴어로 쓰여 졌다. 라틴어 편지는 23편으로 비망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은사 신부님에게 보낸 편지들로서 조선 입국 통로를 답사할 때의 보고와 옥중 편지이다. 서두를 "신자들 보아라"로 시작하는 한글 편지는 사형을 앞두고 옥중에서 조선 신자들에게 보낸 회유문이다. 한문 편지는 장문으로 되어 있으며 조선 입국 통로의 개척을 위한 네 번째 답사 여행 후 기록한 것인데 한문 진본은 없고 프랑스 번역본만이 남아 있다.

또한 그는 현재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는 2통의 라틴어 작문과 <조선 전도>도 작성했다. 이중 작문은 신학생 시절에 작성한 것이고, 지도는 선교사의 조선 입국 안내를 위한 일종의 행정 지도로 부제이던 1845년 초 잠시 귀국했을 때 작성한 것이다. 이 밖에도 교회측 기록에는 김대건 신부가 옥중에 있을 때 정부 당국의 요청으로 세계 지도를 작성하고, 지리 개설서를 저술하였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한국순교자 79위 시복기념성당 (1925년)

미리내고개인 애덕고개를 내려오면 바로 만나는 기념성당과

성당 문 앞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과 우리나라 3번째 신부님이자 미리내 초대주임 강도영 마르코 신부님과 만나게 된다.

아울러 우리나라 3대 조선교구장이신 페레올주교님도 성당 우측편에 모셔져있다.

(김대건신부님은 페레올주교님께 신품성사를 받으셨다)

 

 

 

 

 

 

 

 


 


 

 

김대건신부님 바로 옆에 모셔진 어머니 고 우술라묘.

 

 

 

새남터에서 치명하신 신부님을 이곳까지 모시고 온

이민식 빈첸시오 묘지 역시 신부님의 묘소와 지척간에 있다.

 

 

 

 

 

 

 

 

 

 

'성모7락'을 기념하여 세워진 성모경당

1) 예수님 잉태의 기별을 받으신 기쁨을 묵상 (루가 1,26-38)
            2)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천주의 성모로 인정받으신 기쁨 묵상 (루가 1,39-56)
            3) 예수님을 세상에 낳으시어 성모님이 되신 기쁨을 묵상 (루가 2,6-20)
            4) 예수님을 삼왕에게 보여 조배하게 하신 기쁨을 묵상 (루가 2,22-40)
            5) 소년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신 기쁨을 묵상 (루가 2,41-52)
            6)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신 기쁨을 묵상(마태 28,1-8)
            7) 성모님이 하늘에 올라 모후로 면류관을 받으신 기쁨을 묵상(교회헌장 68)

 

 

 

 

 

 

 

 

 

 

 

 

 

 

 

 

 

 

 

 

 

 

103위 시성기념 대성전 앞.

 

 

 

 

 

 

 

대구대교구 제2 주보 성인인 이윤일성인 묘지

이곳에 뭍히셨던 성인을 대구 교구청 성모당으로 옮겨 모셨다.

 

 

 

 

17:30

떠남.

미리내 고개로 넘어와

성지정문으로 떠남.

송전저수지에 낙조가 드리운다.

 

 

2시간 만에 용인을 거쳐

다시 원래 출발지인 은이성지에 도착한다.

해질녁 은이성지는 다만 고요하기만하다.

 

 

 

 

인증샷 하나

그리고

 

 

 

떠남.

 

 

 

23시경 대구 안지랑곱창골목 도착.

프란치스코가 우릴 기다려준다.

미카엘과 마르띠노와 상견례(?)인 셈이다.

 

 


 

이제서야 블로그에 올린다.

성지순례를 다녀온 후 허리 때문에 한의원에 침 맞고있다.

원래 허리가 약했던지라(어디 성한 곳 하나 있겠냐마는)  삼덕의 고개길에

 잔차를 어깨에 걸머매고 오를때 다쳤을 것이라 여긴다. 

한의사 선생님 진찰해 보시더니

"허리와 신장(콩팥)은 서로 상호보완관계라 신장이 약하면

자연 허리가 약해 질 수 밖에 없는...."

그렇구나. 똑바로 걸을 수 없다. 앞으로 80도 구부린 상태로 걷는다.

어제 밤에는 예비물리치료사인 소화데레사와 아내가 둘이 공동으로 패치와 찜질를 한 덕분에

오늘 많이 좋아졌다.

물론 어제 밤에 아내와 딸한테 과유불급이란 용어까지 들먹이며 많은 훈계와 충고를 받았다.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인 오늘

아내 히야친타가  아침 일찍  그제 내가 다녀갔던 미리내성지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부디 은총 한가득 담고서 오시라.

 

 

 

<아래사진들은 미카엘이 순례길에 따문 따문 폰카질한 것들이다>

 

 

죽산성지 묵주기도 장미화원

 

 

죽산성지 성모상 앞에서 마르띠노

 

 

죽산성지 순교자 묘역 앞 마르띠노

 

 

죽산성지 대성전

 

 

십자가의 길

 

 

 

 

죽산성지 소성전

 

 

 

 

은이성지 성당

 

 

 

호작질^^*

 

 

 

 

 

망덕의 길을 오르는 마르띠노

 

 

망덕의 고개에서  미카엘

 

 

미카엘과 함께

미리내 시복기념성당

 

 

미리내 103위 기념 대성전앞 미카엘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