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扶余)는 장성(長城) 북쪽에 있으며, 현토군(玄菟郡)에서 1천리, 남으로 고려(高句麗), 동쪽으로 읍루(挹婁), 서로 선비족(鮮卑族)과 접해 있으며, 북쪽에는 약수(弱水 아무르강)가 있으며, 방형(方形) 2천리이다. 토착민의 호수는 8만호, 궁실, 창고, 감옥 등이 있다. 구릉과 큰 강이 많고, 동이(東夷) 영역에서 가장 평탄하다. 토지는 오곡 재배에 적합하지만, 과실은 되지 않는다. 체형이 크고 용감하며, 근엄실직(謹厳実直)하여 약탈하지 않는다.
나라에는 군왕(君王)이 있다. 모두 육축(六畜)의 이름을 관명(官名)으로 하여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豬加), 구가(狗加), 대사(大使), 대사자(大使者), 사자(使者) 등이 있다. 읍락(邑落)에는 호민(豪民)이 있으며, 하호(下戸)라고 하는 노복이 있다. 저가(諸加), 마가(馬加) 등은 주요 사도(四道 광역행정구역)으로 구분하여, 도(道)의 대읍락(大邑落) 수장은 수 천가, 하위의 소읍락(小邑落)의 수장은 수 백가를 다스린다.
음식을 먹을 때는 조두(俎豆 밥상)를 사용하며, 함께 모여서 배작(拜爵), 세작(洗爵 잔돌리기)을 한다. 은력(殷暦) 정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 연일 음식과 가무를 즐긴다. 그것을 영고(迎鼓)라고 하며, 이 때는 법의 집행하지 않고, 죄인을 방면한다. 옷은 흰옷을 좋아하며, 흰 천의 대몌(大袂 넓은 소매)의 포(袍 외투)・고(袴 상의), 혁탑(革鞜 가죽신)을 신는다. 외출할 때는 장식을 한 비단옷과 모직물을 즐겨 입는다. 대인은 여우, 너구리, 검은 족제비, 원숭이 등의 가죽옷을 입고,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
통역이 말을 전할 때는 모두 꿇어 엎드려 손을 땅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한다. 형벌은 엄격하고 즉단(即断)하는데, 살인은 사형시키고 그 가족은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절도는 훔친 금품의 12배를 배상한다. 남녀의 음행, 부인의 질투는 모두 죽인다. 가장 증오받는 질투에 대한 형벌은 이미 죽인 시체를 나라의 남쪽 산 정상에 내버려 썩게 한다. 여자의 가족이 시체를 회수하고 싶으면, 우마(牛馬)를 헌납하면, 유해를 거둘 수 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하는 것은 흉노와 같은 풍속이다.
가축을 잘 키우고, 명마(名馬), 붉은 보옥, 족제비와 원숭이의 모피, 아름다운 담수진주를 생산한다. 큰 진주는 대추 정도나 된다. 궁시도모(弓矢刀矛)를 무기로 하며, 집집마다 갑옷과 무구(武具)를 갖추고 있다. 나라의 원로는 스스로 옛날 망명자라고 한다.
성책(城柵)으로 주변을 둘러싼 감옥과 같은 것이 있다. 보행할 때는 주야 구분없이 노소 모두 노래를 부르는데 하루 종일 노래가 끊이지 않는다. 군사(軍事)와 제사(祭祀) 때에는 소를 잡아 발굽으로 길흉을 점치는데, 발굽이 갈라져 있으면 흉, 붙어 있으면 길이다. 적이 나타나면, 제가(諸加)는 자진하여 싸우고, 하호(下戸)는 병량(兵糧)과 식사(食事)를 제공한다. 제가(諸加)가 죽으면, 여름에는 얼음으로 부패를 방지하고, 사람을 죽여 순장(殉葬)한다. 많을 때는 100명 이상이 된다. 정성들여 장례를 치르고, 분기(墳墓)에는 곽(槨 나무로 짠 묘실)은 있지만, 관(棺 石棺)은 없다.
위략(魏略)에는 그 나라의 풍속은 복상(服喪)의 정지는 5개월로 하고, 그 기간이 길수록 영예로 생각한다. 장제(葬祭)는 노소를 불문한다.
상주(喪主)는 빠른 상의(葬儀)을 원치 않고, 타인에게 이를 강요하고, 평소 훈련이 되어 있어서 마치는 것을 절도(節度)로 여긴다. 상(喪)을 당한 남녀는 모두 순백색, 부인은 얼굴을 덮은 천 베일을 입고, 허리띠 모양의 보석장식을 하지 않는다. 대체로 중국과 비슷하다.
부여(扶余)는 옛날에 현토군(玄菟郡)에 귀속해 있었다. 한말(漢末), 공손도(公孫度)가 해동(海東)으로 세력을 넓혀 외이(外夷)를 감복시켰을 때,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요동군(遼東郡)에 귀속하였다. 고구려(高句麗)와 선비족(鮮卑族)이 강대해졌을 때, 공손탁(公孫度)은 부여가 두 부족 사이에서 어려움을 당하자 공손씨(公孫氏)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위구태(尉仇台)가 죽고, 간위거(簡位居)가 즉위하였다. 그에게는 적자(適子)가 없고, 서자인 마여(麻余)가 있었다. 위거(位居)가 죽고, 제가(諸加 중신)는 마여(麻余)를 왕으로 세웠다. 우가(牛加)의 형자(兄子)로 위거(位居)라고 하는 자가 대사(大使)가 되어, 재정(財政)을 개선하여 선정을 베풀어서 백성들은 이것을 부관(副官)이라고 하여 매년 사신을 보내 낙양(洛陽)에 공헌(貢献)하였다.
正始年間(240-248년), 유주자사(幽州刺史) 모구검(母丘儉)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현토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부여에 파견하였다. 위거(位居)는 대가(大加)를 교외로 보내 군량(軍糧)을 제공하며 왕기(王頎)를 환영하였다. 우가(牛加)의 계부(季父)에 두 마음이 있어, 위거(位居)는 계부부자(季父父子)를 주살(誅殺)하고 재물을 몰수하여 진수부(徴収簿)를 관에 보냈다.
옛날의 부여 풍속은, 수해한발이나 흉년이 들면, 제사를 지내는 국왕의 책임으로 돌려 역(易)을 맞추든지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마여(麻余)가 죽고, 그 아들 의로(依慮)가 여섯 살에 왕위에 올랐다. 한대(漢代), 부여왕은 장제(葬祭)에 쓸 옥갑(玉匣)을 항상 현토군(玄菟郡)에 부탁했는데, 왕의 장의(葬儀)가 있으면 가지러 왔다. 공손연(公孫淵)이 주벌(誅伐)되었을 때, 현토군치(玄菟郡治)의 창고에 옥갑(玉匣) 한 구가 보관되어 있었다.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옥벽(玉璧)・규(珪)・찬(瓚) 등이 조상 전래의 유물이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 원로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인새(印璽)에는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나라 안에는 고성(故城) 있는데 이름을 예성(濊城)이라 한다. 예맥(濊貊)의 고지(故地)로 부여왕은 예성(濊城)에 있다고 마치 망명자와 같다고 한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① 魏略曰: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嘗破壞。
② 魏略曰:舊志又言、昔北方有高離之國者、其王者侍婢有身、王欲殺之、婢云「有氣如雞子來下、我故有身。」後生子、王捐之於溷中、豬以喙嘘之、徙至馬閑、馬以氣嘘之、不死。王疑以為天子也、乃令其母收畜之、名曰東明、常令牧馬。東明善射、王恐奪其國也、欲殺之。東明走、南至施掩水、以弓撃水、魚鱉浮為橋、東明得度、魚鱉乃解散、追兵不得渡。東明因都王夫餘之地。
부여국(扶余国)은 현토(玄菟)의 북쪽 1천리, 남쪽으로 선비(鮮卑)와 접하고, 북쪽으로 약수(弱水)가 있고, 면적 2천리, 호수(戸数) 8만, 성읍(城邑), 궁실(宮室)이 있으며, 토지는 오곡재배에 적합하다.
그 나라는 강용(強勇)하며, 함께 모였을 때의 예절은 중국과 비슷하다. 외출할 때는 장식을 한 견포(絹布)의 비단, 모직물을 사용해서 금은장식을 허리에 두른다. 법(法)은, 살인은 사형시키고 그 가족은 몰수한다. 절도는 12배 변상하고, 남녀가 음행(淫行)하거나 부인이 질투를 하면 모두 죽인다.
전쟁이 있으면, 소를 잡아서 천제를 올리고, 그 발굽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데, 굽이 갈라져있으면 흉(凶), 붙어 있으면 길(吉)이다. 죽은 자는 산 자로 순장(殉葬)한다. 곽(槨)은 있으나 관(棺)이 없다. 장의(葬儀)에서는 남녀는 모두 순백의 옷을 입는데, 부인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는 옷을 입고, 벨트 모양의 보석 장식은 하지 않는다.
좋은 말이 있으며, 너구리, 족제비의 모피, 아름다운 진주가 있다. 큰 진주는 대추 정도만 한 것도 있다. 그 나라는 풍요로우며, 선조 이래 아직 패한 적이 없다. 왕인(王印)의 문양은 「예왕지인(穢王之印)」이다. 나라 안에는 옛날의 예성(穢城)이 있는데, 원래 예맥(穢貊)의 것이다.
武帝時代, 빈번히 조공(朝貢)을 바쳤는데, 太康六年(285년), 모용외(慕容廆)에 의해부여는 전군(全軍)이 격파되어, 왕 의로(依慮)가 자살하고, 자제(子弟)는 도망쳐 옥저(沃沮)에서 보호받았다.
황제(皇帝)는 소(詔)로 「부여왕(扶余王)은 대대로 충효(忠孝)를 지켰는데, 악적(悪賊)에 멸망된 것은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만약, 남은 유민으로 나라를 부흥시킨다면, 도와서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하라」고 명했지만, <?xml:namespace prefix = st1 />사주호(司奏護)의 동이교위(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부여(扶余)의 구원에 나서지 않아 기략(機略)의 호기(好機)를 놓쳤다. 그래서 소(詔)로 영(嬰)을 파면하고, 하감(何龕)으로 대신하였다.
이듬해, 부여왕(扶余王)을 계승한 의라(依羅)는 사신을 감(龕)에 보내, 부흥(復興)을 위해 고국(故国)으로 돌아갈 구원(救援)을 청하였다. 감(龕)은 병사를 모아 독우(督郵)의 가침이(賈沈以)에게 보냈다. 모용외(慕容廆)는 가침이(賈沈以)의 황군(皇軍)과 싸웠으나 대패하여 군사를 철수하였다. 의라(依羅)는 부흥에 성공하였다.
그 후에도 모용외(慕容廆)는 부여인(扶余人)을 납치하여 중국에서 팔아넘겼다.
황제는 이를 불쌍히 여겨, 또 소(詔)로 관물(官物)로 그들을 사들이고, 하사(下司), 익(冀)의 두 주(州)에서 부여의 생구(生口 노예) 매매를 금하였다.
첫댓글 이것도 참고로 보는거고..다시 수정해서 해석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