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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그 부끄러운 자화상
마치 자신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인 양, “한국 사람은 이래서 문제야” 라든가, “한국 교회의 문제점은...” 하면서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내가 이런 글을 쓰자니 어쩐지 어색하다. 개중에 진정으로 한국교회를 위하는 사람들이 왜 없을까만, 내가 받는 인상으로는 그들의 상당수가 학자연(學者然)하며 거대담론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학문을 만방에 과시하기도 하고, 더 나쁘게는 자신의 과오를 불특정 다수에게 투사(投射)함으로 자기의(義)에 안주하기도 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한국 교회의 과거는 곧 나의 현재이고, 그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과오들이 나의 살과 피 속에 녹아 들어가서 나의 일부가 되었다는 자의식을 가지고서이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곧 나를 비판하는 과정이요, 나의 속을 들여다보면 한국 교회가 보인다.
역사상 나타난 교회가 제 구실을 못하고 비판을 받는 이유는 한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교회가 세속의 이데올로기와 삶의 방식을 비판하여 초월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들에게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 세속성은 역사적 상황과 정신사의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역사적으로 나타난 한국 교회의 오류는 모두 전통적인 한국인들의 특수한 악(惡)과 관계를 맺고 있다.
1. 미완의 교회 재건
한국 교회사를 공부하는 분들의 일치된 생각이겠지만,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힘든 순간이 있었다면 일제 말기 신사참배가 강요되던 시기를 꼽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고백과 설교문과 기록들을 연구하면서, 나 자신이 그 때 살았다면 어떻게 하였을까 고민하며 밤을 밝힌 기억이 난다. 공정하게 평가하자면, 이제 갓 두 세대를 지낸 미약한 한국 교회가 일제의 금머리 아래 완전히 굴복하지 않은 것만도 기적이요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오히려 해방 후 신사참배 처리 과정이다. 온 교회가 신사참배한 것에 대하여 통회하고 순교자나 출옥성도를 존중해 주었더라면, 출옥성도들은 배교한 동역자들의 등을 두드려 주면서 함께 교회의 재건을 위하여 힘쓰자고 하였더라면, 그래서 “반민특위”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던 당시의 사회에 빛을 던져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대부분의 기득권 교회 지도자들은 출옥성도와 신학자들이 제안한 신사참배의 죄에 대한 2개월간 근신 자숙할 것을 실행하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재건’은 신앙의 재건이 아니라 교회 정치 기구의 재정비나 신학교 재정비, 부흥회의 개최 등이었다. 7년 전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던 바로 그 지도자들, 순교자들을 내몰았던 주역들이 계속해서 재건 노회와 총회를 지배하였다.
1945년 11월 한 주간 동안 평북 선천의 월곡교회에서는 “신사참배 통회자복 금식기도 수양대회”라는 거창한 이름의 부흥회가 열렸고 당시 평북의 각 노회와 타 교파의 목사 200여 명을 비롯한 수많은 성도들이 모여 유명 강사를 모시고 집회를 하였다. 그 월곡교회는 신사참배를 가결한 1938년 총회의 의장이었던 목사가 시무하던 교회였으니, 그가 그 집회를 그의 교회에서 연 이유를 알만할 것이다. 집회의 강사 중의 한 사람인 박형룡박사가 만주에서부터 먼 여행 끝에 선천에 도착해 보니 이미 신사참배 문제는 1시간의 토론 끝에 공적인 권징이 아닌 사적인 회개로 마무리 지어졌다. 박박사가 기도회의 설교를 통하여 다시 이 문제를 거론하고 공적인 회개와 징계를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나, 월곡교회의 목사는 “박목사 어제 밤에 한 설교를 8년 전에 하였더라면 우리 교회가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을 텐데 좀 늦게 설교를 하였구려”라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박형룡박사도 일본으로 만주로 피신을 하였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강력하게 권고하지 못하였다. 결국 이 수련회는 자숙과 회개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간단한 회개를 통하여 양심에 만족을 주고 다시 교역에 들어가려는 통과의례였던 셈이다.
명예와 수치를 그 근간으로 하고 있던 유교적인 사회에서 2개월간의 공적인 자숙은 힘든 일이었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목회지와 가족과 심지어 생명까지 버렸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 앞에서는 그 변명이 설득력을 잃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통치가 교회 안에서 실현되는 대신, 유교적 권위주의의와 권력욕이 교회를 지배하는 전통이 세워지게 되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순교자와 옥중성도를 무덤을 단장하고 비석을 세우고 있지만, 진실로 그들의 피를 이어받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법보다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앞세우는 권위주의와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는 지도자들, 그리고 그들이 유명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지도력을 문제삼지 않고 맹종하는 성도들은 바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서도 기괴한 이론으로 자기를 미화하고 정치논리를 따라 가던 지도자들의 후손이 아닌가?
2. 분열의 역사
한국 교회의 고질적인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어 오고 있는 분열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자. 물론 최선은 교회가 분열되지 않고 외형상 하나의 거룩한 교회로서 유지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나타난 교회들은 지역적, 인종적, 정치경제적, 교리적 정황들에 따라서 분열을 경험하였다. 이 모든 분열을 그 결과만을 보고 동일하게 악한 것으로 비난한다면 자기 자신도 분열된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이상주의적인 소박함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반면 자신이 속한 교단이나 교파만을 정당화하고 다른 교단을 분리주의자로 몰아가는 것 또한 상식적이 못 된다. 무릇 모든 분열에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제한성과 또한 인간이 책임져야 할 사악함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해방 후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여러 번의 분열은 신학적 이유를 표방하고 있지만 매우 복잡한 이유가 숨겨져 있다. 장로교의 경우 1953년의 분열과 1959년의 분열이 자유주의 신학, 에큐메니칼 신학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물론 더 큰 배경에는 서구 교회가 겪고 있던 현대주의-근본주의의 갈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문제와 더불어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주도권 다툼이나 미국으로부터의 원조를 나누는 데에서의 공정성 문제 등과 같은 숨겨진 원인들도 있었다. 더욱이 개탄할 것은 53년 분열의 경우 기장측의 주류를 이룬 세력들은 함경도-기호-전라도 출신들이었고, 예장측은 서북(평안도와 황해도)과 경상도가 다수였다는 점이다. 전라도는 원래 미국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남장로교의 선교지였고 가장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던 지역이었음에도 서북 중심의 기득권세력들에 의하여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장측에 합류한 것이리라. 59년 분열의 경우에도 합동측은 황해도 출신, 통합측은 평안도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다. 교회가 지역간의 갈등을 선도(先導)하고 있는 형국이다. 현실적인 차선책이긴 하겠지만, 권역별로 세력을 형성하고 권력을 나누어 가지는 모습은 각 교단의 총회에서 현재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당시 각 정파의 논객들은 서로에 대하여 ‘용공’의 탈을 씌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5-60년대 매카시즘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그 미움이 얼마나 극에 달하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교회가 매카시즘을 주도한 한 축이었는지 모르겠다.
이후의 분열들도 사실은 지도자들의 교권 쟁탈이라는 숨은 동기가 신학적 이슈의 탈을 쓰고 나타났다. 그리고 각 교단 신학교의 신학자들이 이에 동원되어 자신의 분열을 정당화하고 상대방을 정죄하였다. 대다수 신학자들이 교단의 권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하여 긴장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자의반타의반 그 시녀 노릇을 하는 것은 고금이 동일하다고 사료된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이미 신학자라는 직함을 가지게 된 필자도 때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원망하면서도 신학자들이 이러한 현실을 만드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하였다고 믿는다.
3. 권력과의 밀월
한국 교회의(특히 보수교단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군사독재 시절에 교회가 보여 주었던 권력과의 밀월관계이다. 이 시기에 복음주의 교회들과 선교단체들은 개발독재의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설교를 통하여 내면화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고통받는 ‘민중’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권력자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하였고 민주화운동에 대하여는 무관심하였다. 일제 때는 사회문제에 관하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진보주의 신학자들은 군사독재를 우상으로 간주하고 투쟁하기 시작하였다. 보수적인 교회는 이들을 ‘자유주의’라고 정죄하면서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다.
보수적인 교회가 항상 사회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던 것은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교회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기독교적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일본 권력자들의 통치에 가장 방해가 되는 존재가 되었다. 해방 후에도 ‘조선민주당’ 등을 중심으로 기독교적인 국가 재건에 앞장섰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후 월남한 기독교인들의 주도하에 소위 ‘친미반공(親美反共)’의 정서가 확산되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후의 모든 독재 정권들은 ‘친미반공’의 기치를 내세우면서 기독교를 후원하였다. 또한 개발독재시대에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정신적 지주로 삼아 새마을운동과 같은 한국적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현실화하고자 하였다. 일제와 공산당으로부터 박해를 받던 교회가 종교의 자유 뿐 아니라 국가의 후원과 혜택을 누리는 교회가 되었다. 국가를 향한 비판의 예봉이 무디어 진 것은 어찌 보면 이해할만한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교회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무신성(無信性)과 우상성에 대하여 통찰을 하고 있었어야 하였다.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미명하에 저 세상을 바라본다고 주장하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지배 이데올로기에 질질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최소한 그들의 통치에 영적인 광휘를 얹어주는 일은 하지 않았어야 하였다. 나 자신 역시 한국 교회와 독재 정치의 관계에 관한 글을 쓸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최근 이근안 고문 경관의 자수를 기화로 각 방송사에서 고문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그 중의 상당수는 나와 같은 연배인데, 아직도 고문의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고통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배나오는 것 걱정하며 사는 게 힘드네 어쩌네 투덜거리는 나의 모습이 얼마나 왜소하게 보이는지!
군사정권 시대는 또한 한국 교회의 비약적인 성장의 시기와 일치한다. 우리들의 악함과 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 죄악도 함께 자라왔고 우리는 지금 그 열매를 따먹고 있다. 두 번째 기독교 정권이 무수한 비난의 화살과 함께 퇴진하였고, 전(前)정권들과 함께 낙을 누리던 장로 권사 사업가들의 비리가 속속 드러나면서 기독교의 이미지와 더불어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졌다. 교회들은 자본주의 논리에 충실하여 대교회를 중심으로 헤쳐모여 하고, 확신이 부재한 성도들은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교회를 찾아 매 주일 아침 방황한다. 기독교 잡지나 설교집은 그 현란한 색채와 문구를 뽐내지만 결국 사람들끼리 영광을 주고받는 데 한몫 할뿐이다. 신학생들이 패기를 잃어버리고 기성 교회의 제도 안에서 살아 남기 위하여 애쓰는 모습에 연민의 정이 솟는다. 이 모든 현상들은 교회가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것에 영합해 왔기 때문에 생긴 신드롬이다.
나는 위에서 역사 속의 한국교회가 범하여 왔던 몇 가지의 잘못에 대하여 정리하여 보았다. 물질적인 변화에 비하여 정신의 변화가 상대적으로 그 속도가 늦다는 것을 감안할 때, 위에서 열거한 어떤 악들은 우리의 세대에도 그리고 다가오는 세대에도 역시 범하여질 수 있는 잘못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는 급격히 변화하고 그에 따라 세속성의 양상도 과거 전통적인 사회에서와 아주 다르게 나타난다. 새로운 세대에는 새로운 악이 등장한다. 정보화사회라고 일컬어지는 21세기의 한국의 교회에 도전이 될 세속성은 평등주의로 인한 말씀의 권위 저하, 규범윤리(성윤리, 생명윤리)의 부재, 대중문화를 통한 쾌락주의, 종교다원주의 등일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을 되돌아보고 그 악의 주역들을 비난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단서가 붙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한국 교회와 그 축소판인 내 신앙 속에 스며들어오는 새로운 주도적인 악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를 비판하고 초월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