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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스크랩 중세교회성장기4-1차 가톨릭교회분열,2차 동서교회분열,3차 서방교회분열
훈훈한님 추천 0 조회 36 15.10.21 07: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중세 교회 성장기 4

 

 

  가톨릭 교회 분열 과정 

 

 

1.콘스탄티누스대제의 천도-분열의 씨앗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분열되는 사건의 씨앗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주후325년에 동로마 제국에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① 초기 크리스트교 AD30년

② 가톨릭교회 AD325년 변질

③ 1054년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로 분리

④ 1517년 종교개혁: 프로테스탄트(개신교)

 

 

2. 신학적 논쟁

 

① 필리오케(그리고 아들로부터) 논쟁:

교리의 갈등-서방교회는 589년 스페인 톨레도 대회에서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필리오케(filioque:and the sun-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문구를 추가함으로써 논쟁의 쟁점이 되었다. 8-9세기에는 프랑크교회들도 이 구절이 첨가된 니케아신경을 암송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성령이 성자로부터 발출되었다고 진술하지는 않았으나 그가 성부로부터 발출되었다고 말하였다. 성령의 발출문제는 성령의 성부 및 성자와의 정확한 관계를 묘사하려는 시도였다.

 

성령이 완전한 신이라는 것은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의해 정착 되었으나 성령과 성부의 관계에 관한 명확한 진술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였다. 서방교회는 589년 톨레도 대회에서 필리오케를 삽입하였다. 그래서 서방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었고 그러므로 본질상 성부 및 성자와 동일함을 믿는다고 주장하였다.

 

서방교회는 성자가 성령을 보내셨는지에 대한 논의의 배후에는 회의가 결정한 내용이 지닌 동방교회에서 일어나 분쟁속에서의 서방교회 교황의 역할 문제가 놓여있었다.  마침내 동 서방교회는 서로를 이단이라고 비난했다. 

 

동방교회: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온다.

서방교회: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필리오케) 나온다. 

               

 

                  동방교회                                                                            서방교회(라틴교회)

 

                    성부                                                                                          성 부

                   ↙ ↘                                                                                          ↙ ↘

                 성자 성령                                                                                 성자 → 성령

                                                     

 

                                             여러 가지 교리적 차이

 

문제

동방교회

서방교회

1

토요일 금식문제

금식안함

금식함

2

사순절 기간 음식 문제

누룩 넣은 빵 사용

밀크, 버터, 치즈 사용

3

성찬 식 때 빵문제

누룩 넣은 빵 사용

누룩 없는 빵 사용

4

성직자 결혼문제

개 교회 신부와 결혼 가능

모든 신부 결혼 안함

5

수염 문제

수염 기름

수염 깎음

6

장로와 종부성사 문제

장로들도 죽어가는 자에게 종부성사 할 수 있다.

종부성사는 성례이므로 장로들은 할 수 없다.

 

② 726년 동방 황제 레오3세가 성상 파괴령을 내림

동방교회는 성상숭배 배격하고 제거하였고 서방교회는 게르만 족에게 종교 전파를 하는데 성상이 효율적으로 이용되어 성상숭배를 제도화하였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3세는 제국 내의 모든 성상과 서로마 교회에도 성상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교황은 이르 거부하자 동방교회와 서로마 가톨릭의 대립은 심각해져 동서방교회가 분리되는 원인의 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③ 성직자 결혼 문제

동방교회는 성직자들 결혼을 허용하였고 서방교회는 모든 성직자들 독신을 주장하였다. 서방 교회 레오9세(재위1049-1054)는 성직자의 매매를 금하는 입법을 만들어 성직자의 정화 작업을 추진하였다.

 

 

 

 

1차분열: 가톨릭교회의 기독론 논쟁

 

동방교회교부들의 입장에서는 교회가 동방에서부터 시작하였으며 정교회가 원교회라고 하였다. 단성론자들과 후대의 서방 가톨릭교회는 원 교회에서 파생된 교회들로 이해했다.

 

451년 칼케돈 회의를 거쳐 주후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벌어진 기독론 논쟁으로 첫 번째 카톨릭 교회의 분열로 이어졌다. 그리스도 본성을 중심으로 한 칼케돈 신조를 지지하는 입장과 단성론적 입장을 지지하는 교회들간의 분열이다.

 

 

 

553년 콘스탄티노플회의

 

단성론을 지지하는 가톨릭교회    /     칼케돈 신조를 지지하는 가톨릭교회

                                                      (양성론)

 

 

 

3. 권위에 대한 논쟁(9-12세기동안 논쟁)

 

[정치적 문제-권위에 대한 논쟁]

 

필리오케 논쟁을 재론

867년 동방교회의 포티우스가 필리오케를 쟁점으로 로마교황과 싸움을 벌였던 이유는 자신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임명되는 것을 교회법에 위배된다며 교황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서방교회의 유능하고 정력적인 지도자인 교황 니콜라우스1세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를 선택하는 데에 자신이 결정권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포티우스는 동방교회의 과거나 미래의 여느 총대주교처럼 보편교회에는 다섯 지도자(5대교구의 감독들-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들이 있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동방교회의 주장은 단지 동등한 권한을 갖는 다섯 지도자들 중 서열이 첫째 일뿐 이었다. 동방교회의 주교들은 교황이 사도 바울의 후계자로서 교회의 첫 번째 주교임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지상권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로마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미카엘 카를라류스와의 파문 장

 레오9세가 로마의 교황과 동방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미카엘 카를라류스 서로 적대관계에 있었고 동 서방 교회의 분열을 일으켰다. 동방 콘스탄티노플이 언제나 로마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것에 불평했고 콘스탄티노플을 로마와 같은 등급으로 올리고자 했다. 그것은 총대주교인 자신의 위치가 교황처럼 올라가는 것이었다.

 

자신의 위치를 올리고자 하는 목적을 염두에 둔 미카엘 카를라류스는 서방교회가 가진 의식상의 문제점을 공격했다. 당시 로마교회는 라틴어를 동방교회는 희랍어를 예식에서 사용했고 언어적인 차이에서 시작되는 몇 가지 다른 예식들은 지역의 문화상 어쩔 수 없는 차이들이었다.

 

미카엘 카를라류스는 서방교회가 성찬에서 무교병(효모를 넣지 않고 만든 빵)을 사용하는 것 토요일에 금식하는 것 목 졸라 죽인 짐승들의 고기를 먹는 것은 이단적이라고 비난했다.

 

동서교회 전체가 심각한 분쟁에 빠져있을 때에 노르만인들이 남부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당시 남부이태리는 비잔틴제국의 영역이었다. 11세기 중에 노르만족은 비잔틴 영토였던 남부이탈리아의 상당부분을 점령했으며 그곳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라틴교회의 관습을 강요했다.

 

불가리아의 대주교였던 오크리다의 레오(Leo of Ochrida)가 발표했던 선언문을 그대로 인용하여 선언문을 서방의 교황에게 보내었다. 이 선언문의 마지막은 클루니 수도원의 개혁에 감명을 받고 교회 개혁을 추진한 로마의 교황 레오9세의 개혁을 비꼬는 문장으로 끝난다. 즉 "왜 일반 신자들을 개혁하려고 하는가? 너 자신들부터 개혁하라"이다. 이 외에도 필리오케 문제를 재론하며 서방교회가 교리적으로 문제 있음과 성직자의 결혼 금지 역시 자연법칙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내용의 선언문을 서방의 교황에게 보낸 카를라류스는 의자가 강하고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이 사태를 그냥  넘기지 않고 그것에 정면으로 맞서 앙갚음하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모든 서방교회에 대하여 유사한 조치를 취했으며 그들이 따르지 않자 라틴계 교회들을 폐쇄하고 헬라 식 예배를 강요했고 불순종하면 파면 조치했다.

 

레오 9세는 강력히 항의했다. 로마교회의 로마교회가 베드로의 지상 대리권을 가지고 있는 절대적 우위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와 미래에도 교리 상 아무런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남부 이탈리아는 전략상 요충지였기에 동방황제는 로마와 신성로마제국과 더불어 공동 대처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동방황제는 미카엘 카를라류스에게 로마의 교황과 분쟁치 말고 화해하라고 강요했다. 카를라류스는 교황 레오9세에게 편지를 보냈고 레오 9세 역시 서로 우호적 관계를 갖기를 원한다는 답장을 썼다.

 

 

그리고 이 문제를 원만히 해결키 위해 세 명의 사절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했다. 그 중 힐데브란트는 개혁적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의 사람이었다. 사절이 파견된 그 사이에 노르만인들은 비잔틴 군대에 의해 패퇴 당했고 정치는 다시 안정되었으며 동방황제는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주교인 카를라류스의 다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카를라류스는 다시 강경한 태도로 로마교회의 교리와 의식의 문제들을 종교회의를 통해 논의하자고 나왔다. 그들은 화해의 뜻이 없었으며 교황의 사절들은 분노했다. 그때 갑작스럽게 로마에서는 레오 9세가 사망했다. 그러자 사절들의 대표성도 의심을 받았다. 이런 사태진전에 분노한 로마의 사절들은 1054년 7월 16일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에 들어가 제단에다 저주 문을 올려놓고 로마를 떠나 버렸다.

 

저주문은 "이들 모두는 성직 매매 자들, 발레리안주의 자들, 아리우스주의자들, 도나투스파들, 니골라당, 세베리안 주의자들, 마니교도, 나사렛당과 기타 모든 이단자들과 함께 저주를 받을지어다. 악마와 그의 천사들과 함께 저주를 받을지어다. 아멘, 아멘, 아멘"이라고 쓰여있다.

 

동방교회는 이 파문 장을 불태우고 4일 후 즉 1054년 7월 20일 같은 장소에서 카룰라류스는 로마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을 파문했다. 로마교회는 기독교가 아니고. 정통 기독교인 동방교회와는 상관이 없다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이것으로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분열인 동서방의 분열이 공식화되었다.

 

요약:

이 논쟁은 전 세계 주교들에 대한 수위권을 지키려는 교황청의 의지와 결코 이인 자가 되지 않겠다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의지가 서로 충돌한 결과였다. ‘나는 누구도 섬기지 않겠다’가 미카엘 카를라류스의 좌우명이었다고 하니 두 사람 간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몇 차례 화해 시도는 있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두 당사자가 너무나 확고해 한 치도 양보하려 들지 않았던 탓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를 특별히 베드로에게 주신 권한을 교황이 계승했다고 주장하며 교횡이 모든 교회의 신앙과 윤리, 정치에 있어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던  로마 카톨릭이 1054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완전히 나뉘게 된 것은 교리적인 문제보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정치적 중심지인 로마교황과 종교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와의 불화로 867년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포티우스(photius)가 동방교회의 일에 간섭하여 포티우스를 파문하고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포티우스도 로마교황 니콜라우스 1세를 파문함으로 분열이 시작되어 1054년 역시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미카엘 카를라류스와  교황청이 서로 상대방을 파문함으로써 동방과 서방교회는 갈라지게 되었다. 분열 후 서방교회는 로마 가톨릭으로 이어지고 동방교회는 그리스 정교회(동방교회)로 이어진다.

 

레오9세는 이탈리아 남부를 침공한 노르만족에게 패하여 1053년 6월18일에 포로로 잡혀 투옥되었다. 그래서 미카엘 카를라류스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여러 라틴어교회를 폐쇄하고 라틴어로 진행하는 성찬식을 맹렬히 비난하는 동안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레오9세 본인은 이 비극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는 포로생활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지 한 달만인 1054년 세상을 떠났다.

 

 

 

2차분열: 1054년 가톨릭 교회인 동서교회 분열

 

 

동방(비잔틴) 정교회     /      서방 가톨릭교회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2차 분열이후로도 동서 교회의 교류는 계속되었다. 4차 십자군 원정 때 교황 이노센트3세의 주장으로 시작되었으나 십자군들은 교황의 의사를 거스르고 상업적인 이해관계에서 베네치아의 상인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은 침략당하고 라틴제국이 그곳에 세워지는 결과를 낳고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를 로마교회계통으로 세워 로마교회에 예속시켜 동서교회의 분열은 더욱 가중되었다. 1263년에 비잔틴제국은 다시 되찾는다.

 

1982년 바오로 6세와 드미트리우스 1세가 이스탄불에서 만나 동서교회가 서로 화해하였다.

 

 

                                                3차분열: 종교개혁으로 서방교회 분열

         (1517년 - 1648년까지)

 

 

    1517년-1546년  루터의 종교개혁

  1536년-1564년  칼빈의 종교개

1564년-1648년  칼빈 후 개혁

 

 

 로마가톨릭교회    /     프로테스탄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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