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으라면 사도바울을 꼽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사도바울은 신약성경 27권 중 15권을 기록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를 바울이 정립했다고도 합니다. 바울의 기독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울은 복음을 잘 이해했고 따라서 유대교로부터 기독교가 분리될 수 있도록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났는지 사도행전에만 세 번 기록(9, 22, 26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 번째 기록인데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하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한 복음의 핵심을 말씀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고발당하자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서 로마황제에게 항소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울이 유대인이나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자신이 당대 가장 저명한 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말과 글에 능한 실력자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변증할 확신과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정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것도 안하게 되지만 열정이 있으면 못할 일도 찾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정이 중요합니다. 우리도 주님을 향한 열정이 있습니까? 열정은 없고 정열만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길리기아 다소라는 지방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의 학자인 가말리엘에게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배웠던 자였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전하는데 있어 누구보다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했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박해하여 죽이기도 하고 남녀를 결박하고 옥에 넘겼던 자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다메섹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공문을 들고 잡으러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그에게 빛이 비쳤고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바울의 옛 이름이 사울입니다. 이때 함께 가던 사람들은 단지 뇌성이 울었다고 하고 빛만 보았다고 합니다만 사울은 예수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빛이 비추인 것만으로 그가 회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 믿는 자를 죽이러 다니던 자가 갑자기 예수님을 전하는 자로 바뀌기에는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체험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을 달리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가 짐을 끌 때 꾀를 피우면 때리는 매가 가시채인데 오히려 소가 뒷발질해서 스스로 매를 맞으니 얼마나 미련한 일이며 무익한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여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임을 말씀합니다. ‘이런 어리석은 짓을 네가 언제까지 하려느냐?’ 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회심 전에 한 일중에는 첫 번째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의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스데반 집사를 죽이고 그 옷을 사울이라는 청년 앞에 갖다 놓았다고 기록합니다.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책임 맡아 진행한 이가 사도바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도바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의 핍박자이였던 그가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던 사람이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목숨을 위협하던 자가 자신의 목숨도 위협받습니다. 자신은 로마시민권자로서,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으로서, 베냐민 지파로서,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율법의 흠이 없는 자라고 여기던 그가 회심이후에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바울은 ‘가장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다며,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고전15:8이하입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사울이 바울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을 네 가지로 정리합니다. 즉 예수님이 자신을 사도로 부르신 목적이기도 하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첫째는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옮기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단지 어둠과 빛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은 실제로 우리를 어둠 가운데서 빛으로 옮기시려고 오셨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라고 했습니다(마4:16). 골1:13에서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직접 세상에 오신 빛임을 선포했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사도요한도 예수님을 빛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요1:4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합니다. 어둠 속에 헤매는 자는 그것이 어둠인지도 모릅니다. 빛이 비추일 때 비로소 어둠이 드러나고 어둠의 일이 보입니다.
복음은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진리의 빛이요, 생명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우리가 어둠 가운데 거하지 않도록 빛을 비추신 것입니다.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빛을 따라 가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바울도 엡 5:8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벌써 10년도 지난 일입니다만 남미 칠레에서 갱도가 무너져 광부 33명이 지하 691m에 갇혔습니다. 무려 69일 만에 구조했는데 전 세계에 인터넷으로 중계했습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어둠에 갇혀 있다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둠에서 빛을 찾아 나온 것이 아닙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추어 어둠에 있던 그들을 찾아내어 살린 것입니다. 구조한 것입니다. 이처럼 어둠에 있던 우리에게도 빛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빛을 비추신 것입니다.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요12:46에서 예수님은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더 이상 어둠 가운데 거하지 않고 빛으로 인도받습니다. 할렐루야!
둘째는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입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지었으나 죄를 범하므로 사단의 권세 아래, 어둠 가운데 놓이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흑암의 권세자, 어둠의 권세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단의 권세에서 자유케 하시려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단을 이기시고 그의 권세를 깨트렸습니다. 이제 우리를 사단의 통치 아래 종으로 살지 말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로 나와 자유자로 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단의 권세, 곧 어둠과 사망의 권세에서 생명으로, 빛으로 나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요5:24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할렐루야!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은 그의 종으로 살아감을 말합니다. 인간이 언제 사단의 권세 아래에 있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던 인간이 언제 사단의 종이 되어 그의 권세 아래 있게 되었습니까? 롬6:16에 말씀합니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사단의 말에 순종할 때 사단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고 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려고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이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깨트리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셋째는 죄 사함과 거룩함을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사하시려고,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죄인이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기에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의인이 오셔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은 것입니다. 담당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어주셨습니다. 죄의 형벌인 사망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라고 했습니다(18절).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룩한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아무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의사가 아무리 바른 처방을 하고 좋은 약을 줘도 그것을 먹지 않고 가지고만 있으면 아무 효과가 없듯이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한 사실을 듣고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심을 믿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주님으로 이 시간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지난번에 제 사촌 형님에게 전도하니까 자신도 불교 방송, 천주교 방송, 기독교 방송을 다 보고 있다면서 나름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정리해 줬습니다. “다른 종교는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하여 스스로 구원받으려는 것이고 기독교는 우리가 못하기에 예수님이 죄 문제를 대신 해결해줬음을 믿는 것입니다.” 즉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도 있고 엘리베이트도 있는데 다른 종교는 스스로 올라가려고 계단을 오르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엘리베이트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엘리베이트에 타서 버튼만 누르면 올라가듯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이것이 일반 종교와 기독교의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거저 타서 누르기만 하면 올라가지만 예수님은 천국 가는 엘리베이트를 만드느라 십자가 죽음의 희생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 죄를 없이 하시고 거룩한 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된 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함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넷째는 구원받은 우리에게 하늘의 기업을 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은혜만도 감사한데 더하여 우리에게 기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업은 상속자로서의 기업입니다. 예수님이 받을 상속을 우리와 함께 받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을 영광을 우리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하기를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했습니다.(요17:24) 우리는 예수님이 받을 영광을, 상속을 함께 받을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바울은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 사도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는 자는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받고 죄 용서함을 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기업으로 이어받을 상속자가 됩니다. 이것이 죄인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이제 우리도 이 땅에서 빛의 자녀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다가 그 나라에서 영원한 기업도 받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