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돈(趙暾)의 초명(初名)은 조우(趙祐)이며, 쌍성총관(雙城摠管) 조휘(趙暉)의 손자이다. 대대로 용진(龍津)에서 살았고 20세[弱冠]도 안 되어 충숙왕(忠肅王)을 섬겼다. 그때 향리(鄕吏)와 민(民)이 여진(女眞)의 홍긍(洪肯)·삼철(三撤)·독로올(禿魯兀)·해양(海陽) 등지로 도망쳐 들어가곤 하자, 왕이 조돈을 해양에까지 보내어 60여 호(戶)를 추쇄(推刷)하여 돌아오게 하였으며, 〈이후〉 감문위낭장(監門衛郞將)에 임명하였다. 뒤에 다시 해양에 가서 100여 호를 추쇄하여 돌아왔더니, 왕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구마(廐馬)와 능단(綾段)을 하사하였고 곧이어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에 임명하였다. 왕이 훙서(薨逝)하자, 조돈은 용진으로 돌아갔다.
처음에 조휘(趙暉)가 쌍성(雙城) 등지로 반란을 일으켜 원(元)에 들어갔는데,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옛 땅을 수복하려고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고, 대호군(大護軍) 공천보(貢天甫)와 종부령(宗簿令) 김원봉(金元鳳)을 부사(副使)로 삼아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 이인임(李仁任)과 함께 가서 이를 격퇴하게 하였다. 유인우가 군사를 거느리고 철령(鐵嶺)을 지나 등주(登州)에 이르자 쌍성과의 거리가 200여 리(里)였는데, 그곳에서 10여 일이나 머물면서 전진하지 않았다. 쌍성총관(雙城摠管) 조소생(趙小生)은 조돈의 조카였는데, 변고를 듣고 천호(千戶) 탁도경(卓都卿)과 함께 조돈을 불렀다. 조돈이 도착하자 조소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수비할 계책을 세우고 조돈을 위협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일이 급합니다. 숙부(叔父)가 고려(高麗)에서 벼슬하면서 여러 왕들로부터 총애를 받았지만, 오늘 숙부께서 남쪽 고려로 향하시면 쌍성 땅 12성(城) 중에 누가 우리를 따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탁도경과 함께 심복 중에 용감한 자 30명을 뽑아 조돈을 호위하게 하였는데, 실은 구속한 것이었다.
이인임이 유인우를 설득하면서 말하기를, “조돈은 비록 조소생의 숙부이지만 마음은 조정(朝廷)에 있으니 반드시 역적들과 함께 반역하지 않을 것이오. 지금 왕명(王命)으로 그를 회유하면 반드시 올 것이오. 조돈이 오면 쌍성은 격문(檄文)만 보내도 평정될 것이니, 역적의 우두머리는 벨 필요도 없을 게요.”라고 하였다. 유인우가 옳다고 여겨 마침내 밀랍(蜜蠟)으로 글을 써서 조돈에게 보내니 조돈이 글을 보고 숨기고서 기회를 엿보았으나 틈을 얻지 못하였다. 조돈이 어렸을 때 쌍성 사람 조도적(趙都赤, 조도치)의 영민함과 호협함을 보고 그와 함께 교류하면서 깊이 환심을 샀었다. 이때 조도적이 백호(百戶)로서 조소생의 으뜸가는 참모였는데, 조돈이 조도적을 회유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두 녀석이 조정의 명령을 거역한 것은 그대를 복심(腹心)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본래 고려(高麗) 사람이고 그대의 선조는 우리 선조와 함께 모두 한양(漢陽)에서 왔는데, 지금 본국을 배반하고 역적 녀석을 따르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마음인가? 역리(逆理)를 버리고 순리(順理)를 따르며 위험을 버리고 편안함을 취하면 공명(功名)과 부귀(富貴)를 얻을 것이로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니 그대는 이 일을 도모하게.”라고 하였다. 조도적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숙부가 저를 살렸습니다. 공(公)께서 먼저 하시면 제가 따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돈이 기뻐하며 동생 조천주(趙天柱)와 함께 앞장서서 달려 나와 삼기강(三岐江)에 이르렀다. 배를 타고 강 중류에 이르자 기병 100여 명이 강가까지 추격해 왔다가 돌아갔다. 조돈이 용진에 이르러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부인(夫人)을 따라 바다를 건너 나와 등주(登州)에서 만나자.”라고 하였다. 아들 조인벽(趙仁璧)·조인경(趙仁瓊)·조인규(趙仁珪)·조인옥(趙仁沃)을 데리고 하룻밤에 200리를 달려 날이 밝아올 적에 유인우의 진영(陣營)에 나아가 유인우에게 이르기를, “두 역적의 형세가 궁벽하여 장차 북쪽으로 달아날 것이고, 쌍성 사람들은 모두 산골짜기에 숨을 것입니다. 이제 대군(大軍)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반드시 놀래어 항복하지 않고 들판을 비워 먹을 것을 없앨 것입니다. 공을 위한 계책은 내 아들 조인벽을 먼저 보내어 그들을 회유하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유인우도 그렇게 여기고 조인벽과 지통주사(知通州事) 장천핵(張天翮)으로 하여금 쌍성을 두루 다니게 하였다. 쌍성 사람들은 조인벽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서로 말하기를, “조별장(趙別將)이 왔으니 우리들은 다시 살았다.”라고 하였다. 잇따라 와서 항복하고 음식을 마련하여 관군(官軍)을 맞으면서 말하기를, “고려왕(高麗王)이 진짜 우리 임금이시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우리 환조(桓祖, 이자춘)께서 쌍성(雙城) 등지의 천호(千戶)들을 거느리고 내조(來朝)하니 왕이 영접하며 말하기를, “어리석은 민(民)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았는가?”라고 하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기철(奇轍)이 쌍성의 반민(叛民)들과 몰래 내통하여 한패로 삼아 역모를 도모하려 한다고 밀고하였다. 왕이 환조를 설득하면서 말하기를, “경은 마땅히 돌아가서 우리 민을 진정시키고, 만일 변란이 일어나면 마땅히 내 명령대로 하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이 유인우가 머뭇거린다는 말을 듣고 환조를 소부윤(小府尹)에 임명하고, 병마판관(兵馬判官) 정신계(丁臣桂)를 보내어 환조에게 내응할 것을 지시하였다. 환조께서 명령을 듣고 곧 군사들에게 입을 다물도록 하고 행군하여 유인우와 합세한 이후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더니, 조소생(趙小生)과 탁도경(卓都卿)이 처자를 버리고 이판령(伊板嶺) 북쪽 입석(立石) 땅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에 지도(地圖)를 살펴보았더니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 및 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을 수복하였다. 대개 함주(咸州) 이북의 합란(哈闌)·홍헌(洪獻)·삼살(三撒) 지역은 본래 우리 강토(疆土)였는데, 조휘(趙暉) 등이 반역하여 원(元)에 몰수된 지 무릇 99년 만에 이제 모두 수복한 것이다. 정신계가 군사를 거느리고 이판령을 지나다가 여진(女眞)과 싸워 대승을 거두고 그 괴수 첩목아(帖木兒, 테무르)를 참수하여 머리를 개경(開京)으로 보냈다.
유인우가 처음 이르자 단주(端州) 이북 천 수백 리(里)가 순순히 고려(高麗)로 향하였는데, 유인우는 재물을 탐하여 살육을 자행하였다. 조도적(趙都赤, 조도치)이 와서 알현하자 왕이 호군(護軍)에 임명하였고 금부(金符)를 하사하여 동북면천호(東北面千戶)로 임명하였으며 가서 여진을 어루만지게 하였는데, 유인우가 시기하여 그를 죽였다. 장천핵(張天翮)은 유인우의 휘하에 있으면서 죄 없는 이를 함부로 죽이고 우마(牛馬)와 재산(財産)을 노략질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처첩(妻妾)을 빼앗은 것이 무려 9명이나 되었다. 마침내 북쪽 사람들의 귀부할 마음을 막았으니, 조돈(趙暾)이 깊이 원망스럽게 생각하였다. 조돈이 돌아오자 왕이 크게 기뻐하며 예빈경(禮賓卿)으로 올려 임명하였고 개경에 집을 하사하였다.
〈조돈은 공민왕(恭愍王)〉 6년(1357)에 태복경(太僕卿)으로 옮겼다. 조소생과 탁도경은 여진 땅에 숨었다가 형세가 궁해져 항복하고자 했지만, 조도적이 항복하여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옥새(玉璽)가 찍혀 있는 문서[璽書]를 보고서야 항복하려고 하였다. 〈공민왕〉 8년(1359)에 왕이 조돈을 보내어 옥새가 찍혀 있는 문서를 가지고 효유(曉諭)하도록 하였는데, 조돈이 등주(登州)에 이르러 바닷길에 올라 배로 반 달 만에 해양(海陽)에 이르러 옥새가 찍혀 있는 문서를 내려주었다. 조소생 등이 조돈을 따라 입조(入朝)하려고 했다가 다시 다른 마음을 품고 갑옷을 입고 기다렸더니 조돈이 곧 배를 타고 돌아왔다.
홍건적(紅巾賊)이 서경(西京)을 함락하자, 〈조돈이〉 지병마사(知兵馬事)로써 안우(安祐) 휘하에 있으면서 홍건적을 격퇴시켰다. 〈공민왕〉 9년(1360)에 판사농시사(判司農寺事)에 임명되었다. 〈공민왕〉 10년(1361)에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전임(轉任)되어서는 왕을 따라 남행(南幸)하였다. 왕이 조돈과 목인길(睦仁吉)에게 명령하여 복주(福州)의 군사를 나누어 거느리고 행궁(行宮)을 숙위하게 하였다. 공민왕 11년(1362)에 해주목사(海州牧使)로 나갔다가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다. 그 이듬해에 기복(起復)하여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임명되었다가 곧이어 검교밀직부사(檢校密直副使)가 되었으며, 홍건적을 격퇴한 공으로 1등에 녹선(錄選)되었다. 〈공민왕〉 21년(1372)에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간청하여[乞骸] 우봉현(牛峯縣)에서 살았다. 우왕(禑王) 원년(1375)에 용성군(龍城君)을 봉하였다. 우왕 5년(1379)에 나이 들어 용진(龍津)으로 돌아가고자 했는데, 조인옥(趙仁沃)이 따라가려고 하자 조돈이 힘써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가문이 위태로운 시절을 만나 선조의 제사를 보전하는 것이 겨우 작은 터럭과 같았다. 〈그러나〉 현릉(玄陵, 공민왕)의 애정을 과분하게 입어 온 집안이 보전되었으며 지위도 군(君)에 봉해지게 되었다. 너희 형제의 관직도 모두 현달(顯達)하였으나 100분의 1도 보답한 것이 없었으니 너희들은 늙은 애비를 걱정하지 말고 왕실(王室)에 힘쓰는 것을 마치 내 곁에 있는 것과 같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이듬해에 죽으니 나이 73세이었다. 조인벽(趙仁壁)은 여러 번 전공(戰功)을 세워 관직이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