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라는 이름엔 향기가 없다.
비록 자신의 견해가 명확하다 할지라도
거기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굴레가 된다.
비록 자신이 믿는 종교가 명징하다 할지라도
‘이것만이 보물 같다’ ‘이것만이 참이다’하여 애지중지한다면
그런 사람은 그 가르침이 뗏목 같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기의 종교를 존숭한 나머지
다른 이의 종교를 서슴지 않고 비난하는 지경에 이르면
그것은 뗏목을 타는 사람이 아니라 뗏목의 노예가 된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엔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자신이 믿는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 열심히 수행하려 하기보다
다른 이의 종교를 ‘우상 숭배다’ ‘미신이다’ 하며
비난하기에 바쁜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가르침의 노예가 된 경우이다.
불교 중흥에 크게 기여했던 인도의 아쇼카 왕은
다음과 같은 칙령을 바위에 새겨놓도록 했다.
“남의 종교를 존중하면 자기가 믿는 종교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내 종교를 찬양하기 위해 남을 헐뜯는 사람은
결국 자기가 헌신하려던 제 종교를 더럽히는 사람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 아쇼카 왕의 경구를
귀담아 들어야만 할 사람들이 너무 많다.
찬양과 헌신이 지나쳐 누워서 침 뱉는 격이 되는 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 종교란 무엇인가.
불교·개신교·천주교…라는 이름이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진리의 가르침’을 그 내용으로 하기에 종교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름으로서의 불교·기독교…를 두고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하며 다투는 것은,
예컨대 장미를 좋아하는 사람과 국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서로 장미가 좋다, 국화가 좋다고 다투는 것과 진배없다.
국화도 꽃이고 장미도 꽃이다. 아름다움과 향기는 꽃에 있는 것이지
국화라는 이름, 장미라는 이름에 있는 게 아니다.
종교를 믿는 것은 진리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지
이름을 따르는 게 아니다.
이름엔 진리가 없다. 진리엔 이름이 없다.
진리는 오직 진리 그 자체이다.
고로 ‘불교’라 함도 ‘기독교’라 함도 다 이름이다.
스스로 참된 나로서 수행하는 이는 결코 이름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출처 :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