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 장하빈
힌남노 오던 밤 외
힘센 그 남자는 북태평양 먼 바다의 노비로 태어났다
돌가시나무 새싹이란 태명을 지닌 그 남자가 남해에 상륙하여 동해로 이동하는 새벽녘, 나 홀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쳤으면…
유리창이 덜컹대고 지붕이 들썩이고 검은 이파리가 얼굴에 자꾸만 달라붙었다
누가 이 달팽이집을 떠메고 갈세라, 홑청을 몸에 둘둘 말아 무릎 꿇고 앉았다
망망대해 떠도는 황포돛대 같은 이 밤 무사하길…
저녁 항구에 정박한 배들이 밧줄로 서로 비끄러맨 채 떨그럭떨그럭 생채기 내던 긴긴 밤의 터널 끝은 어디인가
돌가시바람 잦아들며 날이 새자, 지붕 용마루가 혹여 날아갔을까 얼른 뛰쳐나가 보았다
한데 이게 어인 일이람!
힘센 그 남자가 비질하며 한바탕 몰아치고 간 뜰에 꽃무릇이 화사花蛇처럼 머리를 쑥, 쑥 내밀고 있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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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눈사람
너는 하늘하늘 하늘에서 내려온 하얀 천사
손발 얼어붙고 찬바람 부는 계절을 우리 곁에 머물렀던 눈아이
집 나온 가로등처럼 골목 어귀에 우두커니 떨고 섰거나
동네 놀이터 시소 위에 올라앉아 밤새 눈물짓고 있었어
천애 고아! 라고 세상 사람들이 너더러 빈정거릴 때
따뜻한 방안으로 몰래 들여놓았다가 낭패를 본 적도 있었어
가온누리 가온들찬빛 나빛 밝은빛누리예 벼리 온새미로 튼동 한길찬 한별나라…
너랑 눈이 마주칠 적마다 빛나는 이름 하나씩 불러주었지
노랑할미새 우는 봄날의 기약은 너에겐 이별 통고였던 거야
‘立春大吉’이라 대문에 써 붙인 날에 게눈 감추듯 사라지고 말았거든
하얀 천사 머물던 자리마다 검은 눈물 씨앗 번지어
캄캄한 외로움에 떨고 있는 너, 너의 빈 둥지 빌려 벙어리뻐꾸기 알 놓아 기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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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빈
본명 장지현. 1997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비, 혹은 얼룩말』, 『까치 낙관』, 『총총난필 복사꽃』, 『신의 잠꼬대』가 있다. 시와시학상 동인상, 대구시인협회상 수상했으며 팔공산 문학의 집 <다락헌>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