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이 말씀을 하시고 -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고별 설교는 끝이 났다. 이제 그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말머리를 돌리신다. '이 말씀'은 13-16장 사이에 나오는 예수의 고별 설교를 지시하며 보다 가깝게는 16:33에 나타난 세상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선언을 가리킨다...한편 혹자는 본장 기도가 13:30, 31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고별 설교 뒤에 그의 제자들과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사실을 구태여 부인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이별을 눈 앞에 두고 그의 친구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일반적인 시각에서 볼 때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다.눈을 들어 - 요한은 예수의 몸동작 하나까지도 구체적으로 기록함으로써 그날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한 체험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는 하나님께 제사나 예물을 드릴 때 취했던 전형적인 자세였으며 또한 일반적인 기도의 자세였다. 예수는 11:41에서도 이런 자세로 기도하셨는데 이는 공간적인 개념에서의 '위쪽'이 아니라 존귀하신 하나님을 우러러 본다는 의미에서의 위쪽을 가리키며 결국 아버지와의 영적인 교제를 상징한다.
아버지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테르'는 막 14:36에서와 같이 아람어 '아바'를 전제로 한 말이다. 이 아람어는 자녀가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용어로서 우리말 '아빠'와 비슷한 어감을 준다. 본장에서 예수는 이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와 하나님의 지극히 친밀하고도 유기적인 관계를 분명히 함과 아울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시사하는 말이다.
때가 이르렀사오니 '때'란 대속을 위한 십자가 수난의 때를 가리킨다. 대적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예수를 제거하려 했으나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한' 까닭에 예수께 손을 대지 못했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 예수는 자기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구하는 영광 조차도 아버지의 영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은 예수 자신을 위한 기도라기 보다는 차라리 성부 하나님을 위한 기도이다. 한편 '영광'(돝사조)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절정을 나타낼 때 반복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영광'이라 표현하신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함으로써 맡겨진 대사명을 완벽하게 이루셨다는 점에서 십자가는 곧 영광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성자의 관심은 늘 성부의 영광에 고정되어 있다.
[요 17:2]"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 -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자들에게 영생을 제공한다. 본 구절과 유사한 표현은 6절과 9절에도 나오는 데 이것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예수의 열 두 제자를 가리킨다...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강조된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연합 관계가 이 고별 설교에서 다시 설명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 이 하나의 공동체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2) 우주적 교회를 의미한다는 견해. '판'은 제자들 간의 소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롬 8:28)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모든 자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집단이라고 본다.
예수는 6:39에서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라 말씀하신다. 이들은 창세 전부터 미리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세상과 대립적 관계에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만민'(파세스 사르코스)과도 구분되는 자들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생명의 떡에 초대된 자들이다. 만일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점을 배제할 수는 없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 - 만민은 '모든 육체' 즉 모든 인류,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들을 의미한다. 이들을 다스리는 예수의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는 세상 임금의 주권 행사와 구분되는 것으로 군림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부여받은 권세이다.
즉 이 권세의 목적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며 반면에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는 마지막날에 인류를 심판하는 권세를 지니고 계시며 또 그의 권세는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한편 십자가 수난을 앞둔 시점에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선포하신 것은 이미 십자가의 죽음의 승리와 영광을 바라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요 17: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아는 것이니이다 - 십자가의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을 바라보며 예수는 '영생'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어 왔었다.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 6:3)라고 했으며 예레미야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다'고 했다.
'안다'는 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하며 본절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수식하는 말로 사용됨으로 예수와 하나님의 인격적 하나됨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생들에게 가장 쉽게 그리고 충분하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행복과 영생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주인으로서 영생의 주체가 되신다. 한편 기도중에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저희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식하는 것'이란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해석하면 헬라어 원문에 무리가 따르게 된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이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이 견해는 무난하게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표현은 메시야의 자기 증거인 셈이다. (3)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예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표현이라고 하는 주장이었다..
예수께 대한 요한의 고백은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반복 기록되었다. 그러나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그날밤의 기억들을 잊어버렸다고 구태여 가정할 필요는 없다.
[요 17:4]'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요 17:5]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6]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은 아버지의 일을 이루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그 인물 전체를 대변하는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예수께서 나타낸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품성, 인격, 능력, 구속 사역, 은혜, 사랑 등 모두를 포함하며
그것은 예수 자신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세상 앞에 현현되어졌다. 예수의 자기 계시는 신적 존재의 영원하고 본질적인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신 것이다.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는 대략 두 가지 견해로 갈린다. (1) 이미 그들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되어 있었음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
(2) 예수를 만나기 전에 그들은 옛 언약의 체제 하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었음을 갈리킨다고 보는 견해. 이 중 하나를 확증적으로 지지하기는 어려우나 문맥상 (1)의 견해가 더 무난하리라 본다.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 하나님과의 정당한 관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써 유지된다. 사실 본서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단지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으며,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또는 '계명들'을 지키도록 명령받았다. 한편 예수는 자신의 말이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시며 자신의 말을 지키는 자를 아버지께서 사랑하리라고 하셨다. 따라서 본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율법이나 구약의 계명들을 준수했다는 의미보다 본서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말씀'(로고스)이신 예수를 영접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