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김지하를 더 못 볼 것 같은 기분...사실상 마지막 인터뷰였다
조선일보
최보식 편집인
입력 2021.04.24 08:15 | 수정 2021.04.24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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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김지하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글을 쓸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그는 초기 치매 증세도 앓고 있다
거의 1년 반 넘게 외부인과의 접촉도 끊었다.
어제 지인이 카톡으로 ‘김지하 시인도 한마디 했군요. 세월호 가족들에’라며 이런 글을 보내왔다. 주위에 많이 홍보해달라는 전파자의 주문이 달려있었다.
김지하 시인
<세월호 피해자! 도대체 왜 특별히 하늘같이 비싼 사람들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피해 학생들은 개인목적의 여행을 가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다,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들은 누가 희생시켰는가? 세월호 선주와 사고가 나도록 원인을 제공한 제한된 수의 공직자 들이다,
대통령도 정부도 이들에게 안전사고를 교사한 바가 없다. 안전사고에 대한 배상은 사고를 낸 기업체로부터 받아야하고, 사고 유발의 직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공직자들로부터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국민 모두가 물어줘야 하는가? 국민이 어렵게 낸 세금을 이런데 지출해서는 안 된다...>
이는 김지하의 글이 아니었다. 글 수준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이따위 글을 쓴 뒤 ‘김지하 글’이라며 퍼뜨리고 있는 모양이다.
한때 자치단체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내 지인조차 이를 ‘김지하 글’로 알고는 보내온 것이다. 그는 진지한 대학교수로부터 받았기에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마 교수도 누군가로부터 받아서 전해줬을 것이다. 우리사회가 가짜뉴스에 얼마나 취약한가. 이렇게 멀쩡한 사람들도 다들 ‘김지하 선생이 한 말씀 했구나’하고 믿으니 말이다.
‘김지하 가짜글’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2014년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됐을 때부터다. 인터넷과 SNS에 ‘김지하 시인의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김지하 시인의 절규―젊은이들에게’ ‘김지하 시인이 언론인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등이 떠돌았다.
이런 가짜글로 김지하는 심한 곤욕을 치렀다. 김지하 측은 '가짜글을 유포하는 단체와 개인에 대해 명예훼손과 모욕죄, 저작권법 인격권에 따른 형사 고소를 진행하겠다’며 경찰에 수사까지 의뢰했다. 하지만 피의자를 검거하지 못해 기소중지 됐다.
그 뒤 탄핵 촛불집회에서도 ‘김지하가 이렇게 말하면…’으로 시작되는 가짜글이 유포됐다. 종북 세력이 주도한 촛불집회를 크게 보도하는 종편과 조중동 등 언론에 대해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작년 3월에는 민경욱 의원이 공천 면접 심사를 앞두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지하가 토(吐) 할 것 같다’는 제목의 장시(長詩)를 올렸다.
‘이 씨XX, 잡것들아!’ ‘주사파 떨거지 놈들아! 원전하며 최저임금 손해 본 장부 책 잉크 빛도 선명하다’ ‘노회찬의 투신에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기적’ ‘청계천 전태일도 조작한 건 마찬가지! 너희 김일성의 장학금 받은 놈들이 휘발유 뿌리고 라이터 땡긴 거지!’ ‘개쌍판 이해찬’ ‘문재인 X… 얼마나 사악하고 더러운지 뒤늦게 알게 되고’…. 이를 다 소개한 뒤 마지막에 “김지하 시인의 글이라고 하는데 아직 확인 중”이라고 덧붙였다.
몇 년 전부터 김지하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글을 쓸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세상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는 초기 치매 증세도 앓고 있다. 거의 1년 반 넘게 외부인과의 접촉도 끊었다.
김지하 부부는 아주 드물게 어떤 문제가 있으면 전화로 내게 상의하거나 부탁하곤 했다. 내가 김지하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18년 3월이었다. 당시 보수 진영에서 대규모 3·1절 집회를 열겠다는 신문 광고를 낸 적 있었다. 주최 측 대표로 ‘김지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사실 여부 확인 차 통화를 했고, 다음날 술 한 병 들고 강원도 원주에 있는 집을 찾아갔다.
"술·담배 안 한 지 오래됐소. 내가 보수의 리더인 것처럼 광고가 실렸다고 했소? 내 나이 칠십팔이오, 몸도 아픈 내가 지금 정치하게 됐소? 글도 시(詩)도 안 쓰고, 그림이나 그리며 원보 엄마(부인 김영주)만 모시고 사는데….당신도 꽤 늙었구먼. 우리가 얼굴 안 본 지 10년 됐나, 20년 됐나. 김대중 시절 당신 인터뷰로 그쪽 사람들에게 많이 시달렸지…."
―보수 진영에서는 이런 난국에 김 선생께서 나와주셨으면 하더군요.
"내가 어떻게 우파의 리더가 될 수 있겠소. 나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오. 중간파도 아니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걸 내 사명으로 하는 사람이오."
―새로운 길이라는 게?
"한마디로 정의하고 얘기하는 게 힘이 들지만, 우리 전통 속에서 세계적인 보편성을 찾는 것이나 세상을 바꾸는 주체로 여성성(女性性)에 주목하는 것인데…."
―지금 현실의 긴박성과는 떨어진, 너무 추상적인 답변이군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신문기자처럼 말해야 하나, 정치가처럼 말해야 하나. 안 그렇지 않소? 그런 얘기 할 수 있으면 내가 왔다 갔다 하며 돈을 벌지. 나는 아름다울 미(美), 배울 학(學), 미학 전공이오. 예술의 원리와 효과에 관심 있고, 연극 연출, 그림, 시를 해왔잖아. 그렇게 해온 사람의 말이란 애매하고 어정쩡할 수밖에 없는 거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만날 얻어터지기만 하고 빛을 못 보고 살았지요."
―'김지하'라는 이름을 얻었고, 서로 모셔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중요한 거요? 그게 좋은 거요? 그걸 바라고 살아온 사람 같소? 잘 살아온 것도 아니지만 잘못 살아왔다고 얘기하고 싶지 않지만…."
―돌아보면 어떤 점이 가장 아쉬움으로 남습니까?
"많지요. 중요한 것은 내가 못났다는 겁니다. 나는 씩씩한 사람이 못 돼. 원래 겁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오. 감옥을 예감하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결심해야 돼. 적당히 결심하지 못해. 집사람은 이를 잘 알지. 그래서 고통 받았지. 집사람한테 늘 미안해. 워낙고생을 많이 했어."
김지하 시인 부인 故김영주 토지문학관 관장
인터뷰 기사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
‘이제 그는 걸음걸이가 불편한 노인이었다.’
육신만 그런 게 아니었고, 그때 이미 김지하는 언어 능력이나 논리적 사고 등에서 위태로워 보였다. 김지하 부부와 점심을 먹고 작별했다. 생전에 그를 더 이상 못 볼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인터뷰("내가 못났다는 거요… 난 씩씩한 사람이 못 돼, 겁이 굉장히 많고")가 사실상 김지하의 마지막 인터뷰가 됐다. 며칠 뒤 김지하는 내게 ‘唯弘益’(오직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라)이라는 글이 적힌 난초 소품을 보내왔다.
김지하 시인이 보낸 난초 수묵화
그날 만남이 있고서 1년 반쯤 지나, 그의 부인(김영주 토지문학관 관장)의 부고를 받았다. 전혀 예상 못한 기별이었다. 고인에 대한 애틋함과 함께 이제 김지하를 누가 돌봐줄 건가 걱정이 앞섰다. 원주의 한 병원에 차려진 빈소에는 조문객들도 얼마 되지 않았다. 김지하는 장례식장에 없었다. 잠깐 통화했는데, 술 취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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