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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3일 독일통일의 법제도적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1972년 동서독기본조약이다. 1972년 12월 21일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된 지 18년이 채 안된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통일되었다. 1972년 동서독기본조약의 체결 배경과 그 내용을 이해하지 않고는 독일의 동방정책과 독일통일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동서독기본조약의 체결 배경은 무엇이고, 그 조약의 핵심내용이 무엇이길래 전쟁범죄국인 독일은 유럽 주변국이 가장 반대하는 독일통일을 어떻게 순조롭게(2+4+35) 이루었고 거기에서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인가?
1992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30주년을 맞이한 한반도는 아직도 76년 장기 분단의 질곡과 숨막히는 67년 정전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특히 한반도 분단은 미․소의 기획분단이고, 주변 강대국의 냉전질서에 따른 패권경쟁의 희생물로서 그 장기화가 지속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4.27판문점선언 및 9.19평양공동선언 그리고 최근 UN 총회에서 연속 3년째 종전선언을 외치고 있건만, 동북아에서 ‘샌프란치스코 냉전체제’라는 빙하는 전혀 녹지않고 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더구나 일제의 침략전쟁인 태평양전쟁 종결시에 연합국은 1943년 카이로선언과 1945년 포츠담선언에서 전쟁종결 후에 조선의 자주적 독립국가를 국제문서로 약속했고,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문서에서 이에 모두 서명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국제사회와 연합국들은 한민족의 자주독립과 한반도 분단극복에 적극 협조해야 할 도덕적 국제법적 의무가 있다.
또 체결의 시대적 배경도 다르다.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는 당시 1986년 구소련 붕괴,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 붕괴라는 탈냉전 국제정세에서 6.25 한국전을 직접 한 남북한(특히 북한)은 정치적 화해와 군사적 신뢰구축이 긴급히 필요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1989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첫 번째 단계인 남북한 화해협력 단계의 기본문서이기도 하다.
반면 동서독기본조약은 양독일이 독일 통일을 장기적 목표로 미루고 독일과의 유럽국가 간 평화를 강조하면서 양독 간에는 현실인정(status quo) 위에 평화공존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법적 기본 문서이다.
동서독기본조약은 1969년 10월 28일 집권한 사민당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의 동방정책(Ost Politik)의 결정체가 녹아들어가 있다. 동서독기본조약 체결을 위해서 집권 후 바로 시작한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1969.10.28.)의 핵심철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에 있다. 그 2대 실천원칙은 ‘접촉을 통한 변화’ 와 ‘무력 포기’ 원칙이다.
독일의 동방정책의 결정체가 담긴 1972년 기본조약과 기본조약체결 이전에 체결한 모스크바조약(1970.8.12.),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1970.12.7.), 4대국 베를린협정(1971.9.3.) 속에는 바로 동방정책의 핵심철학과 양대 원칙을 관철시켜서 독일통일을 가장 두려워하는 소련과 폴란드를 안심시켜 협력하게 하였다.
우선 동방정책의 철학인 현실인정 정책으로는 1972년 12월 기본조약체결 이전에 이미 평회통일외교를 시작하였다.
첫째, 기본조약은 현행 유럽국가 간 경계선 인정 및 불가침 원칙을 명시했다. 현 서독과 동독 경계선 인정, 서독의 주변국과의 경계선 인정; 동독의 폴란드 및 주변국 사이의 현행 경계선 존중 및 불가침 조항이다.
엄격히 보아서 현 유럽에서 경계선 인정 및 불가침은 독일의 재통일 관점에서 볼 때 분단국 독일로서는 영구한 분단 고착화의 상징인 국경선으로 응고되어 구 독일제국 영토회복이 불가능한 위험성을 내포한다.
또 이것은 서독 기본법 전문의 재통일명제(Wiedervereinigungsgebot:“... 모든 독일 인민은 자유로운 민족자결로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완성할 것이 요청된다...”)에도 명백히 반 한다. 실제로 서독 남측 바이에른 주지사는 1972년 기본조약은 서독기본법 독일 통일재명제에 반한다고 서독 연방헌법재판소에 위헌소송을 제기하였다.
둘째로 브란트 수상은 1972년 기본조약 체결 이전 1970년에 서독은 소련, 체코, 폴란드와의 불가침조약을 개별적으로 맺어 경계선 불가침조항을 포함시킨 현실 인정 정책을 폄으로써, 유럽 주변국들을 안심시키고, 1972년 기본조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신뢰와 협조를 유도하였다.
그러면서도 동서독기본조약에서 서독은 동독이 원하는 서독으로부터 국제법적 국가승인 요구만은 승인하지 않았다. 대신에 제1조 양독일의 평등에 기반한 선린우호관계발전, 제2조에서 주권평등, 영토고권 존중, 제4조 국제무대에서 단독대표권 포기, 제6조 영역한정의 원칙 등 사실상 동독에 대한 정치적 실체 인정 형식으로 수렴하였다.
이처럼 서독은 동독을 사실상 국가성을 인정하면서도 동독에 대한 국제법적 승인은 끝까지 보류하여 분단고착화방지 법제도적 장치를 여러 곳에서 치밀하게 해놓았다. 그 한 예로 동서독기본조약 부속문서인 “서독 연방정부가 동독정부에 보내는 서한”에서 “이 기본조약은 서독정부의 기본법 전문에서 명시한 재통일명제(”독일 인민이 자유로운 자결로 재통일을 한다”)라는 정치적 목적에 반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셋째로 동서독 기본조약 전문은 민족 개념 및 독일국적 문제와 같은 양독 간의 정통성 시비, 이념적 논쟁은 보류하고 우선 분단으로 인한 양편 주민의 인간적 고통경감(menscheliche Erleichtung))을 위해서 동서독교류협력원칙에 합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1조 평등원칙에 의한 선린우호관게 발전, 제4조 국제무대에서 단독대표권 포기, 제8조 기체결조약 존중주의를 명시하였다.
넷째로 기본조약은 동서독 관계의 법적 성격인 ‘잠정적 특수관계’의 근거를 기본조약 본문에는 명시하지 않았다. 대신에 1972년 기본조약이 서독 기본법의 재통일명제(Widervereinigungsgebot)에 반한다는 서독연방헌법재판소 위헌소송 판결(1973.12.)을 통해서 동서독 법적 관계가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가 아닌 ‘잠정적 특수관계’임을 판시하였다. 이는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가 전문에서 남북한의 법적관계를 ‘잠정적 특수관계’로 명시적으로 규정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잠정적 특수관계의 사례로는 민족내부거래와 상주대표부가 대표적이다. 독일에서 민족내부거래의 법적 근거는 1945년 포츠담협정-1951년 베를린협정에 법적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실제로 양독을 발전시켰다. 서독은 이를 국제적으로도 공인받았다. 동서독 간의 거래가 대외무역(trade)이 아니고, 민족 내부거래(internal-trade)임을 WTO 및 EC에서 공인받아 무관세(No Custom)로 회원국이 아닌 동독에게도 큰 혜택을 주었다.
또 상주대표부는 동서독기본조약 제8조에 직접 명시하였다. 양독간에는 국제법적 승인의 위험성이 있는 외교공관 설치 및 외교관 교류 대신에 상주대표부 교류를 통해서 영사기능만을 하도록 하여 분단 고착화를 피해나갔다.
다섯째, 동방정책의 두 번째 실천원칙인 무력포기 정책으로 동서독기본조약은 그 전문에서 동서독 간 무력 사용 및 위협금지, 경계선 불가침 그리고 제3조에서 UN헌장 목적과 원칙에 의한 분쟁의 평화적 해결, 힘의 사용 위협 금지, 영토고권 존중, 현존 경계선 불가침을 명시하였다.
여섯째, 동방정책의 두 번째 실천원칙인 ‘접촉을 통한 변화’는 기본조약 제7조에서 전 분야에서의 교류협력 약속이다. 그리고 동독이 교류협력 위반시에 국제적 보장을 담보받는 제5조 유럽안보협력회의(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Europe:CSCE) 가입 약속이다.
양독은 동서독 기본조약 제5조에서 유럽국가와의 평화증진, 나아가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에 협력을 약속하였다. 크게 보아 동서독은 다자안보협조체제에 적극 가입하여 협력함으로써 독일통일에 편견을 갖고 있는 나라들을 안심시키고 신뢰와 협조를 얻으려는 것이다.
특히 서독이 CSCE 제 2부에서 규정한 국경불가침 원칙을 수락한 것은 독일통일에 반한다는 반대 국내여론이 매우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독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현실인정(현존 유럽국가들과의 국경선 인정=분단고착)을 수용하고 동서이념을 초월하여 다자협력기구에서 통일외교 협력활동을 하였다. 대신에 서독은 CSCE 후속회의를 통해서 동독과의 교류협력 위반시에 국제적으로 알림으로써 국제적인 보장을 받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일곱째, 동서독 기본조약 자체는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전문처럼 통일을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독일통일에 족쇄가 되는 장치에는 매우 세심하게 피해갔다. 한 예로서 제3조에서 현존 국경선(Staatsgrenze)이라는 용어 대신에 현존 경계선(Grenze)이라는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여덟째, 기본조약 제10조에서 이 조약은 비준을 필요로 하며, 비준각서를 교환한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이는 기본조약이 국제조약임을 암시하였고, 73년 5월 11일 서독연방의회에서 기본조약 비준동의가 있었다. 이어 5월 25일 연방상원을 거쳐 6월 6일 이 조약에 관한 독일 국내 법률이 효력을 발하면서 이 조약은 독일 국내에서 효력을 갖게 되었다. 나아가 이 기본 조약은 UN사무처에 기탁하여 조약으로서 효력을 국제적으로 갖게 되었다.
반면 남북기본합의서는 발효에 필요한 절차를 거쳐서 발효한다(제25)고 규정하였지만, 1992년 당시 국무회의 의결과 관보게재 절차로 끝냈다. 조약이 국무회의 의결, 관보게재로 끝나면, 법률이 아닌 명령 정도 법적 성격을 지닌다. 1999년 헌법재판소 및 대법원 판결은 남북기본합의서가 공동성명서 또는 신사협정 정도의 성격이라고 판시하였다. 동서독기본조약은 법규범성 제고에 직접 명시하고, 또 실제 이행하였다.
한마디로 독일 통일 전 과정은 법치주의 근거하에서 세심하게 진행되었다. 또 그 중심은 1972년 기본조약 체결로 구체화되기 시작되었다. 동서독 기본조약은 그 본조약은 전문과 10개조로 전문, 제4장, 25개조로 된 남북기본합의서 보다는 짧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속문서에서 매우 세심하게 교류협력을 규정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독일통일 프로세스는 동서독 양국간(2), 4대 점령국간(4), 헬싱키선언 가입국간(35) 세 가지 차원에서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나아가 각 차원의 법적 토대로서 동서독 양국 간에는 1972년 동서독기본조약, 4대 점령국 간에는 동서독교류협정 인정 및 보장(4대국 베를린협정, 1971.9.3.), 유럽안보협력회의 가입국 간에는 유럽안보협력회의 최종결의(CSCE/final act/1975.8.1.)에 근거한 국제적 보장이 있다.
서독의 동방정책은 그 철학인 현실인정(status quo: 동독을 국제법적 승인이 아닌 사실상 국가성 인정)읕 통해서 현실극복이라는 장기적 분단극복 정책이다. 1972년 동서독기본조약은 서독이 원하는 교류협력을 통한 변화를, 동독의 국제법적 승인 요구를 모두 지혜롭게 수용하였다.
기본조약은 동시에 독일통일을 강하게 반대하고 두려워하는 유럽주변국을 안심시키 위해서 유럽의 평화, 현행 국경선 불가침 원칙를 강조하는 조항을 명시하였다. 특히 제1부 현존 국경불가침원칙이 명시된 헬싱키 유럽안보협력회의의 최종결의에 동서독이 가입하여 협조를 약속한 것은 분단고착을 감수하면서도 현실인정 정책을 통해서 유럽국가들의 신뢰를 얻으려는 고민의 산물이다.
특히 소련은 CSCE의 국경선불가침원칙을 통해서 제2차 대전 이후 그들이 얻은 성과, 즉 동구권의 사회주의 체제와 그들의 국경, 그리고 두 개의 독일을 인정받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독은 유럽안보협력회의 최종결의 제3부(인권 및 기타분야 협력)을 중시하였다. 특히 제3부를 통해서 동서독간 인적교류, 물적교류에 관심을 두고 헬싱키결의에 협력하였다. 동독은 소련처럼 1부 현존 국경선인정을 통한 국제법적 승인, 제2부 경제․과학기술교류를 중시했다.
결국 역사의 신은 서독 동방정책의 손을 들어주고,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통일하였다. 서독기본법 제23조에 의해 동독이 1990년 3월 최초 자유총선을 거쳐서 주체적으로 결정하여 서독연방에 편입식(Beitritt/Accession) 통일방식을 따랐다. 현실인정 정책에 근거한 ‘접촉을 통한 변화’와 ‘무력포기 원칙’을 내세운 동방정책이 결국 성공한 것이다.
첫댓글 접촉을 통한 변화와 무력포기 원칙으로..
이 세계에 마지막 남은 분단국,
한반도도 속히 평화통일을 이루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