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ㅡㅡㅡㅡㅡ 인생도 죽음도 일회용이다. 다시 살아볼 수도 없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떠나보낸 사람에게 한 번 더 작별 인사를 할 수도 없다. 슬픔은 일회용이 아닌데, 우리는 왜 슬픔을 대신할 방법부터 마련하는 걸까.
장례식장에서 가장 먼저 조문객을 맞이하는 건 근조화환이다. 길게 늘어선 근조화환의 숫자는 망자가 생전에 이루어놓은 지위나 부를 평가하기도하고, 곡비를 대신하기도 한다.
조문객들은 검은 색 옷을 입고, 조의금 봉투와 꽃 한 송이로 고인을 잠시 애도하고, 상주에게 위로를 전하고 돌아선다. 국화는 시들고, 눈물은 탈진하고, 상주의 목울대는 반복해서 움직이지만, 정작 애도의 진정성은 어느 곳에서도 확증되지 않는다. 요즈음은 ‘무빈소 장례’를 선호한다고 한다. 어찌하든 산 사람은 살아야한다는 이유로 애도는 상품화되고, 슬픔은 의례화가 되고 있다. 시대에 따라 장례의 풍습도 변하고, 우리들의 슬픔도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사흘 동안 영정을 지켰던 화환은 재활용할 수 있어도, 죽음은 재활용할 수 없다. 장례 절차는 생략할 수 있어도, 한 사람의 생애를 생략할 수는 없다. 무엇이 진심이고 무엇이 관습인지 쉽게 분리할 수 없어서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