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회] 박정희·윤보선 ‘사상논쟁’ 취재
리영희 평전/[7장] 초년기자, 박정희와 치열한 대결 2010/05/28 08:00 김삼웅박정희는 정치적 곡예를 거듭한 끝에 ‘본연의 임무로 복귀’라는 혁명공약을 헌신짝 버리듯 하면서 1963년 2월 26일 민정불참을 선언했다가 3월 16일 이를 번복, 마침내 민정참여를 결정했다. 이에 앞서 1962년 12월 17일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국민투표를 통해 채택하고, 4대 의혹사건을 일으켜 마련한 막대한 정치자금으로 민주공화당을 사전 조직했다.
야당 인사들에게도 정치활동이 허용되면서 몇 갈래로 정당이 조직되었다.
구신민당 계열은 윤보선 중심의 민정당(民正黨), 구민주당 계열은 박순천 중심의 민주당, 그리고 김병로 중심의 국민의 당, 허정 중심의 신정당이 각각 창당되었다. 야당은 이합집산과 후보 단일화 작업 끝에 민정당의 윤보선이 대통령 후보로 뽑혔다. 공화당에서는 박정희가 후보에 선출되었다.
군사 쿠데타를 주동한 인물이 여당의 후보로 나선 가운데 ‘민정이양’이라는 기묘한 제5대 대통령 선거가 1963년 10월 15일로 공고되었다. 선거전은 공화당의 박정희와 민정당의 윤보선 양자 대결로 압축되고, 선거 중반전에 이른바 ‘사상논쟁’이 벌어졌다. 민정당 측에서 미국 시사지 <타임>에 보도된 박정희의 과거행적, 즉 국방경비대(육군) 내의 남로당 비밀조직의 정보책임자였다는 것, 여수·순천사건 때 경비대 내의 남로당 가입 군인들의 비밀명단을 미군 정보기관에 넘겨주었다는 것, 그 때문에 수백 명의 장병이 체포·감금되고 처형된 장병도 있었다는 것, 그 공로로 파면됐던 군에 복직 임관되었다는, 실로 어마어마한 내용이었다.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이 과거 남로당의 핵심이었다는 미국 언론보도와 야당의 폭로는 선거전의 ‘핵폭발’이 되고도 남았다. 리영희는 투표를 앞두고 심한 갈등을 느꼈다. <타임>이 박정희의 남로당 관련 기사와 함께 그가 한국군 장성급으로서는 드물게 청렴하고, 원칙주의자이고, 군의 상부나 미국 군사고문관들에게도 비굴하지 않고, 부하들의 존경을 받는 청빈한 장교라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이런 엇갈린 미국 내의 한국 정세 평가 때문에, 한국 국민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적잖은 혼란을 겪었어요. 미국 정부의 의중은 밝혀지지 않았어. 때문에 남한 유권자들은, 이 두가지의 상충되는 박정희 인간평가를 놓고 어느 쪽인가하면, 군부 독재자라는 부정적 사실보다 오히려 박이 과거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에 친근감을 가졌을 거요. 그리고 박이 청렴결백한 장교로, 대한민국 내부에서 예외적으로 자주성이 강한 장교라는 점도 그들의 호감을 사게 됩니다. 좌익사상의 개인이나 그 가족들, 이승만 집권기의 오랜 세월동안 가족 누군가가 좌익이었던 까닭으로 연좌제의 핍박을 당해온 가족들은, 박정희가 ‘여수·순천사건’뒤에 남로당과 동지들을 배신하고 미국 정보부에 붙은 데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주석 13)
윤보선의 진영에서 일으킨 ‘사상논쟁’은 오히려 박정희에게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6.25를 전후하여 이데올로기 문제와 관련하여 희생자가 많았던 지역에서 박정희의 표가 윤보선보다 더 많이 나왔다. 이로써 박정희는 15만 6천여 표로 윤보선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지 2년여 만에 국민 직선에 의한 합법적인 대통령이 된 셈이다.
리영희는 5.16 군사쿠데타부터 18년간 박정희의 강압통치에 맞서 필화사건으로 구속되고 2년 동안 옥살이를 하던 중 박정희의 피살 소식을 들을 때까지, 언론인으로 또는 대학교수의 신분으로 박정권과 줄기차게 싸웠다. 그래서인지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매몰차다.
요컨대 박정희는 일제시대에는 천황 숭배자이면서 민족의 배반자였고, 해방이 되자 그 당시 남한의 사상적 주류였던 남로당(공산주의)에 재빨리 편승했는가 하면, 여수·순천 사건으로 형세가 불리해지자 자신의 사상과 충성을 맹세했던 남로당은 물론 자신의 책임으로 관리하고 있던 비밀당원의 명단까지 미국 군정에 팔아넘긴 자로서 철저한 기회주의자이고 변절자였지. (주석 14)
리영희는 29세 때인 1957년부터 1963년 봄까지 6년여 동안 외신기자 생활을 했다. 뜨거운 열정과 날카로운 이성으로 국제사회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지식과 시야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외신부에서 국제문제를 다루는 업무는 자신의 취향에도 꼭 맞았다. 그는 자신을 ‘매혹시킨’외신기자의 적격성을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첫째, 비사교성이다. 사람을 사귀고, 요령있게 처신하고, 술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취재기자 생활에는 성격적으로 ‘비적격자’이다.
둘째, 학교동창 선후배가 없다는 사실이다. 취재기자가 상대해야 할 서울의 각 분야 각 계층은 주로 서울의 여러 대학 동창들이거나, 남한 출신의 연고관계로 형성되었는데 그에게는 그런 두 가지 요소가 없었다.
셋째는 공부에 대한 욕심이다. 국제관계의 묘미와 인류사적 대사건들에 대한 관심은 지식과 시야를 넓혀주었고 몇 가지 외국어에 능통하여 많은 서적을 읽을 수 있었다.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기에 이르는 세계적 ‘질풍노도’의 시기에 그는 특히 중국대륙의 혁명 진행에 흥분하면서 이를 분석하고 조망했다.
리영희는 1963년 여름에 외신부에서 정치부로 옮겼다. 외신부 6년만이었다. 정치부에서는 중앙청과 외무부를 출입했다. 대통령선거는 정치부기자로 취재하면서 ‘사상논쟁’을 비롯, 선거전의 내막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정치부로 이적해서도 한가지 특종기사를 뽑았다. 4.19때 헬리콥터를 빌려달라고 부탁했던 미대사관 문정관 그레고리 핸더슨을 통해 얻은 특종이었다.
1960년을 기해서 전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피식민지 민족의 해방·독립운동은 나를 열광케 하였다. 알제리아인들이 9년간의 영웅적 전쟁 끝에 대프랑스군에 승리해가는 과정에서, 나는 열렬한 축하를 보냈다. 미국의 ‘디프사우스’ 리틀로크시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나고 미국 흑인해방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번지는 것을 보면서 뜨거운 나의 마음을 기사에 쏟았다. 미국이 쿠바를 위시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패권적 횡포를 부릴 때 나는 미국과 그 제도에 대한 저주의 마음으로 해설 기사를 썼다. 군대라는 엄격한 계급사회에서도 순치되어 버리지 않은 나의 반항심은 국제관계를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반체제적으로 보는 관점의 기조가 되었다. 기존 세계질서의 변혁을 요구하면서 미ㆍ소 강대국 지배체제에 대한 거부의 몸짓으로 외신기사 전반을 다루게 되었다. (주석 15)
주석
13) 리영희, <대화>, 287~288쪽.
14) 앞의 책, 288쪽.
15) 리영희, <역정>, 390~391쪽.
야당 인사들에게도 정치활동이 허용되면서 몇 갈래로 정당이 조직되었다.
구신민당 계열은 윤보선 중심의 민정당(民正黨), 구민주당 계열은 박순천 중심의 민주당, 그리고 김병로 중심의 국민의 당, 허정 중심의 신정당이 각각 창당되었다. 야당은 이합집산과 후보 단일화 작업 끝에 민정당의 윤보선이 대통령 후보로 뽑혔다. 공화당에서는 박정희가 후보에 선출되었다.
군사 쿠데타를 주동한 인물이 여당의 후보로 나선 가운데 ‘민정이양’이라는 기묘한 제5대 대통령 선거가 1963년 10월 15일로 공고되었다. 선거전은 공화당의 박정희와 민정당의 윤보선 양자 대결로 압축되고, 선거 중반전에 이른바 ‘사상논쟁’이 벌어졌다. 민정당 측에서 미국 시사지 <타임>에 보도된 박정희의 과거행적, 즉 국방경비대(육군) 내의 남로당 비밀조직의 정보책임자였다는 것, 여수·순천사건 때 경비대 내의 남로당 가입 군인들의 비밀명단을 미군 정보기관에 넘겨주었다는 것, 그 때문에 수백 명의 장병이 체포·감금되고 처형된 장병도 있었다는 것, 그 공로로 파면됐던 군에 복직 임관되었다는, 실로 어마어마한 내용이었다.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이 과거 남로당의 핵심이었다는 미국 언론보도와 야당의 폭로는 선거전의 ‘핵폭발’이 되고도 남았다. 리영희는 투표를 앞두고 심한 갈등을 느꼈다. <타임>이 박정희의 남로당 관련 기사와 함께 그가 한국군 장성급으로서는 드물게 청렴하고, 원칙주의자이고, 군의 상부나 미국 군사고문관들에게도 비굴하지 않고, 부하들의 존경을 받는 청빈한 장교라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이런 엇갈린 미국 내의 한국 정세 평가 때문에, 한국 국민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적잖은 혼란을 겪었어요. 미국 정부의 의중은 밝혀지지 않았어. 때문에 남한 유권자들은, 이 두가지의 상충되는 박정희 인간평가를 놓고 어느 쪽인가하면, 군부 독재자라는 부정적 사실보다 오히려 박이 과거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에 친근감을 가졌을 거요. 그리고 박이 청렴결백한 장교로, 대한민국 내부에서 예외적으로 자주성이 강한 장교라는 점도 그들의 호감을 사게 됩니다. 좌익사상의 개인이나 그 가족들, 이승만 집권기의 오랜 세월동안 가족 누군가가 좌익이었던 까닭으로 연좌제의 핍박을 당해온 가족들은, 박정희가 ‘여수·순천사건’뒤에 남로당과 동지들을 배신하고 미국 정보부에 붙은 데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주석 13)
윤보선의 진영에서 일으킨 ‘사상논쟁’은 오히려 박정희에게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6.25를 전후하여 이데올로기 문제와 관련하여 희생자가 많았던 지역에서 박정희의 표가 윤보선보다 더 많이 나왔다. 이로써 박정희는 15만 6천여 표로 윤보선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지 2년여 만에 국민 직선에 의한 합법적인 대통령이 된 셈이다.
리영희는 5.16 군사쿠데타부터 18년간 박정희의 강압통치에 맞서 필화사건으로 구속되고 2년 동안 옥살이를 하던 중 박정희의 피살 소식을 들을 때까지, 언론인으로 또는 대학교수의 신분으로 박정권과 줄기차게 싸웠다. 그래서인지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매몰차다.
요컨대 박정희는 일제시대에는 천황 숭배자이면서 민족의 배반자였고, 해방이 되자 그 당시 남한의 사상적 주류였던 남로당(공산주의)에 재빨리 편승했는가 하면, 여수·순천 사건으로 형세가 불리해지자 자신의 사상과 충성을 맹세했던 남로당은 물론 자신의 책임으로 관리하고 있던 비밀당원의 명단까지 미국 군정에 팔아넘긴 자로서 철저한 기회주의자이고 변절자였지. (주석 14)
리영희는 29세 때인 1957년부터 1963년 봄까지 6년여 동안 외신기자 생활을 했다. 뜨거운 열정과 날카로운 이성으로 국제사회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지식과 시야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외신부에서 국제문제를 다루는 업무는 자신의 취향에도 꼭 맞았다. 그는 자신을 ‘매혹시킨’외신기자의 적격성을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첫째, 비사교성이다. 사람을 사귀고, 요령있게 처신하고, 술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취재기자 생활에는 성격적으로 ‘비적격자’이다.
둘째, 학교동창 선후배가 없다는 사실이다. 취재기자가 상대해야 할 서울의 각 분야 각 계층은 주로 서울의 여러 대학 동창들이거나, 남한 출신의 연고관계로 형성되었는데 그에게는 그런 두 가지 요소가 없었다.
셋째는 공부에 대한 욕심이다. 국제관계의 묘미와 인류사적 대사건들에 대한 관심은 지식과 시야를 넓혀주었고 몇 가지 외국어에 능통하여 많은 서적을 읽을 수 있었다.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기에 이르는 세계적 ‘질풍노도’의 시기에 그는 특히 중국대륙의 혁명 진행에 흥분하면서 이를 분석하고 조망했다.
리영희는 1963년 여름에 외신부에서 정치부로 옮겼다. 외신부 6년만이었다. 정치부에서는 중앙청과 외무부를 출입했다. 대통령선거는 정치부기자로 취재하면서 ‘사상논쟁’을 비롯, 선거전의 내막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정치부로 이적해서도 한가지 특종기사를 뽑았다. 4.19때 헬리콥터를 빌려달라고 부탁했던 미대사관 문정관 그레고리 핸더슨을 통해 얻은 특종이었다.
1960년을 기해서 전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피식민지 민족의 해방·독립운동은 나를 열광케 하였다. 알제리아인들이 9년간의 영웅적 전쟁 끝에 대프랑스군에 승리해가는 과정에서, 나는 열렬한 축하를 보냈다. 미국의 ‘디프사우스’ 리틀로크시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나고 미국 흑인해방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번지는 것을 보면서 뜨거운 나의 마음을 기사에 쏟았다. 미국이 쿠바를 위시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패권적 횡포를 부릴 때 나는 미국과 그 제도에 대한 저주의 마음으로 해설 기사를 썼다. 군대라는 엄격한 계급사회에서도 순치되어 버리지 않은 나의 반항심은 국제관계를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반체제적으로 보는 관점의 기조가 되었다. 기존 세계질서의 변혁을 요구하면서 미ㆍ소 강대국 지배체제에 대한 거부의 몸짓으로 외신기사 전반을 다루게 되었다. (주석 15)
주석
13) 리영희, <대화>, 287~288쪽.
14) 앞의 책, 288쪽.
15) 리영희, <역정>, 390~3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