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을 품은 여인, 추명순 전도사 - 바다 끝에서도 멈추지 않은 복음의 발자국
1️⃣ 고난에서 피어난 부르심
추명순 전도사는 1908년 충남 보령군 웅천면 서정리의 유교적이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삶은 어릴 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15세에 서천 조씨 집안으로 시집갔으나, 남편의 방탕과 폭력, 시댁의 박해로 고통 속에 살았다.
그녀는 매일 무당굿과 미신 속에 묶여 살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절망에 갇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병든 몸으로 잠든 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가 보였고, 그 위에서 빛나는 존재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직 올 때가 아니다. 네게 맡길 일이 있다.”
그날 이후,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며칠 후, 한 전도인이 마을에 찾아와 복음을 전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들었고, 그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이 분이 나를 부르신 분이구나.”
그녀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했다.
“주님, 저를 살리셨으니 이제는 제가 사람을 살리겠습니다.”
이것이 추명순의 회심이자 부르심이었다.
그녀는 그때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했다.
2️⃣ 교회 봉사에서 섬 선교로
1930년대 초, 그녀는 비인성결교회에 출석하며 청소, 심방, 전도 등 작은 일부터 시작했다.
그녀는 교회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1943년, 일제의 신사참배와 함께 교회가 폐쇄되자 몰래 예배를 드리다 경찰에 체포되어 5일간 투옥되었다.
그녀는 고문 속에서도 “나는 예수님을 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했다.
해방 후에는 김제·원두리 등지에서 교회를 개척하며 복음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1957년, 충남 안면도로 들어가 전도사로 사역을 이어갔다.
그녀는 매일같이 사람들을 찾아가 성경을 나누며 “예수 믿으라”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6·25 전쟁 이후 군산 지역의 교회들이 황폐해지고 섬 지역은 완전히 미신의 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하나님은 그녀의 마음에 다시 음성을 주셨다.
“바다 끝에도 내 양이 있다. 네가 가서 그들을 인도하라.”
그녀는 즉시 군산중동교회의 김용은 목사를 찾아갔다.
“목사님, 복음을 전할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김 목사는 이미 고군산군도 섬 선교를 위해 기도하던 중이었고,
그녀를 “섬을 맡은 복음의 일꾼”으로 파송했다.
1959년, 52세의 나이에 그녀는 본격적으로 섬 선교에 뛰어들었다.
3️⃣ 고군산군도의 복음 여정
군산 앞바다의 고군산군도는 16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비안도, 선유도, 장자도, 신시도, 어청도, 말도…
그곳에는 교회도, 목회자도, 복음을 아는 이도 거의 없었다.
대신 무속과 미신이 섬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배를 살 형편이 안 되었던 그녀는 썰물 때 갯벌을 걸어 섬을 옮겨 다녔다.
진흙에 발이 빠지고, 파도에 옷이 젖어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는 낡은 성경 한 권과 밀가루 자루 하나뿐이었다.
배가 없었지만 믿음이 있었고, 두려움 대신 찬송이 있었다.
사람들은 처음엔 돌을 던지며 “미친 여자,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사랑은 육지에만 있지 않습니다.
바다 끝, 파도 위에도 복음은 흐릅니다.”
그녀는 해녀들과 어부들을 찾아가 말씀을 전하고,
병든 자에게 약을 발라주며 기도했다.
“예수님이 당신의 상처를 만지고 계십니다.”
그녀의 손길은 곧 예수님의 손이었다.
한 번은 어청도에서 고열로 죽어가던 노인을 위해 기도했다.
“주여, 이 영혼이 가기 전에 예수님을 알게 하소서.”
그 노인은 마지막 숨결로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며 세상을 떠났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그곳이 바로 어청도 성결교회의 시작이었다.
4️⃣ 중보기도의 여인, 섬의 어머니
추명순 전도사는 복음 전도뿐 아니라, 섬 사람들의 눈물까지 품었다.
비안도에서는 아이들에게 글과 찬송을 가르치고,
신시도에서는 해녀들과 함께 새벽기도를 드렸다.
밤마다 금강 하구 백사장에서 무릎을 꿇고
섬 하나하나의 이름을 불렀다.
“주여, 이 섬들 위에 교회를 세워주소서.
복음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소서.”
그녀는 새벽마다 밀물의 찬물에 무릎을 담그며 기도했다.
무릎은 늘 짓물러 있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기도가 쌓인 자리마다 교회가 세워졌다.
비안도교회, 말도교회, 장자도교회, 선유도교회, 신시도교회…
모두 그녀의 발자국과 눈물에서 피어난 교회들이었다.
5️⃣ 순교적 신앙과 헌신
6·25 전쟁의 여파로 섬들이 불안에 떨 때,
공산군이 섬을 점령하고 “예수를 버리라”고 협박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이미 예수 안에서 죽은 사람입니다.”
그녀의 담대한 믿음은 섬 사람들에게 큰 울림이 되었다.
그녀의 생애는 피 흘리는 순교가 아니었지만,
그 자체가 ‘살아있는 순교’였다.
서종표 목사는 이 장면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평안이었다.
순교의 피보다 더 깊은 헌신이었다.”
6️⃣ 사랑과 구제의 복음
추명순 전도사는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며 사랑을 실천했다.
김용은 목사와 O.M.S(동양선교회)의 후원으로
밀가루, 옥수수 가루, 우유가루를 싣고
각 섬을 돌며 나누어 주었다.
섬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 구호식량 때문에 교회에 나왔지만,
곧 그녀의 사랑과 진심에 감동하여
“우리도 예수 믿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녀는 늘 말했다.
“복음은 빵과 함께 전할 때 더 깊이 사람의 마음에 심깁니다.”
그녀는 구제와 교육, 복음과 기도를 하나로 엮어 사역했다.
가난한 섬 소녀들에게 “너도 하나님이 부르신 사명자다”라며
교육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중 몇몇은 훗날 교사, 간호사, 전도사가 되어
또 다른 복음의 씨앗이 되었다.
7️⃣ 마지막 기도와 영광의 죽음
1990년대 초, 노년의 추명순 전도사는 병들어 걸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 기도가 이 섬들을 걷게 하소서”라며
하루도 빠짐없이 섬들을 위해 중보했다.
비안도의 교인들이 병든 그녀를 병원에 데려갔을 때,
그녀는 창문 너머로 바다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 파도에도 예수님의 이름이 울립니다.”
1996년, 88세의 나이로 주님 품에 안겼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비안도, 말도, 선유도의 성도들이
작은 배를 타고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우리의 어머니”라 부르며 눈물로 찬송을 불렀다.
그녀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졌다.
“그 아름다운 발이여,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 (로마서 10:15)
8️⃣ 우리에게 남긴 도전
추명순 전도사의 생애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복음을 어디에서 전하고 있느냐?”
편안한 도시의 교회 안이 아니라,
복음이 닿지 않은 외딴 섬과 같은 영혼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녀는 화려한 강단보다 갯벌을 택했고,
안락한 삶보다 파도 속을 걸었다.
오늘날 우리가 다시 그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복음은 말이 아니라 삶이다.
섬처럼 외로운 사람, 절망 속에 갇힌 이웃이
우리 곁에 있다면, 그곳이 바로 우리의 “선유도”이고 “말도”다.
🌾 결론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추명순 전도사는 서해의 한 알의 밀알이었다.
그녀의 눈물과 발자국은 지금도 군산 앞바다의 파도 속에서 울리고 있다.
“나는 큰 배를 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을 싣고
파도를 건넜습니다.”
그녀는 죽음보다 복음을 택했고,
그 복음은 지금도 살아 우리를 부르고 있다.
🕊️
“나는 복음을 전하다가 바다에 쓰러져도,
그것이 주의 영광입니다.”
— 추명순 전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