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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지도
[오늘의 역사, 3월 30일]
♠598년 - 발칸전투: 아바르족이 토미스의 비잔티움 제국 요새에 대한 포위를 풀다. 아바로-슬라브족 군단이 전염병으로 몰살당하자 그들의 리더인 바얀 1세가 다뉴브 강 북쪽으로 퇴각.
♠1282년 - 이태리 남부 시칠리아 왕국에서 [시칠리아 만종 사건] 발생.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한 시칠리아의 투쟁 공식 시작. 당시 프랑스 샤를 1세(카를로 1세)로부터 폭정에 시달리던 시칠리아 인들이 성당의 저녁 종소리를 신호로 봉기로 시작된 이 독립 전쟁은 그 후 20년 동안 지속된다. 그리고 1302년 시칠리아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게 되는 이태리 역사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날. 혼자서 프랑스와 전쟁하기 힘들었던 시칠리아는 스페인의 강국이었던 아라곤 국왕인 페드로 3세를 끌어들여 왕위를 준다. 페드로 3세의 아내는 시칠리아 왕국의 계승권이 있었던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공주였기에 나름 타당성이 있었던 것.[1]
이 사건으로 시칠리아 섬은 당시 수도였던 나폴리와 주변의 이탈리아 본토로부터 독립하였다. 프랑스 카를로 1세가 지배하게 된 이탈리아 본토는 여전히 스스로를 "시칠리아 왕국"이라고 칭했으나, 역사가들은 시칠리아 섬의 왕국과 구별하기 위해 이탈리아 본토에 있는 왕국을 나폴리 왕국으로 부른다. 아라곤의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 왕국의 왕이 된 후, 시칠리아 왕국은 아라곤 연합 왕국(연방국가)의 일원이 된다.[2] 14세기와 15세기에 전성기를 맞은 아라곤 연합왕국은 오늘날의 스페인 동부와 프랑스 남서부, 그리고 그리스까지 걸친 지중해의 주요 섬으로 해양 왕국을 이룬다.[3] 하지만, 이것은 로마제국과는 성격이 다른 자치 국가들의 연합. 이때부터 생긴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은 19세기에 달해 통일되어 이태리 왕국이 성립하게 된다.
기억 하시나요? 바로 13일 전인 (1861년) 3월 17일 이탈리아 통일이 되었던 것을. 이 통일의 역사에는 3총사가 있었지요. 마치니, 카보우르 그리고 가리발디(마카가). 마치니는 청년 이탈리아당을 조직해 통일의 기초를 닦았고, 카보우르는 사르디니아 왕국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북부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고,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남부를 통일해 사르디니아 왕국과 재통합. 마카가 삼총사의 노력은 사르디니아의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2세를 초대 통일왕으로 하는 이탈리아 왕국을 선포하게 한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476년 서로마제국이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하고 분열된 이래 처음으로 1400년 만에 통일된 것.
[1] http://blog.daum.net/ariesia/109
[2] 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C%B9%A0%EB%A6%AC%EC%95%84_%EC%99%95%EA%B5%AD
[3]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9D%BC%EA%B3%A4_%EC%97%B0%ED%95%A9%EC%99%95%EA%B5%AD
♠1450년 - 조선 4대 국왕 세종대왕 사망. 52세. (朝鮮 世宗, 1397년 5월 7일 ~ 1450년 3월 30일, 재위 38년: 1418년 ~ 1450년). 최근 그 원인이 패혈증과 운동부족 그리고 과도한 업무집착에 따른 스트레스 등으로 밝혀졌다. 실록에서는 세종의 증상을 당뇨, 풍질, 부종, 임질, 수전증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현대 의학은 이를 전형적인 패혈증으로 본다(강영민 著 ‘조선왕들의 생로병사’ 등). 공교롭게 아들 문종의 사인도 패혈증이다(김정선 著 ‘조선시대 왕들의 질병치료를 통해 본 의학의 변천’). 세종은 고기를 너무 좋아해서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고, 당연히 야채와 과일 그리고 운동을 싫어했으며 너무 책과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하루 20시간도 일을 했다고 하니, 전형적인 워크홀릭 이었던 것. 이런 식생활은 아들에게도 물려주게 되어 문종도 같은 증상으로 죽는다[1]
비공식 기록에 의하면 세종은 젊은 시절에는 비만하여 몸집이 거대하였고 둔한 모습이었으나 노년에는 비쩍 말랐을 것으로 추측. 세종은 22명의 자녀(10명이 정실 출생)를 가질 정도로 후궁을 많이 가졌던 정력가였다고.[2] 그러나 운동을 하지 않는 정력가? 운동을 열심히 하고, 채식을 하셨더라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면서 더 많은 업적을 만드셨을 텐데. 그리고 아들 문종과 손자 단종 그리고 예종도 그렇게 안타까운 역사를 갖지 않았을 텐데... 우리 모두 채식과 운동을 하십시다요.
[1] http://www.kyeonggi.com/?mod=news&act=articleView&idxno=1081372
[2]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_%EC%84%B8%EC%A2%85#.EA.B0.80.EC.A0.95.EC.9D.98_.EB.B6.88.ED.96.89
♠1746년 -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출생. 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년 3월 30일 - 1828년 4월 16일)는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화가 그리고 궁정화가이자 기록화가. 고전적인 경향에서 떠나 인상파의 시초를 보인 스페인 근세의 천재 화가. 파괴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대담한 붓 터치 등은 후세의 화가들, 특히 에두아르 마네와 파블로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1]
[1] 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9E%80%EC%8B%9C%EC%8A%A4%EC%BD%94_%EA%B3%A0%EC%95%BC
♠1853년 -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출생. Vincent Willem van Gogh(1853년 3월 30일 ~ 1890년 7월 29일).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 그러나 원래는 목사가 되어 세상을 바꿔보고 싶어 했던 사회개혁가 지망생. 가난한 광산의 사람들을 바꿔보겠노라고 너무도 진지하고 어렵고 길게 하는 그의 강론은 어렵고 피곤한 신도들에게 외면당하고. 결국 제대로 전도사가 되기도 전에 그는 종교를 통한 사회개혁의 길을 포기한다.
우리나이로 30살이 되어 뒤늦게 시작한 미술공부. 아니 공부라기보다는 원래 그림을 거래하는 화상 집안에서 태어났던 게 인연이 되어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을 베껴 그리기 시작. 3살 어린 동생 테오 반 고흐처럼 가업인 그림 중개업을 하기는 싫었던 생각 많고 책 많이 읽는 문학소년형 빈센트 반 고흐.
제대로 된 미술교육도 받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들을 독학으로 그리던 그는 자연을 사랑했고, 책과 사색을 좋아했으며, 스스로를 ‘농민화가’라고 부를 정도로 보통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가졌던 정열적인 사나이. 특이하게도, 그의 작품 전부(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0여 점의 습작들)를 정신질환(측두엽 기능장애로 추측됨)을 앓고 자살을 감행하기 전의 단지 10년 동안에 모두 제작. 특히 고갱과 함께 있었던 '아를'에서의 90일은 빈센트에게는 가장 각별한 시기.
하지만, 고갱의 밀회는 빈센트의 귀의 일부가 잘리는 사고(혹자는 스스로 잘랐다고 하지만, 요즘 새로 밝혀진 사실은 고갱이 던진 칼이 빈센트의 귓밥을 스치며 일부가 잘려나갔다고 한다)를 마지막으로 끝난다. 고갱은 그 길로 파리에서 벗어나 타히티로 혁신을 찾아 떠나지만. 거기서 맞닥뜨린 것은 또 다른 파리의 카피들. 빈센트를 집에서 돌볼 수 없었던 동생 테오는 형 빈센트를 정신병원으로 보낸다. 거기서 마지막 1년을 살면서 나타나는 빈센트의 최후 걸작들이 <별이 빛나는 밤에, 1889>와 <까마귀가 나는 들판, 1890>. 1891년 7월 고흐가 총으로 의문의 자살을 하고 난 뒤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동생 ‘테오’도 매독으로 죽는다. 빈센트의 유작들은 모두 다 테오의 아들에게 넘겨지고.
빈센트의 작품들은 그가 생존해 있던 기간 동안에는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사후에 비로소 알려졌는데, 특히 1901년 3월 17일 (그가 죽은 지 11년 후) 파리에서 71점의 반 고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그의 명성은 급속도로 커졌다.
고호가 살았을 때에는 작품이 단 하나만 팔렸고, 유일하게 있었던 단 한 번의 전시회는 술집에서 열렸을 정도로 거의 무명이었던 완전히 실패한 인생,[3]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즘 살펴보면 그에 관한 이야기도 영화도 많다. 왜 그럴까? 첫째는 그가 평소에 동생 테오에게 보냈던 편지가 워낙 많아서라고 한다. 예를 들면, 영화 <반 고흐: 페인티드 위즈 워드>는 그의 편지들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1] 두 번째 이유는 워낙 그의 삶이 영화적인 구석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화 <반 고흐: 위대한 유산>은 그런 면을 부각시킨 것.[2]
[1] https://youtu.be/LZxHiZZlW4w
[2] http://magazine2.movie.daum.net/movie/13963
[3] https://www.youtube.com/watch?v=jJh15VAeMKk
♠1856년 - 크림 전쟁을 끝내는 파리 조약 조인.
♠1867년 - 미) 러시아 황제로부터 미국이 알래스카를 매입하는 계약 체결. 실질적으로 미국에게 양도된 날은 약 6개원 반 뒤인 1867년 10월 18일.[1]
[1] http://www.bartleby.com/43/43.html
♠1891년 - 승려, 작가 춘성 출생.
♠1902년 - 소설가 나도향 출생. 본명은 나경손(慶孫, 1902년 3월 30일 한성부 ~ 1926년 8월 26일)이며 필명은 빈(彬). 서울에서 조부 때부터 개업한 의사 집안에서 출생. 조부는 한의사에 아버지는 외과 개업의. 아버지도 문학소년이었지만, 할아버지의 반대로 문학을 포기하고 병원을 개업했지만, 결국엔 은둔자를 자처하며 독서와 노트작성에 몰두하고 살았다고. 도향도 1918년 경성의학전문에 입학하지만, 1년도 못 견디고 중퇴한 후 문학수업을 시작. 결국 할아버지는 나도향이 문학수업을 위해 일본에 갔을 때에도 돈을 보내주지 않아 배고파 귀국하게 만들기도 한다. 고집 센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경사스러운 손자라는 “경손”이라는 이름을 싫어했고, 대신 도향(稻香, 벼꽃 향기)라는 수수한 이름을 좋아해. 이런 영향은 그의 작품에도 나타난다.[1]
1922년 《백조》의 창간호에 소설 《젊은이의 시절》로 등단. 이상화, 현진건,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파”. 이듬해 동아일보에 장편 《환희》를 연재하여 19세의 소년 작가로 촉망됨. 이때부터 자연주의적 경향이 보이기 시작. 1925년 《여명》 창간호에 《벙어리 삼룡이》를 발표. 한국 근대 문학사상 가장 우수한 단편 중의 하나로서 평가됨. 주요작품 《물레방아》, 《뽕》, 《벙어리 삼룡이》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등. 민중들의 슬프고 비참한 삶에 촛점을 맞춘 작품. 《벙어리 삼룡이》와 《뽕》은 영화로 만들어져.
도향은 할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문학수업을 위해 2차 일본 유학을 감행하지만, 돈이 없어서 결국은 폐병을 얻게 되어 25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고집스러운 할아버지가 우리의 근대 문학의 별을 떨어뜨렸다. 하기사, 그런 반대가 있었기에 또 그의 문학이 고집스럽게 나타났던 것은 아니었을까?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으니까. 할아버지는 나병규(1852-1924)는 당시 장안에 날리던 한의사였으나, 이연수, 이기헌, 윤홍모 등과 함께 ‘철원 애국단 사건’에 연루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하신 나름 소신과 기개가 있으신 분.[2] 안타까운 점은 할아버지는 72세를 사셨지만, 문학 천재 손자는 25세로 단명했다는 것. 그래도 도향의 이름이 더 멀리 그리고 오래오래 역사에 살아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이름까지도 함께 날린다. 경사스러운 손자가 맞기는 맞나보다.
[1] http://www.jikji.org/%EB%82%98%EB%8F%84%ED%96%A5
[2] http://lameans.tistory.com/110
♠1945년 - 영) 가수 에릭 클랩턴 출생.
♠1968년 - 캐) 가수 셀린 디온 출생.
♠1981년 - 축구 선수 박지성 출생.
♠1981년 - 미)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D.C.의 힐튼 호텔 앞에서 괴한이 쏜 총탄에 피격.
♠2010년 - 특수전 여단 한주호 준위가 대한민국 서해 백령도 부근 천안함 침몰 현장에서 생존장병 구조활동을 벌이다가 의식을 잃고 사망.
♠2010년 - 전체 주택 중 아파트 비율 58.9%(통계청, 2010). 연간 건설 주택 중 아파트 비율 71.6%(통계청, 2010). 다른 나라의 아파트들은 거의 7층을 넘기지 않는다고.
♠2011년 - 부산 도시철도 4호선 개통.
♠이태리 독립을 이끄는 ‘마피아’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는 [시칠리아 만종 사건] 그리고 세종대왕께서 돌아가신 날. 고기 집착에 운동부족 그리고 워크홀릭에서 생기근 스트레스를 22명의 자손들로 연결시킨 정열도 결국 죽음을 못 이겨. 고야와 빈센트 반 고흐가 약 95년 차이를 두고 오늘 태어나. 두 화가 모두 주관적이고 대담한 터치 그리고 후기에 야수파와 입체파 등에 영향을 주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빈센트는 좀 더 철학적이었고 학구적이었으며 동시에 사회개혁에 대한 열망을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극적인 삶을 살아.
약 50년 후 오늘 한반도에서 태어난 나도향도 극적이라는 점에서는 빈센트에 못지 않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다른 예술가들과 달리 3대째 이어오는 병원이라는 부를 배경으로 하고도 문학을 했다는 이유로 빈자의 상징인 폐병으로 25세에 간 은은한 벼의 향기 도향.
집에 대한 가치가 필요하다. 영혼과 가치가 있는 파리의 오래된 아파트들과 노틀담 성당 인근에 있는 고풍스런 아파트들을 생각해봐야 할 때. 그리고 이제 아파트에서 벗어나 주택으로 나와야 할 때. 텃밭이 딸린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주택에서 텃밭을 일구며 벼의 향기를 맡으며 운동하고 채식을 해야 할 때. 비단 빈센트가 아니더라도 밤에는 우주를 휘돌아 감는 별들을 보고, 낮에는 새들이 자유롭게 나는 들판을 바라보며, 기쁨 속에 자연을 보다가, 그에게 돌아갈 날을 기꺼이 견디며. [2017. 3. 26. 山疑路@나이로비]
[출처] 오늘의 역사, 3월 30일|작성자 산의로
출처 : 네이버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worldcelebrity/history/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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