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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속 문인들과 조우하다(강서, 호북성 5박6일)
첫째날(11월 1일)-출발(대구에서 무한까지)
2013년 11월, 첫날. 중국발 황사바람의 공포가 한겨울 추위만큼이나 몸을 옹송그리게 한다. 그러면서도 황사바람을 정면으로 맞기라도 하겠다는 듯 또 중국으로 떠난다. 벌써 몇 해째 해마다 가는 중국이라 이제는 타성에 젖을 만도 한 여행이나 설렘은 여전하다. 다만 횟수가 거듭될수록 여행가방을 꾸리는 시간이 짧아질 뿐이다. 그만큼 짐도 간단하고, 요령이 생긴 덕분이다. 게다가 대구공항 출발이라 마음까지 느긋하다.
새벽이 아님에도 자욱한 안개 숲을 헤치고 달리는 차 안에서 안개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단풍의 아름다움이 아쉬우면서도,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기대가 그 아쉬움을 조금은 누그러뜨린다. 이번엔 강서와 호북성이 주 여행지다. 매년 일행에 약간의 변화가 있지만 나에게는 대개 익숙하다. 이미 여러 번 함께 여행을 해서 낯이 익은 일행은 그래서 반갑고, 처음 만나지만 이 여행에서는 내가 그나마 선배라는 생각이 주는 익숙함이다. 거기에다 중국항공사인 동방항공의 기내식조차 변함이 없다. 약간은 찔깃한 느낌이 나면서도 별 맛은 없는 박나물 같은 반찬까지 늘 변함이 없는 걸 한결 같다고 해야 할까, 구태의연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려나 대구에서 출발한다는 것부터 좋은 여행이라는 내 생각에도 변함이 없다.
개인적으로 이번 여행은 상당히 힘들 거란 생각이다. 두어 달 전에 오른쪽 발목 관절의 이상을 진단받은 상태다. 회복은커녕 조금도 나아질 수는 없는 상황이라는 진단이다. 아껴 쓰고, 조심해서 절대로 다시 다쳐서는 안 된다는 발목관절의 시한부선고를 받은 셈이다. 아무래도 많이 걷는 것이 여행인 만큼 남편은 극구 만류했지만 나로서는 뜻을 꺾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도 나아질 상황이 아니라면 여기서 영영 여행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한다는 결론이기에, 이나마라도 편하게 걸을 수 있을 때 떠나자는 생각이었다. 다소 부담스러운 것도 사살이어서 대구 공항에서 발목보호대를 사서 착용했다.
상해 푸둥(浦東) 국제공항에 내린 시각은 오후 1시가 조금 지난 때였다. 검색이 훨씬 까다로워진 듯했다.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기까지 시간이 많아서 다행이었다. 무한으로 이동하는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각까지 남는 서너 시간을 공항 안에서 보냈다. 상당히 지겨울 줄 알았지만 그렇지만은 않았다. 일행들과 주고받는 수다로 약간은 서먹하던 부분들이 느긋하게 기다리는 시간 속으로 자연스럽게 마모되고 있었다. 서쪽하늘을 불태우는 노을빛에 감동하면서 무한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두 시간을 날아서 도착한 무한(武漢). 호북성의 성도라고는 하나 공항의 규모부터 자그마했다. 저녁 여덟 시 무렵의 무한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불빛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시각에 맞는 비는 달가울 수가 없다. 그래도 어쩌랴, 저녁만 먹고 나면 쉴 수 있다는 생각에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가이드는 현재 임신 중이라는 김송란이었다. 웃음에서나 말투에서 순박함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여행 지식은 꽤 해박한데도 되바라진 구석이라곤 조금도 찾을 수가 없어서 마음이 편안했다. 그 동안 많은 가이드들을 만나면서 깨닫게 된 것이 너무 되바라진 가이드보다는 다소 어눌하더라도 순박한 가이드가 여행객들에겐 편안함을 준다는 사실이다.
저녁을 먹은 식당은 외장부터 으리으리했다. 마치 유럽의 어느 신전 앞에 선 느낌이었다.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카운터만 다섯 군데였다. 성화처럼 보이는 그림들이 샹들리에를 더욱 화려하게 꾸며주는 내부는 웨딩홀을 겸하고 있었다. 한국인은 잘 찾지도 않을 만큼 알려지지 않은 소도시에 객실만 무려 100개가 넘는 규모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 데도 이 식당이 무한에서 세 번째 큰 규모라니 이런 식당도 중국여행에서나 쉽게 볼 수 있을 듯하다.
저녁은 만족스러웠다.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음식들 중에서 특이한 것은 생선이었다. 무창어라는 민물고기다. 크기는 붕어와 잉어 사이쯤 되는 듯했다. 마오쩌둥이 특히 좋아하는 담수어로 영양은 붕어의 여섯 배 정도라니 상당히 고급어종이다. 민물생선은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담백한 맛이 좋았다. 자신이 오래 익숙하게 접해 온 것들에 정감을 느끼는 것은 입맛만은 아니겠지만 처음 보는 음식에 대한 호기심 덕분이리라.
저녁 식사 때로는 그다지 이른 시각이 아님에도 식당 안은 복잡했다. 무한의 여자들은 할 일이 없어서 저녁 식사를 거의 자정까지 한단다. 날씨도 더워서 해가 진 뒤라야 활동성이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둘째날(11월 2일)-황학루(黃鶴樓)
아침부터 비가 부슬거렸다. 하루 관광에 크게 영향을 끼칠 만한 비는 아니었지만 달가운 날씨는 아니었다. 그나마 느긋한 출발이 서글픔을 덜게 했다. 홍광대반점(호텔)을 출발한 시각은 9시였다. 다른 여행 때보다 비교적 늦은 출발이었다. 빠듯하게 움직이는 것보다 여유로웠다.
출발 전 버스에서 전문가이드 이용산을 만났다. 능글맞고 천연덕스럽기가 많은 관광객들을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다뤘을지 짐작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인물도 반반하고 진행도 매끄러웠지만 그다지 신뢰감은 가지 않았다.
첫 행선지는 황학루(黃鶴樓). 호텔에서 25분 거리다. 황학루 근처에 내리니 빗발이 제법 무성했다. 그냥 맞기에는 신경이 쓰이는 양이다 싶었는데 가이드가 우산을 하나씩 사서 준다. 바람이 살짝만 불어도 형태가 일그러지거나 뒤집어질 만큼 조잡한 우산이었다. 그렇지만 비를 피하고, 보관을 하기에는 크기도 용도도 알맞았다. 열 번이 넘는 중국 여행 중 비를 만난 것은 세 번째다. 처음 비를 만난 것은 첫 여행지였던 북경에서였다. 마지막 날인 데다 이화원에서였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굵은 빗줄기였지만 이화원 회랑을 걸으면서 나름 운치가 있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만리장성을 오를 때는 미끄럽기도 했지만 한여름이어서 더위가 씻기는 기분이었던 것도 좋았다. 두 번째 역시 북경에서였는데 그 때 역시 여름이니 그다지 어색할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여행지에서 비 때문에 큰 고생을 했다는 생각보다는 여행의 감흥에 빗줄기가 보태졌을 뿐이라는 행복감이 크다. 이번 여행에서 만나는 비 역시 서글프기만 한 것이 아닌 것도 그런 기억의 도움 덕분이리라.
황학루는 삼국시대 손 권이 군사적 용도로 지은 망루다. 적을 퇴치하기 위해 지은 망루로 창건 당시 이름은 무창이었다. 후에 황학루가 된 현재의 누각은 여러 차례 중수 재건되었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게 된 것도 이런 노력 덕분이다. 황학루는 중국의 3대 누각 중 하나다. 멋진 모습만으로도 3대 누각에 꼽힐 만하다. 2007년에 보았던 악양루에 이어 이번 여행에서 답사하게 될 등왕각과 황학루가 3대 누각이라니 동양고전연구회를 통해서 중국 3대 누각을 모두 보게 되는 것도 나름의 행운이다.
오늘날 황학루가 된 데는 역시 신비한 이야기가 전한다.
황학루가 지어진 자리에는 신 씨 노파가 경영하는 작은 술집이 있었다. 어느 날 한 거지 노인이 찾아와서 공짜 술을 청했다. 노파는 싫은 내색 없이 노인을 대접했다. 이후에도 노인은 며칠에 한 번씩 들러서 공짜 술을 먹고 가기를 꼬박 1년.
“오늘은 내 그간의 은혜를 갚으러 왔소.”
술을 내려는 노파에게 노인이 정중하게 말했다.
의아해 하는 노파를 등진 노인은 귤껍질로 벽에다 학을 그렸다.
“내일부터 손님이 올 때마다 벽을 향해서 손뼉을 치시오.”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노인이 사라졌다.
다음날 노파는 손님이 오자 벽을 향해 손뼉을 쳤다. 그러자 벽에 그려진 학이 춤을 추었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인근 지역까지 퍼졌다. 벽에서 춤추는 학을 보려는 사람들로 작은 술집은 날마다 인산인해였다. 신 씨 노파는 오래지 않아 큰 부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도록 소식조차 없던 거지 노인이 다시 나타났다. 얼굴은 거지 노인이었는데 행색은 거지가 아니었다. 도포까지 갖춰 입은 점잖은 도인의 모습이었다.
“내가 마신 공짜 술값은 벌충이 되었으렷다?”
노파를 이윽히 넘겨다 본 도인은 품에서 꺼낸 피리를 불었다. 그러자 벽 속에서 춤추던 학이 도인 앞에 나와 앉았다. 도인은 그 학을 타고 멀리 날아갔다.
훗날 노파는 술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누각을 짓고, 황학정이라 이름 지었다.
이후 빼어난 전망이 알려지면서 수많은 문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그런 문인들의 작품 중 하나인 칠언율시 ‘황학루’는 누각의 벽에 음각되어 있다. 당나라 시인 최호(崔顥)의 작품으로 황학루를 가장 잘 묘사했다는 평을 받을 만큼 유명한 작품이다. 오죽하면 이백(李白)이 황학루에 올랐으나 최호의 시보다 더 뛰어난 시를 지을 수 없다며 붓을 내려놓았다는 이야기가 생겼겠는가. 시인묵객들의 노래가 아니더라도 황학루의 위용은 도시와 역사를 아우르는 모습이다.
황학루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이다. 기와의 색깔부터 날아오를 듯 치켜든 추녀들의 모습도 그렇다. 비가 와서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모습이 다소 위축된 느낌이긴 했지만, 날이 맑은 날이면 햇살을 받은 날개를 반짝이면서 금방이라도 날아오르는 황학의 모습이 보일 것 같다.
황학루는 표면적으로는 5층이다. 그런데 내부는 9층으로 되어있다. 황학루 내부는 전설과 관련된 그림들이 타일과 서화로 전시되어 있었다. 현재와 많이 다르지는 않지만 황학루의 변천사가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기도 했다. 누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멀리 양쯔강이 보인다. 이곳도 4대문명의 발상지라는 양쯔강 유역이려니, 싶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각 층에는 온갖 비슷한 기념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있었다. 조잡한 기념품들 때문이리라, 가이드로부터 들은 이야기의 신비함이 사라진 것은.
유배길에 올랐던 이백이 최호의 시를 뛰어넘는 시를 쓸 수 없어 붓을 꺾었다는 각필정(搁笔亭). 스치듯 들렀지만 그 앞에서는 잠시 겸허한 마음이 되었다. 이백은 몇 백 년이 흘러도 퇴색하지 않는 시선(詩仙)이다. 그런 사람도 자신보다 나은 필력 앞에서는 고개 숙일 줄 안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쭙잖은 동화나 쓰면서 문인이랍시고 혹, 남의 작품에 나름의 잣대를 들이댄 적은 없는지 나의 지난날이 잠시 돌아다 보였다.
황학루가 마주 보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중국의 상술을 읽을 만한 시설이 있었다. 천년길상(千年吉祥)종이다. 이 종은 21세기 들어서 만든 것으로 황금 21킬로그램이 녹아있다. 자신의 소원을 담아서 종을 직접 쳐볼 수 있는데 한 번 타종에 10위안이다. 마치 중국의 황제나 대인들의 모자 모양으로 만들어 화려한 누각에서는 중국의 상술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내려오는 길에는 순환용 전동차를 탔다. 전동차가 멎은 광장에는 남송의 장수였던 악비(岳飛)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악비에 대한 중국인들의 자부심을 알 만 했다.
행음각(行吟閣)
다음 행선지는 동호다. 굴원의 유적지인 행음각이 있는 곳이다. 굴원은 전국시대 초나라의 왕족이었다. 회왕의 신임을 얻어 삼려대부가 되었으나 영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두 차례나 억울하게 쫓겨났다니 뛰어난 사람은 자신이 만들지 않아도 적이 생겨남을 깨닫게 하는 일생이다. 다만 스스로 만들지 않은 적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것 또한 진리다. 그들은 하나 같이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따르려고 하기보다, 자신이 처한 위치로 뛰어난 상대를 끌어내리려는 졸장부들이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쫓겨난 굴원의 고뇌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맑은 정치를 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음이 안타깝고 슬펐으리라. 자신이 추구하던 이상과 실제 맞닥뜨린 현실 사이에서 깊이 고뇌하며 방랑하던 중에 한 어부를 만난다.
삼려대부가 어찌하여 그처럼 초췌한 모습으로 방황하느냐고 어부가 물었다.
“세상이 다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습니다.”
홀로 맑음이 추방의 이유였음을 한탄하는 굴원에게 어부가 말했다. 성인은 세상 사물에 얽매이기보다 세상을 따라 변할 수 있어야 한다며 세상과의 타협을 권유했다. 이에 굴원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에 실망한 굴원은 멱라수에 몸을 던지고 만다. 그렇게 굴원이 몸을 던졌던 멱라수를 찾아갔던 기억이 난다. 차도를 건너던 오리 떼가 인상적이었던 길. 공사 중이기도 했지만 도저히 굴원의 맑음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흐릿하면서도 말라버린 멱라수에 실망하고 돌아섰던 기억이다. 그때의 멱라수를 굴원의 흔적에서 떠올리게 되니 해마다 하는 각기 다른 테마여행에서 동양고전연구회 답사의 연결고리를 찾은 기분이다.
일행은 굴원 기념관을 돌아보고 15분 뒤에 만나자던 가이드의 말에 따라 움직였다. 기념관을 들르는 대신 나는 최영주, 이영필선생과 호숫가를 거닐었다. 호젓한 호수의 풍경에서 여행의 여유를 느낀 13분여. 만나기로 한 굴원의 동상 앞에 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던 터라 기다리는 중에 단장님과 엄영애 선생을 포함한 일곱 명이 모였다. 15분을 훌쩍 넘겼을 시각인데 더 이상은 낯익은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일행이 분리된 듯했다. 마치 굴원의 사체처럼. 호북성은 비가 자주 온다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안개인지 비인지 모를 것이 여전히 흩뿌리고 있었다. 흐릿하고 축축한 기운 속에서 우리는 잠시 막막했다. 일행들이 어디로 사라진 건지 오리무중이었다.
손은경 선생의 전화를 받은 다음에야 나머지 일행들이 먼저 가버렸음을 알았다. 화가 났다. 이동시간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채 단순히 15분 후에 만나자고 했던 가이드 이용산에 대한 불만이었다. 버스에서 내렸던 지점을 향해 걷는 중에 김송란을 만났다. 왜 시간도 덜 됐는데 먼저 가버렸느냐는 내 불만에 미안하다며 선한 웃음을 지었다. 진심이 전해졌다. 겨우 누그러뜨렸던 마음은 이용산의 태도에 다시 부글부글 끓었다.
“여러분은 다른 패키지 여행객들과 다른 듯해서 자율에 맡겼는데 이제는 일일이 줄 세워서 인원 체크하겠습니다.”
집결 시간을 제대로 알려주라는 내 충고에 오히려 당당했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충분히 용납할 실수를 변명으로 일관하는 것도 화가 나는데, 이제는 아예 반은 협박조였다. 참으로 만만찮은 내공이었지만 그 속이 빤히 보여서 더욱 화가 났다. 여행자들의 어떤 불만에도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가이드의 바른 자세다. 그렇지만 능구렁이처럼 끄떡도 않는 것은 물론, 오히려 눈치껏 행동하지 않고 뒤처진 것 아니냐는 듯한 태도에 내내 불쾌했다.
동파적벽(東波赤壁)
일행이 자기소개를 하면서 40여 분을 달려 닿은 곳은 동파적벽이다. 문적벽(文赤壁)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붉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적벽대전의 실제 격전지인 무적벽(武赤壁)과는 다르다. 동파 소식이 5년 간의 유배 생활을 했던 곳이다. 그 때문에 동파적벽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며 이름만으로도 소동파와 관련된 유적지임을 알 수 있다. 우뚝 솟은 석패방이 평지보다 높은 동파적벽의 이미지를 대변한다.
대나무가 우거진 입구를 들어서자니 이곳이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곳이었다는 가이드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 소동파의 동상이 맞아주는 입구를 지나 돌계단을 올랐다. 옆면이 붉은 벽돌로 된 계단이다. 중국인들에게는 그저 숱한 유적지의 일부인 까닭인지, 현지 방문객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외국관광객의 발길도 뜸한지 낡은 시설은 버려지다시피 했다. 손질이 되지 않은 내부도 그렇고, 단장이 되어 있지 않은 외벽도 마찬가지였다. 한자 모양의 창살에는 거미줄까지 얼기설기 걸쳐져 있어서 쓸쓸함을 더했다. 지나치게 단장이 잘 되어서 오히려 거부감이 드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관리가 허술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곳에 지어진 이부당(二賦堂)은 동파 소식이 전․후적벽부를 지은 곳을 기념하는 기념관이다. 동양고전연구회의 정규회원들이 적벽부를 읽으며 감상에 빠져 있는 동안 문외한인 나는 지금은 호수로 변해버린 장강의 고요한 물결만 내려다보았다. 다만 붉은 벽을 보면서 적벽대전의 격전지를 떠올리며 적벽부를 지은 소동파의 문학적 소양만을 짚어보면서. 역시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끼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아는 것이 없으니 그다지 감흥이 없는 채 동파적벽을 나섰다.
다소 여유 있는 일정 덕분에 두 시간을 이동해서 저녁을 먹었다. 매운 맛이 강한 만찬이었다. 호텔까지 이동하는 중에는 우리가 탄 버스가 재미있는 풍경의 중심이 되었다. 차로 변경을 위하여 도로를 가로막고도 당당한 운전기사 때문에 괜히 조바심이 나고 민망한 순간이었다. 중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중심이 되고 보니 한국적 질서의식이 꽤나 앞섰다는 자부심도 가진 순간이었다.
황학루의 전설과 전설 같은 인물인 굴원, 동파를 만난 하루를 구강의 신화건국호텔에서 마무리 지었다.
셋째날(11월 3일)-도연명기념관
날씨가 흐린 것인지 도시는 아침부터 희뿌옜다. 어찌 보면 안개인 듯도 같고, 스모그 같기도 한 하늘. 중국의 잿빛 하늘은 흐림보다는 스모그라는 부정적 인식 때문인지, 아침 풍경을 둘러싼 잿빛 시야를 보는 마음이 맑은 날과 같을 수는 없었다.
이 날은 새 버스에 탑승했다. 2010년 산(産)이라는 말이 믿길 만큼 겉은 멀쩡했다. 그런데 말이 새 버스지 내부는 지저분했다. 파리 한 마리와 견과류를 먹고 난 껍질이 봉투째 쏟아진 채 어수선한 버스도 날씨로 가라앉은 기분에 무게를 더했다. 게다가 한국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작달막한 키의 현지 가이드와의 만남. 답답할 것 같았다. 다행히 순박해보여서 위로가 되었다. 강서성은 중국의 중류도시다. 땅의 높고 낮음도 별반 없고, 빈부격차도 없는 도시란다. 노동력과 농산품은 아직도 저렴하다니 먹고 사는 데는 조바심 낼 일도 없는 도시임을 알겠다.
이곳은 한국인이 거의 들르지 않는 곳이다. 진짜 중국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반증이다. 날씨 탓인지 도시는 전체적으로 졸린 듯한 표정이다. 느림의 미학을 체험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발걸음도 마음도 자꾸 처지는 느낌이다. 도로 중앙에는 종려나무가 즐비하다. 한 때는 푸른 잎으로 풋풋했을 종려나무의 이파리들이 표피가 되어 나무의 나이를 짐작케 한다. 버스는 장강 줄기를 옆에 두고 달리는 듯하다. 그럼에도 강에 걸쳐진 다리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방은 짙은 잿빛이다. 강을 기점으로 호북과 강서를 구분한다니 우리 일행은 강을 넘나들면서 호북과 강서를 여행하는 셈이다.
약간의 일정 변경이 있었다. 도연명기념관이 월요일 휴관이란 사실 때문에 내일 일정을 이 날 소화하기로 한 것이다. 구강시 일원을 먼저 돌아보는 날이 된 것이다. 이곳은 장강의 중하류쯤이라는데 도연명이 주로 활동하던 지역이다. 예로부터 땅에서는 호북사람을 가장 약삭빠른 사람으로 일컬었다. 그럼에도 9명의 호북사람이 1명의 강서사람을 당하지 못 했다고 한다. 땅이 척박하다 보니 자연 농사보다는 장삿길로 나선 강서사람들이다보니 자연스럽게 잔머리 대마왕이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진정한 잔머리의 대가는 구강사람이라고 한다. 그런 말을 들어서일까. 졸린 듯한 도시 전체의 풍경이 엉큼한 속내를 숨긴 장사치의 표정처럼 의뭉스레 보이기도 했다.
도연명은 동진 시대의 시인이다. 뼈대만 겨우 아는 중국의 역사 속에서도 도연명의 이름만은 유달리 선명하다. 문학을 좋아하는 것도 이유겠지만, 그만한 명성을 지닌 시인인 까닭이리라.
기념관은 한산했다. 마치 조용한 절간 같은 분위기였다. 곳곳에 도연명이 지은 글들을 새긴 비석들이 기념관임을 조용히 증명할 뿐이었다. 하긴 유교의 선봉이라는 공자의 묘역이 있는 공묘도 한산했던 걸 감안하면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다. 공자에 비하면 일개 문인의 기념관에 불과할 뿐이니까 말이다. 복작거리는 관광지에 비해 한결 여유 있는 관람이 싫지 않음에도 한산함이 쓸쓸함으로 느껴졌다. 호젓함이 배경이 된 감정은 비슷하나 한산함을 쓸쓸함은 다르다. 그럼에도 두 느낌을 동일시한 것은 도연명의 명성에 비한 중국인들의 무관심 때문이었을 뿐이다. 예수도 고향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던가. 우리나라에 알려진 도연명의 명성을 생각하면 중국내의 인지도가 안타까울 정도다.
기념관에서는 가묘와 함께 곳곳에 도연명의 흔적이 엿볼 수 있다. 기념관 내부에는 시집 100여권이 소장되어 있다.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전시물은 ‘귀거래사’에 관한 자료가 대부분이다. 도연명의 이름을 떠올리면 으레 떠오르는 작품 제목이다. 귀거래사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도 전시되어 있다. 원나라 유명화가인 원순의 작품이라고 한다. 진품은 심양고궁에서 소장하고 있고, 이곳의 그림은 10M 길이로 절반으로 줄인 규모란다. 비록 낡은 상태였지만 벼슬길을 뒤로하고 전원으로 돌아오는 심경을 노래한 도연명의 마음이 제대로 표현된 인상적인 그림이다.
도연명의 묘소로 향하는 길에는 만개한 꽃부용이 화려하다. 연분홍과 흰색이 적당히 배색된 꽃임에도 화려하게 느껴진 것은 꽃의 크기와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대개의 화려한 꽃은 줄기에 핀다. 꽃부용이 나무에 피면서도 화려한 것은 꽃의 수와도 연관이 있으리라. 그만큼 꽃들이 많이 피어 있다.
도연명의 묘소는 가묘다. 참배객을 위해 겨우 500여년 전 명대에 만든 것이다. 실제 묘소는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한다. 도연명의 생사관과 무관치 않은 유언 때문이다. 도연명은 죽기 전부터 자신을 돌아보는 시를 쓴 사람이다. 자연 생사에 달관한 작품이 우세하다. 사후에 묻힐 곳을 지정하지 않은 것도 그런 맥락이다.
“무덤을 따로 만들기는커녕, 내가 묻힌 자리에 나무 한 그루도 심지 마라.”
도연명의 유언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무덤을 알 만한 표식은 어떤 것으로도 하지 말라는 뜻이 이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 도연명의 무덤으로 짐작되는 묘소를 찾게 된다. 강서성 내에 있는 면양산이다. 이곳은 산세가 워낙 깊은 데다 10여 년 전부터는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민간인의 출입이 어려워진 곳이다. 도연명의 묘소가 부득이하게 10여 년 전 이곳으로 옮겨진 이유다. 묘소를 옮긴 후 도 씨 문중 50여명의 제사와 함께 지내고 있다. 2008년도에 70여명의 일본문인들이 다녀갔을 뿐 내국인들도 거의 찾지 않는다. 민간인 출입이 어려워서 옮긴 의미가 전혀 없는 처지다. 오히려 도연명의 유언이 무색해진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도연명의 묘비에는 “진징사도공정절선생지묘”라고 적혀있다. “나라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은 절개”를 칭송하는 내용이다. ‘오류선생전’이 음각된 석부조도 있다. 오류선생전은 자신의 집 주변에 자라던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호로 삼아 지은 자서전으로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사당 입구에는 나한송이 자라고 있다. 잎이 넓적한 솔잎이 인상적이다. 무덤과 함께 옮겨 심은 것이라는데 잘 자라고 있어 다행스럽다. 나무조차도 심지 말라던 유언을 후손들이 어긴 건지, 자생한 것인지 몰라도 원래 묘소에는 네 귀퉁이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단다. 키가 2m정도였는데 옮긴 뒤 쑥쑥 자란 모양이다. 중국의 문학적 위상을 알린 루쉰의 시도 있다. 도연명을 기념하는 시로 ‘직언은 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불만을 시로 순화한 위대한 시인’이라는 내용이란다. 일요일인데도 관광객은 우리들뿐이었다. 덕분에 여유 있는 관람을 했다.
동림사(東林寺)
원래 답사예정지는 서림사다. 서림사는 소식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동양고전을 바탕으로 하는 여행인 만큼 문학작품 속의 배경을 답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당연성만이 잣대가 될 수는 없다. 서림사는 비구니들만 묵는 절인 까닭에 부득이 동림사를 택한 것이다.
동림사는 1,500여 년 전 동진 때 혜원법사가 세운 사찰이다. 난리를 피해 왔던 곳에 정토종의 모태를 세운 것이다. 강서성의 절경인 여산에 세운 것은 부처의 배려일까. 여산은 당송시대 유명 문인들이 두루 거쳐 갔을 정도로 빼어난 곳이다. 주자를 비롯하여 도연명, 소식, 백거이가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동림사를 세운 혜원법사는 산문 안에서 수행만 했다. 어떤 사람이 찾아와도 배웅을 할 때면 다리를 넘지 않는 원칙을 지키면서. 단 한 번 예외가 있었는데 도연명을 배웅할 때였다. 헤어짐이 아쉬워서 그만 호계(虎溪)를 넘었다. 그때 호계를 지키던 호랑이가 포효했다. 결코 산문을 넘지 않겠다는 스님이 산문을 넘는 것을 꾸짖는 포효였다. 이에 혜원법사가 그림자는 산을 넘지 않았다며 크게 세 번을 웃었다. 발만 속세에 들인 모습이었다. 도연명과의 작별을 끝낸 뒤부터 스님이 넘던 다리에 걸쳐진 개울은 자연스럽게 호계가 되었다. 도연명이 자주 들렀던 절인지 동림사에는 그와 연관된 건물도 있다. 백련사가 그것이다.
“이 절은 정진하는 스님들만 있는 곳입니다. 마이크 사용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으니, 각자 돌아보시고 정한 시간에 여기서 만나겠습니다.”
가이드 이용산이 입구를 들어서자 말한다. 꾀쟁이 이용산에게는 가이드하기 걸맞은 곳이 아닐 수 없다.
대웅보전 앞에서는 향을 팔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향을 다발로 산다. 불을 붙인 향다발을 들고 사방 3배를 한 다음 향대에 꽂는다. 비는 이의 기원이 담긴 향다발에서 나는 짙은 향은 가까이서 맡으면 머리가 아플 정도다. 잠시 떨어져서 비손을 하는 사람을 보았을까? 참배객이 사라지자 장사꾼이 나타나 그 향다발을 금방 뽑아버린다. 뽑은 향은 불이 붙은 채 철판으로 된 쓰레기 소각장으로 던져진다. 참배객의 간절한 기원이 상혼에 휘말려 사라지지 않기만을 바랄뿐이다.
동림사는 꽤 복잡했다. 많은 내국인들이 보이는 걸로 봐서 유명사찰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경내에는 나한송과 녹나무가 주로 자란다. 일부러 가꾸지 않아 멋대로 자란 나무들. 높게 자란 모습에서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중국의 사찰이 우리나라의 사찰과 다른 점은 청결상태다. 우리나라의 사찰은 유명세를 얻었든 그렇지 못 했던 경내가 깔끔한 것이 특징이다. 동림사는 달랐다. 장방형의 연못물은 녹조 덮인 바다처럼 불투명하고 짙은 녹색이었다. 곳곳에 떨어진 휴지조각들과 공사 중임을 알리는 자재들도 늘어져 있다.
문불탑은 아득한 계단 위에 자리하고 있다. 이 탑은 한 스님이 불경을 번역한 것을 기념한 건물이란다. 소원을 빌면 자녀가 공부를 잘 한다고 알려진 탑이다. 이름에 걸맞게 수험생 부모들이 기원을 하러 많이 들른다고 한다. 234개의 계단을 딛고 올라야 만나는 문불탑. 개수에 비해 완만해서 오르기에 힘이 들지는 않는다. 많은 계단을 올라야 문불탑을 만날 수 있는 것은 공부의 길이 그만큼 멀고도 아득하다는 의미인 듯하다. 문불탑을 향하는 길에 스님들의 이동행렬이 보인다. 짙은 고동색 가사를 걸친 것으로 보아 수행승들인 듯하다. 젊은 혈기를 가사로 싸맨 수행승들의 걸음이 거룩해 보인다. 일부 수행승들의 3보1배의 모습은 숱한 관광객들의 웅성거림 속에서도 자못 진지하다. 그래서 더 쉽게 눈에 띈다. 간간이 3보1배하는 젊은이들도 보이는데 아마도 시험을 앞둔 학생들 같다.
식탁마다 배갈이 한 병씩 배당된 점심 덕분에 일행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발그레하다. 수봉폭포로 향하는 길에 거대한 금불상이 보인다. 햇살을 받은 금불상은 발그레한 우리의 얼굴과 흡사하다. 동림대불이란다. 큰 것을 좋아하는 중국인들답게 황금 75kg을 도금한 높이 48m의 불상이란다.
“이름은 동림대불이지만 중국에서는 50m 이하는 기본이라 큰 축에 속하지도 않습니다.”
햇살에 번쩍거리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불상을 보면서도 가이드의 말에 픽, 웃음이 난다. 아무려나 그 번쩍임은 수행의 삶으로 빛나는 부처의 내면의 빛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수봉폭포
폭포는 기대를 갖게 한다.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물줄기는 소리만 들어도 답답한 속이 탁 트인다. 보얗게 포말을 이루며 떨어지는 물줄기의 모습도 세상사 근심을 모두 사라지게 한다. 폭포라는 이름이 기대를 갖게 하는 이유다. 도로가에는 유도화가 막 피어나고 있는 중이다. 다음 날 오를 여산을 왼쪽으로 끼고.
수봉폭포로 오르는 길목에는 이백의 좌상이 있다. 다음 날 일행이 오를 여산을 왼쪽으로 낀 위치다. 자신의 시 ‘망여산폭포’를 새긴 좌대 위에 비스듬히 앉은 이백은 오른손에는 책을, 왼손에는 술잔을 든 모습이다. 술을 즐긴 문인임을 알고 있었으나 정작 술잔과 책을 동시에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났다.
“술과 책을 함께 즐기고 있으니 그야말로 주책이네.”
“이 밑에다 바가지만 한 개 놓으면 주책바가지.”
이영필 선생이 나의 말에 걸맞은 응수를 한다.
입구에서 수봉폭포까지는 케이블카로 오른다. 50여 분을 타는 케이블카는 2명씩 타게 되어 있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발이 닿지 않는 탈것에는 괜히 조바심이 나는 터라 탈까말까를 많이 망설였다. 아래에서 보니 작은 상자가 줄지은 채 매달려서 흐르는 듯하다.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그렇다고 혼자 남아 있을 수도 없어서 타기로 했다. 보기에는 천천히 흐르듯이 움직이더니 타려는 순간에는 얼마나 민첩성을 요구하던지, 급하게 회전을 하는 바람에 나는 결국 무릎을 케이블카 몸체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무릎이 욱신거렸다. 발목도 안 좋은데 무릎까지 불편해질까 봐 신경이 쓰인다.
케이블카는 112대로 2인승이다. 문에 유리가 없는 구조다. 가는 쇠붙이에 안전장치도 없이 오르는 것이 불안하다. 밖에서 부는 바람이 그대로 느껴져 공포심도 생긴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 아니었고, 케이블카도 빠르게 달리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중간쯤에서는 찬바람이 밀려들어오더니 산 위에 오르니 한기가 돌았다. 전날 날씨가 더워서 옷을 얇게 입었던 까닭이다. 이런 기분 탓일까. 명성에 비해 여산의 산세는 그다지 빼어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수봉폭포는 여산에서 관광지로 가장 먼저 개발된 곳이다. 그 사실에 기대를 갖고 수봉폭포가 보인다는 지점에 섰지만 기대한 물줄기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아녀자의 모습을 닮은 동상만 하나 서 있다. 웬 여자의 동상인가 싶었는데 ‘이백상’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름을 본 뒤 자세히 보니 칼을 찬 모습이다. 이백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가이드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바위 가운데 흰 명주실타래를 풀어놓은 듯한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수봉폭포란다. 실낱같은 물줄기가 마치 갈라터진 뺨 위에 말라붙은 눈물자국처럼 안쓰럽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곳이 최초의 19금(禁) 영화촬영지로 원앙욕 모습을 찍은 곳이었다니 그조차 믿기지 않는다.
“올해는 강서성이 40년만의 가뭄으로 폭포수도 부족한 상태입니다.”
오랜 가뭄으로 폭포가 거의 말랐다는 가이드의 말이 변명처럼 들릴 정도다. 이런 곳을 이백은 그토록 찬탄하는 시를 썼다니 그 또한 허풍쟁이일 거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주변의 소나무들을 보니 폭포도 메마르게 할 만큼의 지독한 가뭄의 흔적이 엿보이긴 한다. 소나무가 모두 낙엽송이 된 풍경 위로 집게손가락만 펼쳐서 걸친 모습의 케이블카가 더욱 불안하다.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중국여행에서는 황당한 상황이 종종 생긴다. 백록동서원 방문도 그 중 하나다. 나름 여유로운 일정이었는데도 백록동서원 입구에 도착하니 5시 40분이다. 해가 뉘엿뉘엿했다. 늦가을이라 해가 짧은 영향도 있었으리라. 게다가 더욱 황당한 일은 입구에 널브러진 건축자재들이다. 백록동서원이라는 석패방을 세우려는 모양이다. 거기에 붙일 것으로 보이는 돌 조각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여기서 1Km 정도 된다는데 걸어서 이동하시죠.”
가이드의 말에 따라 걷기로 했다. 오른쪽 발목 때문에 신경이 쓰였으나 길이 험하지는 않다. 완만한 흙길이라 걷는데 부담도 없다.
그런데 거리가 상당했다. 예상 시간을 훌쩍 넘기고야 닿았다. 산 아래 자리한 서원입구는 이미 꽤 어둑어둑해졌다. 여간 황당하지 않다. 언젠가 고정서원을 들렀던 황당함도 살아난다. 물론 황당함의 방향은 다르다. 고정서원은 몰락한 종가의 건물처럼 지붕까지 뜯긴 상태여서 허망한 황당함이었고, 백록동서원의 경우는 그와는 다른 황당함이다. 입구에서부터 새 단장을 하는 바람에 차량출입이 통제되어 제대로 관람도 못한 채 돌아서야 할 판이다. 제대로 된 유적은 시간에 쫓겨 보지 못하고, 시간이 남아서 들른 유적은 방치된 채 씁쓸함을 갖게 하다니.
어쨌거나 서원 앞에서 그냥 돌아설 수는 없다. 서원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사방이 어두워진 뒤였다. 눈에 익었던 풍경들이 아니어서 발을 옮기기에도 어정쩡한 채로 명륜당만 들렀다. 서원의 강의실인데 현판의 글씨는 주희선생의 친필이란다. 강의실에는 힘만 주어 누르면 그대로 부서질 것 같은 책걸상이 놓여 있다. 겨우 사진만 몇 장 찍고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명륜당을 뺀 나머지 건물에는 조명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아서 건물의 이름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백록동서원의 이름에서 연상되는 것은 흰사슴이다. 흰사슴은 상서로운 동물로 알려져 있다. 10만 분의 1 비율로 태어날 만큼 희귀한 동물이다. 이런 희귀한 동물을 기르던 곳이 백록동이다. 당나라 때 이곳에서는 이발(李渤)이 그 형 이섭(李涉)과 함께 은거하다시피하며 지냈다.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며 살면서 흰사슴을 길렀다.
사슴은 예사로운 동물이 아니었다. 은거생활을 하는 주인을 위해 10리 밖에 있는 거리까지 심부름을 할 정도였다. 주인이 필요로 하는 서적과 문방사우를 구해 돌아올 만큼 영민하였기에 사람들은 이발을 백록선생이라 불렀다. 그의 거처가 백록동(白鹿洞)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훗날 이곳에 서원의 전신인 여산국학(廬山國學)이 설립되었고, 송대에 이르러 지방자제를 교육하는 서원이 되었다. 그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서원이 된다. 그 후에 건립된 모든 서원들의 표본이 되었고, 한국 서원의 효시가 되는 경북 영주시 순흥면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紹修書院)도 백록동서원을 본떠 만든 것이라 한다.
한때 주춤하던 서원의 명성은 남송 시대 주희선생의 열의로 다시 살아났다. 주희선생은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버려진 서원의 터를 찾게 된다. 여산 중에서도 풍광이 아주 아름다운 지점이라 과연 흰사슴이 살았을 법한 곳이다. 그곳에다 서원을 재건한 주희선생은 교육과 서적의 보존, 공자를 비롯한 옛 성현들에 대한 제사 등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서생들에게는 무상으로 숙식을 제공하면서, 도덕적으로 엄격하고 혹독한 훈육을 시행했다. 그러면서도 주희선생은 자신과 다른 신념을 지닌 학자에게도 강의를 맡게 할 정도로 서생들의 다방면 지식습득에 힘썼다. 주희선생의 이러한 신념과 가르침은 많은 서원들의 강령이 될 정도였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택시를 타야 했다. 칠흑 같은 어둠에 에워싸여 더는 걸어서 이동을 할 수가 없다. 더구나 오는 중에도 많이 걸었던 터라 피곤하기도 했다. 들어올 때는 만만찮은 요금을 부르던 택시기사들이 요금을 할인해 준단다. 우리 일행이 마지막 승객이라는 걸 알아챈 상술 덕분이다.
저녁을 먹은 뒤 정현숙 님으로부터 귀고리를 하나둘씩 선물로 받았다. 비즈로 직접 만든 귀고리여서 한결 귀하게 느껴졌다. 여행을 오면서 이런 정성까지 담아온 그 마음이 오랜 감동으로 남을 것 같다.
식당을 나와서 마트와 크고 작은 가게들을 돌아보았다. 마트에는 신라면과 초코파이가 진열되어 있어 반가웠다. 스마트폰으로 찍었을 때였다. 직원이 마구 달려와서 안 된단다. 돌아서려는데 이미 찍은 것도 지우란다.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다가 들킨 느낌이다. 약국이 문이 닫힌 뒤여서 오빠가 사려던 붕대를 사지 못했다. 다시 몇 군데 가게를 들락거렸다. 구강시에서는 가장 번화한 거리라는데 한국인들이 들르지 않는 곳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인이라는 걸 밝히자 직원들이 급 반색을 한다. ‘강남스타일’로 다 통한다. 어색한 말춤 흉내만으로도 호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은 후여서 몇 군데를 더 들른 끝에 겨우 붕대를 살 수 있었다.
번화한 거리를 얼마나 걸었을까, 주변이 꽤 낯익었다. 우리가 묵은 호텔이 보인다. 밤거리에서는 구강시민들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젊은 남녀가 모여서 춤을 추는 광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넷째날(11월 4일)-여산풍경구
여산풍경구 입구까지는 버스로 이동했다. 6시간을 걸어야 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미리 주눅이 든다. 내 발목이 잘 견뎌야 할 텐데, 걱정이 앞선 까닭이다. 그런데 정작 고생을 한 것은 버스에 탑승을 한 시간이었다. 50여 분을 탔을 뿐이지만 구절양장처럼 구부러진 380여 개의 코너를 도는 일은 예사롭지 않은 고통이었다. 속이 마구 울렁거렸다. 머리가 깨질 지경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입구에는 커다란 인공호수가 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들이 멀미 직전의 고통을 해소시켜준다. 호수 주변의 풍경들이 우리나라의 가을과 닮아있다. 고운단풍이 어우러진 모습이 반갑다. 중국에서는 처음 보는 풍경이다. 대개는 활엽수조차 푸른빛을 띤 나무들. 푸르름도 핏기 잃은 환자의 얼굴처럼 싱싱함이 사라져 시든 느낌의 이파리들이다. 게다가 지독한 스모그를 뒤집어 쓴 나무들은 안쓰럽기까지 한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중국에서 보는 나무들은 거의가 우중충한 느낌이었다. 이맘때 떠나는 중국여행이 억울한 것은 늘 한국의 아름다운 단풍을 버려두어야 한다는 아쉬움 때문인데 이곳에서 어느 정도 보상을 받은 느낌이다. 쌀쌀한 공기도 한국의 이맘때와 닮아있어서 한기를 느끼면서도 상쾌하다.
먼저 돌아볼 곳은 화경과 금수곡, 오로봉이다. 화경과 금수곡은 백거이의 유적지다.
‘풍경구에 들어서면 금연하십시오.’
여산 입구에서 읽은 한글경고문이다. 한국인이 거의 찾지 않는 곳이라는데도 한글이 보이는 걸 보면 한국인이 중국관광을 많이 하긴 하는 모양이다. 어딘지 어색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문구다.
입구에서부터 만나는 것은 화경(花徑)이다. 백거이를 감동시킨 꽃길이란다. 백거이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한가(長恨歌)를 쓴 시인이다. 중국 문학을 일컬을 때 따로 당시(唐詩)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당대의 시는 유명하다. 당대가 그만큼 시문학이 황금기를 구가했던 시대였다. 이백과 두보가 바로 당시로 유명한 시인이다. 그와 함께 백거이는 한유와 더불어 ‘이두한백’이라 불릴 만큼 널리 알려진 당대의 문장가다. 나는 당시를 알지 못한다. 그저 이두한백 네 문장가의 이름을 알 정도다. 그렇지만 이런 문장가들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여행의 묘미에 늘 끌리곤 한다.
백거이 초당은 두보의 초당에 비하면 보잘 것이 없다. 초당이라기보다는 작은 박물관 내지는 구멍가게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법하다. 백거이와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해두기도 했지만, 조잡한 물건들을 판매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초당 앞에 선 채 고뇌하는 모습의 백거이 석상은 오히려 생뚱맞다. 젊은 시절의 모습인 듯 당당하고 늠름한 풍채에 호남형의 얼굴이 어딘지 옹색해 보이는 초당과는 걸맞지 않아서다.
점심을 먹고 들른 곳은 오로봉(五老峰)이다. 이름에서 짐작되듯 다섯 노인이 앉은 모습을 닮은 봉우리다. 눈앞을 막아서는 돌계단. 올려다보니 아득하다. 올라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다. 오로봉까지는 두어 시간쯤 걸린다는 가이드의 말에 걱정이 앞선다. 등산도 권할 수가 없다던 의사의 말이 또렷이 살아난다. 산을 오르는 것은 무난하나 내려올 때 다치면 큰일이라던 말이다.
“1봉까지만 갑시다.”
조인숙 선생의 권유에 못 이긴 척 돌계단에 발을 올린다.
흙을 밟을 수 없는 산. 중국에서는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나 발목을 생각하니 벌써 뻐근하다. 한발 한발 떼는 발걸음이 그다지 무겁지는 않으나 내려갈 길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30여분 쯤 걸었을까? 끝이 없을 것 같은 돌계단이 끝나자 조잡한 봉우리가 보인다. 1봉이란다. 이 정도라면 2봉까지도 갈 수 있겠다 싶었다. 차근차근 한 발짝씩 떼다 보니 인접한 2, 3봉이 나타난다. 바람도 시원하고 공기도 맑다. 깨끗이 씻은 듯한 햇빛도 상쾌하다. 옆을 보니 앞선 일행들은 벌써 4봉을 향해 가고 있다. 마주 보이는 곳에서 손을 흔드는데 그다지 멀지 않은 듯하다. 다시 봉우리를 내려와 4봉을 향한다. ‘골골 백 년’이라더니 발목 때문에 조바심을 내는 사이 벌써 4봉이다. 이제 그만 간다니 문득 스스로가 대견하다. 발목이 아프다는 구실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면 그 좋은 풍광을 놓쳤을 것 아닌가. 그것도 지루하게 일행을 기다리는 낙오자의 모습으로.
가는 데까지는 가고, 하는 데까지는 해 본 뒤에 가능, 불가능을 토로할 일이다. 약간씩 욱신거리는 발목으로 올랐던 오로봉이 좋은 교훈을 일깨워준다. 노인의 형상이라는 바위들. 단순한 바위들이 아닌 모양이다. 그보다는 범인(凡人)들을 일깨우는 신선만 같다.
“다음은 오늘 일정의 마지막 코스인 삼보수를 보러 갈 차례입니다. 그런데 저 산 꼭대기 마을에서 자유시간을 갖자는 의견도 많은 것 같으니 한 번 묻겠습니다.”
가이드가 우리의 의견을 묻는다. 그러면서 삼보수라야 막상 가서 보면 실망할 수도 있단다. 달랑 나무 세 그루만 있을 뿐이란다. 자신의 고객들에게 의견을 묻겠다는 말이지만 이왕이면 힘든 길을 안내하기보다는 좀 쉬고 싶다는 마음이 담긴 꾀돌이 가이드다운 물음이다.
일행들도 적당히 지친 터라 만장일치로 시가지에서 한 시간여 자유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버스로 이동 중에 보이는 마을이다. 산 정상에 있는 듯한데 예쁜 집들이 꽤 많았다. 인구도 2만여 명이나 산단다. 마치 유럽의 어느 마을을 옮겨놓은 모습에 끌렸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마을의 번화가인 모양이다. 상점들이 즐비했다. 이렇다 할 특색 있는 가게는 없었다. 어느 집이나 같은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나는 과자를 사서 일행들과 나눠먹었다. 그동안 얻어먹기만 했다는 생각이 난 것이다. 남는 시간은 버려도 아깝지 않을 조잡한 장난감을 두어 개 샀다. 집결시각 20여분을 남기고 도장을 새기게 되었다. 한둘씩 새기다보니 결국 집결시각은 넘겼지만 흡족한 시간이었다.
저녁 식탁에서는 오빠와 나에 대해 귀여운 오해를 한 최은숙 씨와 이순복 씨 덕분에 소화가 다 된 듯했다.
다섯째 날(11월 5일)-등왕각
회원들 대부분은 동양고전에 관심이 많은 터라 문학작품의 고장이나 문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간다는 사실이 가장 들뜨는 듯하나 나는 다르다. 동양고전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만큼 나는 이 여행에서도 날씨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는 편이다. 모처럼 아침부터 맑은 날이다. 비와 구름, 스모그로 흐릿하던 하늘이 걷혀서일까. 마음도 덩달아 환해진다.
구강시에서 남창(南昌)으로 이동하는 날이다. 남창이라는 이름이 반갑다. 한자는 다르지만 울산에도 남창(南倉)이라는 지명이 있다. 군사들의 식량을 저장하던 남쪽의 창고라는 의미에서 생긴 지명이다. 지금은 외고산 옹기마을로 전국에 널리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다. 익히 들었던 남창. 한글 발음이 같아서 답사의 목적과는 동떨어진 친밀감으로 출발하는 아침이다.
가이드가 간식을 한 보따리씩 나눠준다. 간밤 쇼핑센터에서 만난 가이드가 샀던 것들이다. 기차를 타면 먹을 간식이란다.
장강 주변에는 그림 같은 집들이 즐비하다. 여전히 희뿌연 날씨지만 장강의 모습을 처음으로 제대로 본 날이다.
남창은 비교적 현대식 건물이 많은 도시다. 그 때문일까. 멀리서 보자니 빨간 기둥에 청기와를 얹은 고건물인 등왕각은 생뚱맞은 느낌이다. 중국의 3대 누각 중 하나라는데도 그다지 큰 의미로 다가오지도 않는다. 설화 같은 왕발의 이야기를 듣기까지는.
등왕각은 당태종 이세민의 동생인 이원영이 세운 누각이다. 이원영이 등왕으로 봉해져 홍주도독으로 부임하여 건립했다. 등왕각은 등왕이 세웠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건립 이래 수차례 전쟁으로 불타고 허물어진 것을 29차례나 보수를 했다. 현재의 건물은 1989년에 복원된 것이다. 수난을 거듭한 건축물을 그렇게나 여러 번 개보수를 감행한 것은 어쩌면 왕발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는 아니었을까. 그러는 사이 왕발의 천재성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비범함에 알 수 없는 조력자까지 더해진 이야기로 과장된 것 같기도 하다. 아무려나 등왕각의 유명세는 빼어난 건축미보다 왕발의 이야기가 더해진 덕분인 듯하다.
등왕각은 녹색기와를 얹은 누각이다. 높고 낮은 현대식 건물 사이에 끼어 앉은 듯한 모습이 다소 생뚱맞다. 이 누각은 2007년도에 들렀던 악양루, 이번 여행에서 보았던 황학루와 더불어 중국 3대 누각이란다. 온갖 장수동물의 형상과 더불어 깎아지른 듯한 강 언덕에 세운 등왕각이 3대 누각 중 경치와 복원상태가 최상인 듯했다.
이러한 등왕각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왕발의 등왕각서(滕王閣序) 덕분이다. 등왕각서는 제갈량의 출사표, 왕희지의 난정집서, 소식의 적벽부에 이은 중국 4대 문장 중 하나라니 역시 왕발 덕분에 등왕각이 유명세를 더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겠다.
등왕각으로 들어서는 길 한 켠에 왕발의 동상이 서 있다. 27세라는 워낙 젊은 나이에 죽었음일까? 다른 동상보다 팽팽한 얼굴 모습과 다소 통통한 몸체가 언뜻 보면 소년의 모습처럼 보인다. 그 천재성과 혈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하다.
등왕각서(滕王閣序)로 유명한 왕발은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6세 때부터 시를 지을 정도로 신동이었다. 이러한 천재성은 더욱 빛을 발하여 이미 14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관리에 임명될 정도였다.
그러나 천재가 주위의 시샘이나 질투를 받는 것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왕발도 마찬가지였다. 주위를 놀라게 할 정도의 문재(文才)는 칭송의 구실이 되는가 하면, 어린나이로는 버텨내기 힘든 시기의 구실이 되기도 했다. 결국 장난삼아 쓴 한 편의 글 때문에 왕의 노여움을 사서 벼슬자리에서 쫓겨난다.
그 후 자신의 일로 좌천된 아버지를 만나러 가게 된다. 도중에 노자가 떨어진 왕발은 강가의 사당에서 빌다가 잠이 든다. 잠든 사이 꿈에서 신녀를 만난다. 신녀로부터 등왕각 낙성식에 서문 짓기 대회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노잣돈도 마련할 수 있다는 신녀의 말에 따라 비몽사몽간에 본 강가에서 배를 탄다. 눈을 감고 있는 사이 사공이 칠백 리 거리를 달려 행사장까지 데려다 준다.
당시 그 지역의 도독이었던 염백서가 서문을 짓는 대회라고 공표는 했으나 장원은 사실상 정해진 행사였다. 염백서는 이 날 자신의 사위를 여럿에게 자랑할 참이었다. 해서 미리 등왕각서(騰王閣序)’를 짓게 했다. 이날은 그것을 발표만 하면 되는 자리였다.
사실을 알고 있는 많은 참가자들은 불참한 상황이었다. 참가를 한 사람들도 아예 글을 짓지 않았다. 오직 사실을 모르는 왕발만이 글을 지었다. 당돌한 왕발의 모습을 본 염백서는 화를 내며 자리를 떠난다. 그런 다음 아랫사람을 시켜 왕발이 글을 지을 때마다 보고하라 이른다. 처음 몇 문장의 상투적인 내용에 내심 안심하려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명문장이라 버릴 수가 없었다. 마지막 줄의 한 글자만 비운 등왕각서와 시를 지은 왕발은 홀연히 자리를 떠난다. 아무리 천재라곤 하지만 상대는 염백서의 사위임을 눈치 챈 것이다.
왕발이 떠난 뒤 염백서는 문장에 놀란다. 마지막에 비워 둔 한 글자가 뭘까, 여러 사람들과 이 글자 저 글자를 다 넣어 봐도 글맛이 나질 않았다. 급기야 염백서는 사위인 오자장을 시켜 왕발을 불러오라 이른다. 강나루를 막 떠나려던 왕발은 헐레벌떡 달려온 오자장과 마주친다. 은 200냥을 주면서 오자장이 비워둔 한 글자를 알려달라는 애원을 한다.
“손바닥을 내미시오. 단 내가 글자를 쓰는 동안 눈을 뜨면 글자가 사라지니 그리 아시오.”
왕발은 강물을 붓에 찍어 눈을 감고 있는 오자장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 노잣돈을 마련한 왕발은 아버지를 만나러 떠나면서 오자장에게 마지막 당부를 한다.
“이제 주먹을 꼭 쥐시오. 도착하기 전에 주먹을 펼치며 글자는 날아가 버리니 조심하시오.”
오자장이 등왕각에 도착하자 오매불망 사위를 기다리던 염백서가 재촉한다.
오자장이 손을 펼쳤으나 빈손이었다.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손바닥을 본 좌중은 빌 공(空)자를 써넣는다. 비로소 깊은 글맛이 우러나는 등왕각서가 되었다.
이처럼 뛰어난 문재를 지닌 천재가 27세에 죽었다니 오랜 역사 속의 인물이지만 그 천재성은 아깝다.
등왕각의 각 층마다 등왕각과 관련된 그림과 사진들이 걸려있다. 처음 건축 당시의 모습일까? 깎아지른 듯 높은 언덕에 떨어질 듯 얹힌 모습이 아름답다기보다 위태로운 등왕각의 그림이 인상적이다. 아래로는 고요한 강물이 펼쳐진 그림이다. 5층이었던가? 소식의 필체로 동판에 새겨진 왕발의 등왕각서가 걸려 있다. 정확한 내용은커녕 글씨도 다 읽을 줄 모르지만 그 앞에서 사진을 찍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등왕각에서 내려다보면 고요히 흐르는 강이 보인다. 강가의 깎아지른 듯 높은 언덕에 지었음이 실감난다. 높이는 백마강 절벽보다 훨씬 높지만 삼천궁녀가 뛰어들었다는 백마강을 연상케 한다. 높고 낮은 현대식 건축물이 빽빽한 남창의 신도시와 고풍스러움이 풍겨나는 구도시를 한 곳에서 조망할 수 있다. 부조화한 신, 구도시를 등왕각이 이어주는 느낌이다.
고속열차를 타고
오후에는 남창역으로 이동했다. 상해로 이동하는 고속열차를 타기 위함이다. 남창역까지 가는 도중에 단장님의 중국발전사에 대한 경험담을 들었다. 문화혁명 이후 그들이 헌신짝처럼 버렸던 공자사상. 효(孝)로서 민심을 모으려는 계획으로 베이징올림픽 때는 공자를 들고 나왔단다. 효(孝)가 충(忠)으로 이어지기가 가장 쉽다는 것을 정치지도자들은 알았던 것이다. 그런 정치인들의 앞날에 대한 안목은 성공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아이들에게 대개의 소풍장소가 고전문학의 산실인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 아이들이 여간 대견하지 않으면서도 두려움도 느껴야겠다. 동양고전이 인성교육에도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를 알아챈 그들의 안목에 우리는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짧은 만남이라도 이별이 아쉬운 것은 서로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겼기 때문이리라. 남창에서 순박한 표정으로 우리를 안내했던 젊은 남자가이드와 작별이 그랬다. 일행들은 각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간식이며 우리나라 과자 등을 그 가이드에게 전해주었다. 더러는 팁을 주는 이도 있어서 보는 이의 마음도 흐뭇했다.
기차 여행은 현대인들에게는 향수다. 함께 할 사람이 없어도 설렌다. 하물며 좋은 사람들과 같은 객실에 앉아 낯선 나라를 달린다는 것은 설렘 이상의 들뜸이다.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도 여행의 맛이라 싶었다. 까다로운 검색대를 지날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즐거웠다.
그런데 아뿔싸. 대합실 풍경에 놀라 벌어진 입이 한동안 다물어지지 않았다. 대합실은 만원버스에 버금갈 만큼 붐볐다. 옆 사람과 어깨가 부딪치는 일은 예사였다. 도무지 평일의 풍경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명절 풍경과 맞먹는 복작거림에 가이드 이용산이 말한다. 이 정도는 복잡한 것도 아니라고. 휴일에는 발 디딜 틈도 없어 앞사람의 뒤통수만 보면서 밀려나갈 지경이란다. 내 눈에는 그날이라고 그런 풍경이 아니지도 않았기에 명절 풍경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자칫하면 일행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들으며 플랫폼으로 나갔다.
기차를 타러 가는 데만도 5분 이상은 소요된 듯하다. 그만큼 열차의 정차시간도 길어서 쫓기지는 않았다. 둘씩 앉고, 좌석간격이 좁아 불편하기 그지없는 우리나라의 고속열차보다 여유가 있어 좋았다. 한 줄은 두 명씩, 한 줄은 세 명씩 앉도록 되어 있었지만 좌석간격이 넓어서 편안했다. 입석도 제법 많았지만 객실은 대합실보다는 복잡하지 않았다. 독일에서 도입한 기술이라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역시 실용성을 살리는 데는 독일제품이 최고라는 생각에.
일행은 저마다 가이드의 말에 따라 간밤 호텔에서 챙겨두었던 실내화를 꺼내 신었다. 2시 반쯤 출발한 열차를 타야 하는 시간은 6시간이 넘는 까닭에 발이 편안해야 한단다. 각자 한 봉지씩 받은 과자로 가위바위보 게임을 했다. 이긴 사람이 상대의 과자를 가져 오는 게임이 아니라, 상대에게 자신이 가진 과자를 나눠주는 게임이었다. 아무리 오래 기차를 탄다고 해도 넘쳐나는 간식을 다 소화할 수는 없어서 고안해낸 게임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더러는 수다를 떨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하는 사이 일행들은 한결 가까워진 끝에 도착한 상해 홍교역.
깜깜할 시각이나 불빛으로 환했다. 삼겹살과 소고기 전골로 저녁을 먹었다. 비만 걱정을 하면서도 당기는 입맛은 삼겹살 추가로 이어진 한식이었다. 이제는 잘 일밖에 없는데 기름진 저녁을 먹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기로 했다. 다만 한 가지 약속을 했다. 같은 식탁에 앉았던 친구 이민경과, 정현숙 님과의 약속이다. 내년 여행에는 적어도 3kg은 감량을 하자는. 각자의 체중은 알지 못하기에 그 정도 감량이 눈으로 확인은 되지 않을 테지만, 어쨌거나 다이어트 목표가 정해진 것이 내년 여행을 기대하는 또 하나의 구실이 될 듯하다.
마지막날(11월 6일)-귀국
5박6일이 끝났다. 새벽부터 움직여야 하는 날이다. 귀국 행 비행기가 8시50분발인 까닭이다. 일탈은 정리하고, 일상을 재점검하는 날. 일탈이 즐겁고 보람찬 것은 돌아갈 일상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실감한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이 늘 아쉬운 여행. 동양고전연구회의 답사여행은 늘 그랬고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다. 이번 여행을 추억하면서 상해를 떠났고, 내년 여행을 기대하면서 대구공항을 벗어났다. 한 자리에 발목을 꽂은 채 나를 맞는 작은집이 더없이 반가우면서도 나는 바로 일상으로 복귀를 해야 했다. 상해에서 출근한 선생으로.
첫댓글 회지에 게재된 것은 축약본이고 지금 올리는 기행문은 오리지날 무삭제 버전입니다. 회지에 원고 분량의 제한이 있어서 다 싣지 못하여 이번 답사를 앞두고 전문을 올려봅니다. 작년 여행에 참가하신 분들은 추억을, 올 여행에 참가할 예정으로 있으신 분들은 기대감을 갖기를 바랍니다.
저는 조금 부러운 마음으로 읽겠습니다.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중계방송 해주시면 감사합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