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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윤리교육과를사랑하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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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역사] 발표자료 [고려왕조] 묘청의 난은 왜 실패했을까?
08 윤교 윤영태 추천 0 조회 392 08.10.01 09:28 댓글 8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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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10.10 19:51

    또한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우리나라 1천 년 내 사건 중에 가장 큰 사건이라 하며 높게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묘청이 주장한 서경 천도 운동과 금국정벌론은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자신의 군대마저 제대로 조직하지 못한 묘청에게 금국정벌론은 일종의 여론을 호소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며 그 정책은 전혀 현실성이 없는 공허한 주장에 불과한 것이 었다고 생각합니다.

  • 08.10.07 22:45

    * 배성욱 : 6) 방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 방편이었으며, 7) 불과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 불과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8) 발표를 듣고 난 후 조금의 아쉬움이 남았다면 묘청의 난이 일어난 후 그 사건으로 인해 고려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 조금 설명해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 * 非문입니다.

  • 08.10.07 23:22

    서양에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 성공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현재 우리의 행동들이 역사에서 중요하다는 의미이지요.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에는 우리의 민족정신이 담겨있습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운동을 전개하며 고려가 송이나 금과 대등한 입장에 있다는 것을 보이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정신’만 있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과 더불어 그만큼의 명분이 있어야 하겠지요. 묘청의 운동에는 이러한 명분이 부족했습니다.

  • 08.10.07 23:07

    * 한정아 : 1) 그 만큼의 -> * 관련하여 '만큼'의 용법을 정리하여 [바르고 고운 우리말 우리글]에 게시하세요.

  • 08.10.07 23:22

    수정하였습니다.

  • 08.10.07 23:04

    마치 공중누각처럼 서경천도를 이루고자하는 정신은 컸지만 이를 뒷받침 해줄 정당성이 부족했던 것이지요. 일방적 권력의 행사가 아닌 대의적으로 소통하고 다른 이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명분이 세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명분 속의 가치를 찾아내고 이념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 윤리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발표 수고하셨어요.^ ^

  • 08.10.07 23:06

    윤영태 학우의 발표 잘 들었습니다. 신채호가 묘청의 난을 위대한 사건으로 평가했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저 역시나 그 주장이 타당하다 생각했고, 따라서 묘청의 난이 성공하지 못한 혁명이라 여겼습니다. (실패와는 약간 다른 뉘앙스라 생각해 주세요. 묘청 일파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김부식 등의 보수 세력 탓에 반란에 그치고 말았다고 생각했거든요.)

  • 08.10.07 23:07

    신채호의 주장으로는 묘청의 난은 시대를 바꿀만한 획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지요. 바르지 못한 명분일까요? 묘청과 그들 일파의 속셈이 무엇이든 자주를 외친 그들의 주장이 그릇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민중들이 원하는 것과는 멀리 떨어진 것이었죠. 묘청이 일본 강점기에 그와 같은 주장을 했더라면 널리 지지받았을 것입니다. 신채호가 그를 높이 평가한 것처럼 말이지요.

  • 08.10.07 23:07

    시대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느끼게 됩니다. 신채호가 묘청의 난을 칭송한 것 또한 시대와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죠. 일본으로부터 자주독립을 외치던 시기였으니까요. 자주독립,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러나 묘청 시대의 민중들은 독립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지요. 일본과 같은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외부세력의 탄압은 없었으니까요. 묘청 일파가 기존 정권이 민중에게 미치는 해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그것을 명분으로 삼았더라면 폭넓은 지지를 얻고, 나아가 성공하여 ‘혁명’이라고도 불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 08.10.07 23:07

    고려사를 공부할 때 한 번씩 꼭 짚고 넘어가는 부분입니다만,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만 기억한 후 지나갈 따름이었죠.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 08.10.07 23:23

    윤영태 학우의 발표 잘 들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묘청의 난이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발표를 들으면서 저는 다른 측면에서 실패의 원인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개경 중심의 정치에 대한 반발로 생각합니다.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이 굳이 서경으로 옮기자고 하는 것에는 또한 자신의 지역주의에 의한 의도가 없다고 할 순 없습니다. 이에 대해 개경의 정치세력은 당연히 반대를 합니다. 도읍지를 어디에 둘 것인가는 현재도 마찬가지로 쟁점이 많은 문제입니다. 노무현 정부의 행정도시 정책에 대해 말이 많았던 것처럼 바로 지역의 발전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 08.10.07 23:23

    특히 옛날에는 정치적 출세에 있어서 더 많은 영향을 받았지요. 그래서 서로 자기 지역에 두려 한 것이고 이것은 오늘날의 핌피현상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지역주의는 전체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지역의 의견에만 사로잡힌 생각으로 반드시 해결 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묘청은 서경으로 천도해야 하는 이유를 풍수지리설에 두었는데요.

  • 08.10.07 23:23

    "개경은 땅 기운이 쇠했으나 서경은 왕성하므로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자!"라는 내용이었죠. 이것이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저는 이렇게 주장한 것이 과연 타당하고 옳은 행동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고려시대에 있어서 풍수지리사상은 많은 백성이 따르던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묘청도 이것으로 자신의 주장을 굳히려고 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민족의 사상을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쓰는 것은 민중 다수를 우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풍수지리설을 인용해 자신의 뜻을 두둔하려 했던 것에 대해서 윤리적 의식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08.10.07 23:35

    영태학우는 묘청의 난의 실패원인을 분석함으로 '조화'의 삶의 원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그가 도출해낸 ‘조화’의 원리는 현재 우리의 삶은 물론 미래의 삶까지 적용 될 수 있는 교훈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시각으로 묘청의 난을 바라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묘청의 난'에서 도출할수 있는 삶의 원리는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묘청은 진보파로 정세가 혼란한 틈을 타 권력을 장악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 08.10.07 23:33

    불교가 주된 사상 이였던 고려사회에서는 묘청이 주장한 '풍수지리설'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지 못함은 물론 자신을 지지해줄 민중들과의 합의가 이루어 지지 못한 점이 실패의 가장 큰 원인 이였죠. 잠시 시대를 거슬러 올라 조선시대 세종대왕을 보면 ‘소통의 정신’을 본받을 수 있습니다. 그는 늘 관리와 백성들과 소통하는데 힘썼으며 합의를 이끌어 내기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소통의 중요성'을 알았던 자와 몰랐던 자는 결과적으로 각각 성공과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묘청이 ‘소통의 중요성을 알고 다수의 합의를 얻기 위한 소통의 리더십을 발휘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 08.10.07 23:33

    묘청의 서경천도가 성공했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우리의 역사를 배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이런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의 실패를 디딤돌 삼아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태도, 영태학우의 발표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 작성자 08.10.07 23:50

    소통이라는 말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다른표현을 써주셨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혜숙학우의 의견처럼 다른 시각으로 묘청의 난을 바라보는 것 본받아야 겠습니다.

  • 08.10.07 23:34

    영태학우의 발표 잘 들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무엇보다도 묘청의 난의 의의를 처음부터 제시한 점과 실패의 원인을 세세하게 설명했던 것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 적용하는 내용에서 조화의 정신을 내세웠는데 그 것은 조금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발표를 들으면서 묘청의 난의 실패원인에서 설명해준 것 중에 민심을 얻지 못했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그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소수의 리더가 일을 할 때 다수의 의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이것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전과는 다르게 점점 국민들의 의견을 소중하게 여기고 눈에 띄게 변화된 것이 있다면 국

  • 08.10.07 23:35

    국민들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를 들 수 있습니다. 즉 나라의 큰일을 정할 때 국민의 의견이 그만큼 중요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의 공동체를 정해진 곳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들의 지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한 나라의 수도를 바꾸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습니다. 역사상에 많은 국가들은 수도를 중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중요함은 묘청의 난에서 잘 드러난다고 생각됩니다. 수도는 그 나라를 대표하고 그 나라의 중심이기에 그 중요성은 더 커졌을 것입니다. 또한 기존의 수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세력들은 수도의 변화는 곧 자신의 기반이 사라지는

  • 08.10.07 23:35

    것과 같았기 때문에 천도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수도에 국민의 반절이 살고 있는 등 수도가 너무 비대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수도를 바꾸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서울에 기반을 둔 세력들의 반대에 부딪쳐 그 정책은 좌절됩니다. 이러한 사실도 묘청이 개경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김부식의 반대에 부딪쳤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묘청의 난이 실패한 이유는 한 국가에 있어서 수도가 가지는 의미가 크다는 것과 수도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세력들의 반대에 부딪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08.10.07 23:40

    인간이 존재하고 역사를 만들어 내는 과정은 과거, 현재, 미래의 상호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의 근본적인 중심에는 ‘나’가 있습니다. 즉, 나의 존재가 성립해야 인식, 행동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초적이면서도 근원적인 중요한 점을 교수님께서 다시 상기시켜주셨네요.^^ 초점이 ‘나’에 맞춰지면 흐르는 시간 속에 떠맡겨진 나 자신이 아니라 사건의 주체로서의 ‘나’가 존재하게 됩니다. 묘청의 난 속에서 우리는 역사의 주체로 존재했던, 역사의 수동적 존재가 아닌 능동적 존재로서 행동했던 묘청의 이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 08.10.07 23:41

    묘청의 난은 그 당시 상황에서는 반란으로 여겨졌지만, 결과로써 모든 사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섣부른 행동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사건 속에서도 가치 있는 원리를 이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묘청의 ‘옳지 않은 것은 바꾸겠다.’는 이념, 의지와 실천은 현시대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저 현재에 충족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마음을 가다듬고 역사를 다시 바라보면, 현재를 다시 비판적으로 바라보면, 우리의 미래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의미 있는 과거, 현재가 의미 있는 미래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발표, 수고하셨어요.^^

  • 작성자 08.10.07 23:59

    묘청의 난과 현실을 연관지어서 말해주시니 현재의 삶을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판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댓글이었습니다.^^

  • 08.10.08 00:37

    윤영태 학우의 발표 잘 들었습니다. 저는 한 누리 모둠의 발표를 듣고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묘청의 난’이 고려사회에서 어떤 의의가 있습니까? 고려사회에서 단지 ‘조화의 정신’을 찾기 위해서 묘청의 난을 선택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묘청의 난에 대한 주관적인 입장이 없었습니다. 묘청의 난의 의의를 말할 때 신채호와 삼국사기의 입장에 대한 설명만 있었지 발표자가 찾으려는 묘청의 난의 의의는 없었습니다. 발표자의 주관적인 논지의 방향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발표에서 ‘묘청의 난’의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 08.10.08 00:38

    신채호의 의의를 따라야 할지 삼국사기의 의의를 따라야 할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결론에서 말한 ‘조화의 정신’은 선뜻 동의하기 힘든 공동 삶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발표자가 역사적 사건의 의의를 어디에 두느냐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본문 내용에서 ‘묘청의 난’의 실패 이유와 원인을 근거로 더 많은 교훈과 원리들을 이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왜 ‘난’혹은 ‘정변’수준 따위로 취급당하는지 더 자세히 살펴봐야한다고 생각 합니다.

  • 08.12.21 12:13

    * 김정섭 : 1) 난’혹은 ‘정변’수준 따위로 -> 난’ 혹은 ‘정변’ 수준 따위로 2) 살펴봐야한다고 생각 합니다. ->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08.10.08 00:37

    교수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역사를 바라보는 주체 즉 ‘나’의 시선은 가장 중요합니다. 자신이 ‘묘청의 난’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논지의 흐름과 지향점은 명확하게 잡히는 법입니다. 윤영태 학우가 ‘묘청의 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하고 고려사 전체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의와 부합시킨 결론이었다면 더욱 훌륭한 발표가 되지 않았을까요? 첫 발표라서 어려운 점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상당히 어려워했고 사실 지금도 어렵습니다.^^ 다음에는 더욱 명확한 주관이 뒷받침 된 발표를 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 08.10.08 09:50

    발표내용 외적인 측면으로 영태 학우의 발표에 느낀 점은 교수님도 지적했듯이 기대서 하는 점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처음 발표를 차분하게 잘 발표해 주셨습니다. 제가 처음 할 때와 많이 다르더군요. 내적으로는 묘청의 난에서 공동 삶의 원리로 조화를 말씀해 주셨는데요, 그 말은 조화가 부족했다라고 볼 수 있겠네요. 하지만 동학농민 운동 등 백성이 반란에 참여하게 되는 경우는 우리나라 역사상 극히 드뭅니다. 특히 정치적 반란에 있어서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본다면 갑신정변을 말할 수 있겠죠. 농사를 주로 하는 백성이 살로 느끼지 않고서 어떠한 반란에 참여하기란 힘듭니다.

  • 08.10.08 09:51

    곧 정치적 반란은 성공 아니면 실패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그것을 조화를 이뤄서 성공하고 그렇지 못해서 실패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얼마나 많은 사전 계획의 준비와 철저한 모험심이 역사 속에서 실패하게 되어 반란이란 이름으로 남느냐, 아니면 새로운 시대를 여느냐 하는 것 같습니다.

  • 08.10.08 09:51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을 좀 더하자면, 영태학우는 묘청이 꾀하던 북진정책에 대해서 터무니없는 것으로 생각 하실지 모르겠지만, 중학교 선생님께서 거기에 관한 책을 읽고 수업시간에 애기해 주셨습니다. 비록 고려가 세력이 약해지고는 있었지만 사료에 따른 보병과 기병의 수는 북진을 해볼 만한 충분한 수가 준비되어 있었고 묘청의 북진정책은 승산이 있는 생각이었지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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