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고싶은 것
유진
이제는 꾀 주름잡힌 얼굴에도 어색하지 않는 옅은 화장을 하고, 균형 잃은 몸매에도 어울리는 점잖은 색깔의 한복을 편안하게 입고 정월 한 달쯤을 지내고 싶다.
우선 홀로 계신 엄마를 절에 모셔다드리면서 새해불공도 함께 올리고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가시고싶어 하는 곳에도 들리고, 하시고 싶은 어떤 이야기라도 다 귀담아들어 주고 싶다.
한동안 하지 못한 서랍들을 정리하고, 너들너들한 수첩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다시 옮겨 적고, 갖가지 인연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에게는 질 좋은 화선지에 수묵으로 정성껏 그려놓았던 연하장을 보내고, 오랜 세월 찾아뵙지 못한 은사님께는 직접 문안을 드리고 싶다. 내가 늘 고맙게 여기는 알뜰살뜰한 세 올케들에게 조그만 선물 하나씩 보내고, 조카들도 마음으로 챙기며, 멀리서 외롭게 지내고있는 친구들에게는 좋은 책과 함께 따뜻한 편지를 써보내고 싶다.
초여름 알콩달콩한 삶이 묻어 나오는 마당이 남아있는 주택가를 운동 삼아 걸을 때, 낮은 대문 안으로 잘 가꾼 화단을 훔쳐보고 싶고, 야채를 살 때는 되도록 재래시장의 난전에 가서 값을 깍지 않으며 덤으로 얹어주지 않아도 아쉬워하지 않고, 건널목을 건너며 어쩌다 맞부딪치게 되는 낯선 누구에게라도 선한 눈빛으로 웃어주고 싶다.
단골서점에 들렀을 때, 한쪽에 서서 책을 읽고있는 소년(우리 집에 신문배달을 하던 학생)을 만나면 내게 있는 문화상품권 두 장을 쥐어주고, 길모퉁이에서 막 굽고있는 붕어빵 천원어치를 기다리면서 붕어빵아줌마의 아들자랑을 흐뭇한 마음으로 들어주고 싶다.
한창 바쁜 중에 잘못 걸려온 전화도 친절히 받아주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아들의 선의의 거짓말은 모르는 척 눈감아 주고, 가끔 가족들이 내 생일날을 모르고 지나쳐도 쓸쓸해하지 않고 싶다.
작은 실수로 인해 서먹해있는 후배에게도 내가 먼저 연락해 다시 친숙해지고, 누구라도 내게 무엇인가를 의논해오면 기꺼이 시간을 내 주고, 내 의견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나를 필요로 해 준 그에게 고마워하고 싶다.
오래 전 몇년동안 청송감호소로 매달 한번씩 연주해주러 가던 일을 건강이 허락하는 동안 다시 하고싶다.
화랑이 분주해지는 가을에는 인사동에 나가 이름 모르는 작가들의 전시장에도 들러 눈에 드는 화집 몇 권 사들고는, 아직도 한옥이 남아있는 뒷골목 작은 찻집에서 우전차를 우려 마시며, 장사익의 찔레꽃도 들려달라 청하고 싶다.
아주 가끔씩은 뜻 맞는 한두 사람과 경인미술관 뜰에 앉아 가물가물한 첫사랑도 더듬어 보며, 부끄러웠던 지난날의 실수도 털어놓으며, 서로 좋았던 시절의 자랑도하며, 적당히 남의 흉도 보아가면서 가벼운 수다를 떨고싶다.
훗날 노후생활을 위해 마련해둔 농장 옆에 소박한 집을 짓고 살게되면, 한켠에 바깥풍경이 훤히 보이는 서너 평의 차실을 손수 꾸미고, 매화나 산철쭉이 필 때도, 소사의 단풍 색이 한창 고울 때도, 좋아하는 사람들을 청해서 함께 보며 즐기고, 미리 쪄서 말려 두었던 쑥 차나 감잎 차 한 봉지씩을 들려서 보내고 싶다.
텃밭의 추수가 끝나고 늦가을 들꽃마저 지고 나면, 작은 양모 담요 한 장 무릎에 덮고 창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찾아 자리를 옮겨가며, 미루어 두었던 책을 읽다가 가끔씩 서쪽 산 능선을 넘어가는 고운 노을을 눈부시게 바라보고 싶다.
내가 가진 것들 중 꼭 필요한 몇 가지만을 남겨서 알맞게 사랑하며, 되고싶은 것은 없지만 하고싶은 것들로 아깝지 않은 세월을 지내고 싶다.
2003/1.
첫댓글 참 댜행이다 싶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하니까요 ㅎㅎ
정민시인은 그러고도 남을 분이시지요.
..2023년이면 .21년전에 쓴 글이니 저도 충분히 하고 있는 일이고요,.
다들 그렇게 살면 사회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아질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