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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8월4일 연중 제18주일
[청주] 부자되십시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코헬 1, 2 ; 2. 21 - 23
† 제2독서 : 콜로 3, 1 - 5. 9 - 11
† 복음 : 루카 12, 13 - 21
오늘 전례
▦ 오늘은 연중 제18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탐욕이 안겨다 주는 허망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지 않은 모든 열정은 탐욕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주간 동안
우리가 애써 왔던 모든 일이 과연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인지, 단순히
인간적인 욕심 때문인지 곰곰이 헤아려 보아야 하겠습니다.
★ 코헬렛의 저자인 솔로몬 임금은 온갖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그 모든
것이 허무라고 고백한다. 하느님의 뜻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그 무엇도 의미가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현세적인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천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라고 권고한다. 우리의 생명이 지상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제2독서).
★ 어느 한 사람이 유산 분배에 관한 문제로 예수님을 찾아왔다.
예수님께서는 그 문제의 현상적인 측면에 응답하시기보다 ‘탐욕을
경계하라.’는 말씀으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부유함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곧,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으로
전락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제일 친한 친구는 그가 매일 만날 정도로 절친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친한
친구는 그가 아주 소중히 여기기는 했으나 첫 번째 친구 때문에 자주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세 번째 친구에 대해서도 참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앞의 두 친구와 만나는 바람에 거의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가장 친한 첫 번째 친구는 죽게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마자 그의
곁을 떠나 버렸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면서도 그의
무덤까지만 같이 가 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친구는 그가
죽는 순간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인도되는 순간에도 함께하였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친구는 돈이고, 두 번째는 가족이며, 세 번째는 선행입니다.
우리가 가장 가깝게 생각하는 친구가 실제로는 결정적으로 함께해 주기를
바랄 때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야 삶이 제대로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보장되지 않는 것이 많을뿐더러 돈 때문에 더 큰 가치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아니, 참된 삶은 돈이 아니라 또 다른 가치로 보장됩니다. 우리는
과연 그러한 가치를 누리고 있습니까? 그 가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 매일 미사 -
◈ [청주] 부자 되십시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8월4일 연중 제18주일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 루카 12,13-21
부자 되십시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들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또 가지고 있는 것을
아낌없이 베풀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유욕은
인간이 물질을 통해 자기 존재를 공간적으로 확대하려는 본능적
욕구입니다. 그 욕심은 만족시켜 주면 시켜줄수록 더해집니다. 더 많이
지배하고 싶은 마음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소유하고 지배하는 마음은
결코 만족을 모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기보다
오히려 소유 당하고 지배당하게 됩니다. 물질이 사람의 주인이 되어
참으로 사람을 빈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베푸는 마음은 베풀면 베풀수록 마음을 부유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도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남에게 베푸는 것에서 만족한 삶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가진 것이 많고 또 그것에 애착을 두는 사람은 부자입니다. 또 가진
것이 적더라도 그것에 애착하고 손에 넣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도 역시 부자입니다. 그러나 그런 부자는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알베리오네 신부) 그들은 세상의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자들은 낙타를
아주아주 작게 만들어 주시든지 바늘귀를 아주아주 크게 만들어주시든지
둘 중에 하나를 꼭 들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창세기26장 12절-13절에 보면 “이사악은 땅에 씨를 뿌려, 그 해에
수확을 백배나 올렸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복을 내리시어 그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점점 더 부유해져 마침내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부자가 되는 것은 하느님 축복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소유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수단이 됩니다. “네 재물과 네 모든 소출의 맏물로
주님께 영광을 드려라. 그러면 네 곳간은 그득 차고 네 술통은 포도즙으로
넘치리라”(잠언3,9) 고 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의
축복으로 부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 영광을
드림으로써 곳간을 그득 채울 수 있는 큰 부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재물은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재산은 다툼을 일으킵니다. 창세기 13장 6-7절에는 재산이 너무 많아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잦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과 소와 천막이 넘쳐 났지만 재산이 너무
많아 함께 살 수가 없었습니다. 재산이 없어도 문제이지만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시편52,7-9에서는 재산이 많으면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를 천막에서 잡아채고 끌어내시어 생명의
땅에서 너를 없애 버리시리라. 의인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그를 비웃으리라.
보라, 하느님을 제 피신처로 삼지 않고 자기의 큰 재산만을 믿으며 악행으로
제가 강하다고 여기던 사람!”
바오로 사도도 말합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으로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6,9-10)
집회서에서는 “황금을 좋아하는 자는 의롭게 되지 못하고 돈을 밝히는
자는 돈 때문에 그릇된 길로 들어서리라. 많은 이들이 황금 때문에
파멸하였고 멸망이 그들 앞에 닥쳤다.”(집회31,5-6) 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 복권사상 최고액인 3억1천 490만 달러(약3천억원)가 걸린 복권에
당첨되었던 미국인 사업가 잭 휘태커(60)가 약 5년 만에 완전 빈 털털이로
전락했다고 언론이 보도하였습니다. ‘세계 최대의 행운의 사나이’로
불렸을 정도로 주변의 부러움을 샀던 그는 부도수표 발행으로 기소
되었고, 도박에 손을 대기시작 당첨금을 탕진하였으며 음주운전혐의,
술집지배인 폭행사건 등으로 수차례 체포되기도 하였으며 차량과
사업체가 강도질을 당하는 등 그야말로 인생이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사실 그칠줄을 알면 부끄러움이 없고, 분수에 맞으면 세상이 여유로운
법입니다. 그러나 한 순간에 굴러 들어온 일확천금이 그에게는 복이
아니라 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재물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돈이
있다고 우쭐대다가는 나둥그러지게 됩니다. 더더욱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루카12,15).
그러므로 세상의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8-9). 그러므로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하는 하늘에 보물을 쌓게 하시고(마태6,19-20)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어리석음을
결코 살지 않게 하소서.” 아멘.
여러분, 부자 되십시오! 그러나 세상의 부자이기에 앞서 하느님 앞에서
큰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재물은 하느님 축복의 결과입니다. 그
재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십시오!
여러분! 미국의 갑부였던 록펠러 아시지요? 어느날 타임지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현재 가지고 있는 부유함에 만족하십니까?”
그는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기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만큼의 돈을 벌어야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그때 록펠러는 “조금만
더!”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많이도 아닌
‘조금만 더!’ 돈을 벌어야겠다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조금만 더!” 이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한 신자로부터 매일 10불씩, 한국 돈으로 1만원씩
기부를 받았습니다. 천일을 약속하시고 좋은 일에 쓰기를 희망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1만불을 약속하시고 채 끝나기 전에 천국으로 가셨지만
장례식날에 나머지를 다 받았습니다. 가족들이 대신 약속을 지켰습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하루의 감사한 마음을 재물에 담아 봉헌하셨습니다.
액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주어진 여건 안에서 매일 사랑을 담아
봉헌하신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렇게 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을 귀하게 보신 주님이십니다. 분명 하느님께서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시고 반드시 넘치는 은총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귀한 마음을 지켜 주시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아마 그분은 형편이 나아지면 더 크게 하길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하느님 앞에 부자가 되는 구체적 행동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조금만 더!’ 벌어놓고 무엇을 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지금 하시기 바랍니다. 유엔난민기구의 2010년 통계자료는 9억
2,5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영양결핍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매년 1천만 명이 기아 또는 기아와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어 가진
것을 나누기만 하면 기아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 할 수 있다는 것이
통계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쓰지 않아서 문제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굶주림보다 더 큰 목마름은
사랑입니다. 지금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하며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본당에서는 매월 첫 주일을 ‘자선주일’로 정해 우리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애덕을 실천할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 ***
한 어린 아이의 목에 동전이 걸렸습니다. 아이의 아빠가 깜짝 놀라
병원으로 데려 가려 하니까 그 부인이 말하였습니다. “여보, 신부님을
부르면 돼!”“우리 신부님은 어디에서든 돈을 잘 빼내잖아요!”
저도 그런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남의 돈을 빼내려 하지 말고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금 3가지는? ‘황금, 소금, 지금’이랍니다.
시대의 흐름 속에 ‘현금, 지금, 입금’으로 변했답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십자가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과 나이가 젊은 사람의 차이는 시간을 느끼는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들을 보세요. 1년 차이만 나도 엄청난 사이가
나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이 많은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1~2년 차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잘 생각해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똑같은 일 년인데, 네 살짜리 아이에게는
자기 인생의 4분의 1이지만 여든 살 어른에게는 자기 인생의 80분의
1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시간을 느끼는 마음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문제는 누구나 이렇게 나이를 먹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어리다고 영원히 어릴 수가 없으며, 또한 나이를 거꾸로 먹어 젊어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진리를 감추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언젠가 외출을 하지 않는다는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건강이 나쁜 것도 아닌데, 할머니께서는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늙은이가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흉볼까봐
그렇다고 말합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당연한 진리인데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감추고 싶은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보실 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만을 생각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욕심입니다. 이
시선 때문에 더 많은 돈과 명예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 시선 때문에
더욱 더 내 자신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탐욕이라는 세상의 기준들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지요. 자신을
위해서 재화를 모으려하지 말고, 하느님 앞에서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나이를 들어가는 것처럼, 언젠가 하느님 곁으로 가는 것도
당연한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누릴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제대로 된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기준이
하느님의 기준보다 늘 앞에 놓이는 것은 왜 일까요?
몇 해 전에 아주 힘든 일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도저히 저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지요. 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성당에 가서 십자가
아래에서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얼마나 큰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때 이러한 묵상을 할 수 있었지요.
‘십자가 아래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커다란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데, 십자가의 삶을 산다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십자가 아래를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시선과 그 기준만을 따르려고 하다 보니 십자가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또한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만이 진정한 행복을 얻는,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비록 잃은 것도 많지만 아직 남은 것도 많다(알프레드 로드 테니슨).
가족이 함께 하는 소중한 주일이 되시길 바랍니다.
인디언 계산법
어느 책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하게 되네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이 아닌, 정말로
사람을 위하고 사랑하는 기준이 필요한 세상이 아닐까요?
백인들이 인디언 땅을 차지하고 미국식 교육을 주입할 때였다. 오지브와족
출신 아이가 백인들이 가르치는 학교에 들어갔다.
그들의 교육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아이는 수업 시간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 벌로 씌우는 고깔모자를 쓰고 교실
구석에 앉아 있곤 했다.
어느 날, 덧셈 뺄셈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날도 아이는 고깔모자를 쓴
채 창문 너머로 도토리를 물고 장난치는 다람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질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과를 네 개 가졌는데, 친구에게 한 개를 주면 몇 개 남지?”
늘 묵묵부답이던 아이는 처음으로 손을 들고 말했다.
“선생님,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를 줘야 해요. 친구와 뭔가를 나눌 때는
똑같이 반씩 갖는 거예요.”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8월4일 연중 제18주일 복음묵상)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다가올 마지막 시간에 자신을 던질 수 있을 때 지금의 나를 가장
잘 볼 수 있습니다.'
2013년 다해 8월4일 연중 제18주일 복음묵상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루카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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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이다. 이 비유를 만나 완전히 방향을 바꾼
삶을 살아 성인이 되신 분들도 있다.
사실 이 짧은 비유는 너무도 기본적이고 확실한 지혜를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 있다. 문제는 삼척동자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일진데, 이 비유가 전하는 지혜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적다는 것이다. 알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우리의 욕망이 크다는 뜻일 게다.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루카12,19)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라는 대목이다.
인간의 전형적인 이기심이 잘 드러나는 구절이다.
욕망의 한 가운데에는 반드시 내가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의 모든 크고 작은 선택과 결정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한 가운데에는 ‘나’라고 하는 ‘내 자신’이 있다.
자신 안에 있는 욕망의 끝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만 한다.
그 욕망의 실체가 무엇이고 결국 그 욕망이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항상 생각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욕망은 대체로 감미롭고
자극적이며 재미있고 풍요로운 것을 대상으로 한다.
손에 넣고자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기 마련이다.
창세기 설화에서, 최초의 인간 아담이 하느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말에 선과 악을 구별하는 과일을 따먹은 것은 우리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욕망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어리석어질 수 있다. 이를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덧없음과 참된 행복의 의미를 식별하게 된다.
무엇인가를 원한다는 것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고, 자신을 위해 진정으로 옳은 것을
원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끝이 어둠이나 악이라 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이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간단명료하게 지혜와 어리석음,
허상과 실상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우리의 응답도 간단명료해야
한다. “당신의 말씀이 옳기에 저는 그렇게 살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라고 말이다.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삶은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떠나는 것(空手來空手去)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의해 세상에 나왔고, 삶이라는 주어진 시간
안에서 만든 모든 흔적을 가지고 그분 앞에 설 것이기 때문이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수도회] 돈이면 다?
2013년 다해 8월4일 연중 제18주일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루카 12,13-21
돈이면 다?
지상의 재물과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은 무척이나 날카롭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이 세상에서의 부(재물)와 하느님 나라에서의 부(영원한 생명)을
비교 대조시키면서 영원한 생명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한국 사회 전반을 휩쓸고 있는 부익부빈익빈 현상 앞에서 ‘엄청난
부자’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자연스럽게 눈이 쏠립니다. 그들의 능력
정말 대단합니다. 얼마나 죽기살기로 노력했으면 상상을 초월하는
그런 부를 축척했을까요? 또 얼마나 아끼고 신경을 썼으면 그렇게
대단한 자금을 모으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세세대대로 호의호식해도 남을 부를 일부분이나마 사회로
환원한다거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자선활동에 내어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그런 나눔도 몸에 익숙하지 않으면 시작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다보니 오로지 긁어모으는 데만 혈안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얼마간의 세월이 흐르고 그 아까운 것들 고스란히 남겨두고
떠나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 세상을 하직한 후 사람들은
그를 기억할 때, 평생 벌 줄만 알았지 쓸 줄 몰랐던 자린고비로
기억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느님 앞으로 나아갔을 때 그때 중요한 것은 ‘지상의
재물’이 아니라 ‘천상의 재물’입니다. 하느님께서 눈여겨보실 것은
지상에 남겨두고 온 재물이 아니라 이 세상 살 때 또 다른 하느님이었던
가난한 이웃들과 나눈 ‘천상의 재물’인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지상의
재물도 고스란히 누군가의 손으로 흘러가고, 천상에서는 빈털터리로
하느님 앞에 서게 되니 인생 참 서글프게 된 것입니다.
오늘 내게 넘치는 부분이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그 넘치는 부분을
가난한 이웃과 기쁘게 나누는 그 행위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요 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탐욕스런 사람이 되지 말라고 강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탐욕스런 사람은 무엇이든 자신만을 위해 쌓아두려는 사람입니다. 뭔가
쌓아두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쌓아놓은 것들에 마음이 쏠립니다. 그래서
탐욕스런 사람은 더 큰 것, 더 본질적인 것, 더 중요한 것, 결국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많은 부자들의 결정적으로 저지르는 실수가 있습니다. ‘돈이면 다’라는
허황된 사고방식입니다. 돈이란 것, 돌고 도는 것, 있다가도 없는 것,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 돈입니다. 참으로 유한한 것이고 영원히 소유하지
못할 대상이 돈입니다.
그런데 많은 부자들은 믿지 못할 돈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을 잊어버립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립니다.
결국 그는 그 잘난 돈으로 인해 인생 망쳐버립니다.
재물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수도자이기에 오늘 복음 말씀은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재물 대신 대치될 대상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의외로 많았습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 일중심주의, 자기중심주의, 교만, 아집,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참으로 많았습니다. 이런 또 다른 대상들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고집할 때 우리 역시 영원한 생명에서 점점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
2013년 다해 8월4일 연중 제18주일
<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
복음 : 루카 12,13-21
<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 >
2005년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이란 영화는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컴퓨터 그래픽의 힘으로 볼만하게 만들어 냈습니다.
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열정이 넘치던 영화감독
‘칼 덴햄(잭 블랙)’은 거리에서 우연히 발굴한 매력적인 여인 ‘앤 대로우
(나오미 왓츠)’와 시나리오 작가 ‘잭 드리스콜(애드리안 브로디)’과
함께 영화 촬영을 위해 지도상에도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공간인 해골
섬을 찾아 떠납니다.
해골섬의 원주민들은 어떤 거대한 존재에게 바치려고 그들 중 아름다운
앤을 잡아갑니다. 킹콩은 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앤은 도망치려 하고 그 때 거대한 공룡이 그녀를 잡으려
할 때 킹콩이 나타나 그녀를 보호하고 구해줍니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욕망에 사로잡힌 감독 ‘덴햄’은 ‘킹콩’이 ‘앤’에게
마음을 빼앗긴 틈을 타 ‘킹콩’을 뉴욕으로 생포해옵니다. 가짜 앤을
만들어 놓고 쇼를 버리는 동안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킹콩’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야수의 본능을 드러내며 뉴욕 도심을 휩쓸기
시작합니다.
이를 잠재울 수 있는 것은 킹콩이 사랑하는 진짜 앤, 앤은 그 앞에
나타나고 군대들은 킹콩에게 빗발치는 공격을 퍼붓습니다. 킹콩은
공격을 피해 ‘앤’을 데리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으로 올라가고 결국
앤을 보호하다가 비행기들의 총탄을 맞고 서로의 사랑하는 눈빛을
교환하며 떨어져 죽게 됩니다.
앤은 처음에 킹콩에게 바쳐지는 제물이었습니다. 킹콩은 마지막에
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관계엔
제물이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가장 기다려지던 날은 아무래도 제삿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골이라 가게도 없었고 먹는 것도 변변치 않았지만 제삿날만큼은
먹을 것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습니다. 매일 돈 없다고 하시던 어머니는
돈이 어디서 나셔서 그 많은 고기와 과일과 과자를 차려놓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킹콩에게 바쳐진 앤도 이런 제물이었던 것입니다. 킹콩은 그 제물을
받으며 그 제물보다도 자신에게 그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의 정성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호해 줍니다. 이는 성경에서도 아들 이사악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혹은 사람을 재물로 바쳤던 수많은
문화권 안에서, 또 우리나라 이무기 시리즈와 같은 것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우리나라 어떤 동화에서도 엄마는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떡을 호랑이에게 줍니다. 호랑이는 떡을 먹으면 엄마를
놓아주지만 결국 엄마가 바칠 것이 없을 때는 엄마를 해치게 됩니다.
저는 신학을 하며 바로 ‘성령’님이 아버지와 아드님이 서로를 위해
주시는 ‘제물’이란 사실이었습니다. 둘 사이의 관계 안에서는 둘
사이의 관계가 증명이 될 수 있는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해야 합니다.
서로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제물을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온전히
당신 자신을 성령을 통해 상대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오 헨리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자신의
가보인 시계를 팔아 아내를 위한 빗을 사오고, 아내는 자신의 머리를
잘라 남편을 위해 시곗줄을 사 옵니다. 이것이 서로를 위한 제물입니다.
제물은 관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데 이 제물이란 것은 결국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게 되었을 때, 특별히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상대를 위해
주게 되었을 때 그 제물이 ‘성령’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제물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당신 생명을
받습니다. 성체, 이것이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제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제물로 봉헌을 하고 빵과 포도주를 바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자신의 형더러 부모의 유산을
자기에게도 나누어 주기를 청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탐욕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분명 형이 잘못하는데도 예수님은 관심도
없습니다. 예수님께 부자 되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돈이 많이 생기는 것엔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다 사라져가는 지푸라기에 불과하고 또 재물이 많아질수록
그것에 더 집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며 자신을 위해 돈을
모으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재물을 모을 줄 알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제물을 바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제물이 없으면 어떤 관계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만 재물을 모으는 사람은 하느님께나 이웃에게나
관계를 맺는 것보다는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느님도 관계이고 십자가도 예수님께서 관계를 위해
당신을 봉헌한 것이며 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은 미사에 나와
하느님의 제물인 성체를 받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에게서 아무 것도
받는 것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당신의 사랑을 적게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한 임금이 귀한 진주 두 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크기가
감자크기만 하였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 가치를
아는 백성에게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하에게 그것을 주면서
세상에 돌아다니며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그것을 주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하인은 과일 가게에 갔습니다. 그 과일 가게 주인은 사과 두 개를
줄 테니 그것과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야채 가게에 갔습니다. 그 주인은 감자 두 개를 줄 테니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보석상에 갔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너무 놀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줄 테니 그것을 줄 수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그 신하는
그것을 보석상에게 거저 주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바쳐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만큼 바쳐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관계에서는 오고가는 제물이 있어야 하는 것이
삼위일체 관계의 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라는 관계를 위한
제물들입니다. 부정한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유일한 가치인 관계를 위한 도구가 되게 해야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이웃들 앞에서 항상 부유한 사람이어야겠습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연중 제18주일
2013년 다해 8월4일
어제는 예전에 용문 수련장 원장신부로 계시던 신부님께서 오셨습니다.
이곳을 떠나신지 벌써 8년이 넘었습니다. 신부님께서 계실 때 야영장의
시설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요즘은 텐트의 규격이 예전과 달라서 요즘의
텐트에 맞도록 야영장의 시설을 보수하러 오셨습니다. 신부님의 배려와
신부님의 따뜻한 마음이 제게는 고마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제게 부담이
될 것 같다고 하면서 먹는 것, 텐트를 다 준비해 오십니다. 생색내지
않으시고, 자신이 벌였던 일은 자신이 정리하겠다고 오시는 신부님을
보면서 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신부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건물을 짓고 하자 보수를 하려고 하면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예전에 있던 본당에서 누수가 있었고, 음향 시설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중앙 냉방 장치는 용량에 문제가 있어서 시원하지 않았고, 역시 누수가
있었습니다. 한두 번은 왔었지만 나중에는 하자 보수 기간이 지났기 때문에
오지 않았습니다. 한두 번 오는 것도 몇 번씩 전화를 드려야 했고,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음향 설비 회사는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부도가 났다고 합니다. 냉방 장치 역시 새롭게 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었고, 회사를 부르려니 하자 보수 기간이 지났다고 합니다.
떠난 지 8년이 지났고, 제가 부탁을 드리지도 않았고, 오지 않으셔도 누가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묵묵히 야영장을 보수하시는 신부님은
탐욕과 부실이 넘쳐나는 세상에, 부정의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 한줄기
빛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좋아하던 한시가 딱 어울리는 분이셨습니다.
‘춘잠도사사방진하고 납촉성회루시건(春蠶到死絲方盡 蠟燭成灰淚始乾)’
이라! ‘봄누에는 죽어서야 실뽑기를 그치고, 초는 재가 되어야 비로소
눈물이 마르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삶의 기준이 다를 것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
세상에서의 기준은 하느님나라에서는 필요 없다고 말을 합니다. ‘재능,
능력, 재물, 명예, 권세’와 같은 것들이 하느님나라에서는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헛되고 헛되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 것들은 썩은 동아줄과
같아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말을 합니다.
춘천교구 소속인 동창신부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포천 가기 전에
송우리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동창신부가 그쪽 지역 본당신부로 가게
되었습니다. 20년간 신자들은 정성껏 성전 신축기금을 모았습니다.
필요한 돈은 30억인데, 모은 돈은 10억이었다고 합니다. 부족한 돈을
구하기 위해서 방법을 찾던 중에 본당 신자들이 교우 중에 한분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분은 70대 노인이신데, 자녀가 없이 부부가 함께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 형제님은 그 동네에서는 재력이 상당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한번 만나시면 도움을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혹시 하는 마음으로 그 형제님을 찾아갔습니다. 집은 오래되어서
낡았고, 차도 없어서 자매님께서 병원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가야 할
정도였습니다. 신부님은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고, 혹 여유가 있으시면
성전 신축을 위해서 도움을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신부님이 예상한대로
형제님은 돈이 없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신부님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정도 후에 형제님께서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작은
봉투를 드리면서 얼마 안 된다고 하면서 성전신축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사제관에 와서 봉투를 열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크게 놀랐다고 합니다. 성전신축에 필요한
나머지 금액인 20억 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창신부님은 나중에
성전신축이 다 되면 그 형제님을 위해서 감사패를 드리겠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평생 검소하게 사신 형제님은 이제 자신이 가진 재물을
써야할 때를 찾았고, 아무 주저함 없이 기꺼이 성전신축을 위해서
봉헌하였습니다. 형제님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늘에 재화를 쌓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썩어 없어질 재물을 얻기 위해서 사랑도, 우정도 배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 친구에게 누명을 씌우기도
합니다. 자신은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친구의 작은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서 친구를 감옥으로 보내기도 합니다. 욕심 때문에 평생
헌신해 온 아내를 헌신짝처럼 내 팽개치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소설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나라를 향하는 기차를 타고 있습니다. 누가 와서
우리를 유혹하고, 내리라고 해도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세상생명보다 영원생명 위해
2013년 다해 8월4일 연중 제18주일
재산에 대한 탐욕은 거의 누구나 다 가졌다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재산에 관한 문제가 조절 불가능한 탐욕에 휘둘리면 사건이 생깁니다.
재산에 대한 탐욕문제는 그래서 경계할 사람의 길이라는 거지요.
재산으로 생명은 연장할런 지 몰라도 죽지 않게는 할 수 없습니다.
부유하다고 긴 생명을 끈다 해도 많은 사람 고생시키고 결국 죽지요.
세상생명보다 영원생명위해 재물에 매이지 말라는 주님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루카 12,15)”
- 이기정 사도 요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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