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마을 뒷산인 큰 바위에 올라서 나무 숲과 하늘을 나는 산새를 보았다.
내가 막고 싶다던 남포 용머리해수욕장 옆 대섬은 훗날 남포방포제로 갯벌 일부를 막았다.
훗날 광암갯벌도 막아서 부사간사지를 조성하여 드넓은 들판에서 벼농사를 짓는다.
갯벌을 지나치게 많이 막아서 농토로 만든 결과로 지금은 전국에 쌀이 남아도는 것일까?
농촌(어촌, 산촌)에서 오래 기억이 남는 것은 바로 초가집이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도 전형적인 초가이었다. 남향받이의 흙담(돌멩이, 흙, 짚을 적당히 섞어서 쌓아 올린)이 길게 늘어섰고, 서쪽과 북측 뒤켠에는 시누대(키가 2m)가 울타리를 이루고, 시누대 속에 선 쯍나무(참죽, 樹皮는 적색)들이 북녘 하늘을 가렸다.
초가지붕은 가을 추수가 끝낸 뒤에 일꾼(당시에는 머슴이 많았음)들이 볏짚나락으로 이엉을 며칠 동안 엮어서 그것으로 용마루를 덮었다.
지난 해의 낡고, 검으축축한 이엉을 걷어내거나 또는 그 위에 새로 이엉을 덮어 씌웠다. 세찬 바람에도 벗겨지지 않도록, 단단히 꼬아서 만든 새끼밧줄로, 지붕덮개를 ‘井’자 모양으로 촘촘히 가로질러서, 앞쪽 서까래와 뒤쪽 처마의 서까래 끝에 꽁꽁 졸라 묶어서 바람피해를 예방했다.
초가(草家)는 완만한 곡선 그리고 짚(풀)에서 포근한 느낌을 받았으나 정작 가까이 다가서면 낡은 이엉(짚)에서 악취가 많이 났다. 특히 날씨가 꾸물거리는 날에는 이엉 썩는 눅눅한 냄새, 흙벽과 방바닥에서 퀘퀘한 냄새가 새어 나와서 어린 아이였던 내 비위장을 거슬렸다.
짚돗자리를 깐 방바닥에서는 고약한 지푸라기와 흙 냄새가 났다. 가난한 촌사람은 콩기름 바른 종이장판을 깔지 못하고 짚(또는 왕골)돗자리를 펼쳐 깔았다. 돗자리의 골 틈새로 흙먼지가 한없이 끼었기 때문에 조금만 몸을 움직이어도 햇볕에만 보이는 흙먼지가 뽀얗게 일어났다.
당시에는 벽종이는 없었다. 오랜 세월 뒤에서야 길이 1m인 허름한 벽종이가 오일장, 시골장터에 나오기 시작했다.
왕대나무를 사람 어깨 높이만큼 길이로 잘라서 엮어 만든 사립문의 터진 밑구멍(개구멍) 사이로 두 살 더 먹은 누나와 쌍둥이 동생과 함께 기어서 드나드는 것이 마냥 흥미롭고 재미나기만 했다.
흙과 더불어 사는 생활에 젖어서 땅바닥을 기어다니거나 돌멩이와 토방 위에 앉아도 더러운 줄을 별로 몰랐다.
본채와 사랑채에 비하여 바깥마당가에 있는 헛간은 생김새조차 매우 초라했다.
벽은 돌흙벽이었다. 소나무가지와 대나무를 얼기설기 엮은 뒤 지푸라기(짚)를 작두로 짧게 썰어서 흙더미 속에 넣고 물을 질퍽하게 부은 뒤 발로 오랫동안 짓이겨서 반죽을 만들었다. 짚과 흙이 엉겨진 흙더미를 벽에 발랐기에 전체적인 모양이 매우 투박하였다.
헛간에는 농기구를 보관해 두거나 잿간으로 활용했다.
아궁이에 볏짚을 불 땔 때 재는 가마솥 밑바닥까지 그득하게 찼다. 불씨가 완전히 죽으면 재를 고무래(당그래)로 긁어 잡아당겨서 삼태미로 담아 헛간에 부었다. 재를 보관하는 잿간이다.
머슴의 소망도 헛간 곁에 붙어 있었다.
자반(尺半) 길이의 얇은 송판을 간즈런히 자른 뒤 원형의 아귀(테두리)를 칡넝쿨로 단단히 졸라매어 짜 맞춘 소마통에 머슴들은 오줌발을 갈겼다.
오줌을 잿더미 위에 부어두면 지린내가 심히 나면서 재가 발효되어 질 좋은 거름이 되었다.
이른 봄철, 머슴은 지겟바작과 구루마(달구지가 표준어)에 실어 낸 뒤, 투박한 손으로 거름 덩어리를 쥐어 논과 밭에 골고루 뿌렸다.
둥근 버섯 모양의 잿간 지붕 위에는 으레껏 예닐곱 통의 박이 또아리를 틀 듯 자리를 잡았다.
둥근 박이 무게로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몇 개의 나뭇가지로 받침대를 만들어 주었다.
가을철에 지붕으로 올라가 손가락으로 시푸둥둥한 박의 표면을 튕겨 보아서, 속이 알차다고 판단하면 넝쿨 꼭지를 잘라내어 박을 따 내렸다.
박을 가마솥에 넣은 뒤 불을 땠다. 뜨거운 물속에서 꺼낸 박을 두 발로 꽉 조여 고정시킨 뒤에 톱으로 켤 때마다 국민학교(현재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흥부전을 떠올렸다.
속을 긁어 낸 무색의 박속은 때로는 나물반찬으로 무쳤으나 그 맛이 덤덤해서 아이들의 입맛에는 동하지 않았다.
크고 작은 바가지 오십여 개가 안방 오시레(벽장) 천장벽이나 헛광 천장의 못꼬쟁이에 걸렸으며, 크기가 다른 바가지는 용도별로 요긴하게 쓸 곳이 많았다.
박을 이용한 탈(假面)과 공예품도 하나의 변형된 용도였다.
측간은 똥수간이다. 소망이다. 요즘은 변소, 화장실, WC로 부른다.
측간에 갈 때는 으레껏 볏짚을 한 웅쿰 움켜쥐고 갔다. 오른쪽 손가락을 갈퀴마냥 오무린 뒤 짚 속에 손가락을 넣고 볏짚을 몇 차례 훑어내면서 볏대만을 깨끗이 추렸다. 5센티 길이로 전후로 꺾어서 위아래로 차곡차곡 겹쳐서 밑씻개(짚쑤세미)를 만들었으며, 이것으로 밑(똥구멍)을 닦았다. 까칠거리는 짚이 밑을 까슬려도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모두들 그렇게 살았으며 문명의 이기가 무엇인지를 짐작도 못했다.
이 짚도 분뇨와 함께 부식되고 발효되었다.
마분지 갱지(종이)도 너무나 귀한 때였기에.
국민학교(요즈음 초등학교) 이학년 봄날(1957년)이었다.
학교에서 다녀와 보니 안사랑채의 지붕이 반쯤이 헐려지면서 초가지붕이 없어지고 있었다.
커다란 통나무는 대전에서 지에무시(미 GMC사 트럭)로 날라 왔다. 그 뒤 몇 달이 넘도록 개조 수리했다. 초가집은 '함석집'이 되었고, 마을에서는 처음으로 산뜻한 함석지붕을 가졌기에 '함석집'으로 불렀다.
마을은 대부분 초가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흙집도 조금씩 개량되기 시작했다.
흙벽돌은 사각의 거푸집(랭가)에 찰기 있는 황토를 다져 넣고 뽑아내어 햇볕에 말리면 단단한 벽돌이 되었으며, 이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려서 흙집을 쉽게 지었다.
흙벽집은 말 그대로 두툼하고 투박하기 그지없었으나 통풍과 보온이 잘 되었다. 무더운 여름에는 더위를 가시게 하고, 추운 겨울에는 냉기를 차단하여 방안의 온기를 잘 보존한다고 알려졌다.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초가도 갖지 못하고 흙집에서 살았다.
마을에는 두어 채의 흙집이 있었다.
신작로(지방도로 606) 사거리에 있는 굴고개 아래에 한 채가 있었다.
집주인은 6‧25사변 당시 인민군 포로였다가 남한을 선택하여 동네에 흘러 들어온 이북 사내가 손수 지은 집이었다. 투전꾼이며 싸움꾼이던 사내는 이북 압록강변에서 말 타고 학교를 다녔을 만큼 부잣집에서 살았으나 인민군으로 징용되어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포로가 됐다고 한다. 남한을 선택하였음에도 신세가 펴지 않아서 고단할 때에는 이북에서의 지난날을 회상했다. 한 많은 사내가 소유한 재산은 흙집에 불과했다.
또 한 채는 매봉재의 작은외삼촌댁이었다. 용머리 갯마을 태생으로 우리 마을로 이사왔으나 주벽(酒癖)으로 일찍 죽은 작은외삼촌. 과부가 된 외숙모(강원도 강릉 출신), 올망졸망한 외사촌 형제와 누이는 흙집에서 궁벽하게 살았다.
나는 외삼촌네에 들를 때마다 어떤 죄책감을 느끼곤 하였다. 더욱이 가난하여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조차도 다니지 못하였던 두어 살 아래의 외사촌 누이(부심이, 영미)한테는 더 미안했다.
다행히도 외사촌 누이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1962년) 여름 농촌봉사활동으로 동네에 들어온 대전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개설한 야학당에서 한글을 쉽게 깨우쳤다고 한다. 나는 동네 사랑방에 야학을 개설하였던 여고생 누나를 지금도 기억하며 고마워 한다.
그 누나들은 우리 집에서 머물렀으며, 가난한 농촌의 문맹을 조금이라도 깨우쳤던 정신을 나는 일찍 배웠다. 나 역시 몇 년 뒤에는 충북 옥천군 이원면 강변에 있는 초등학교로 하계 봉사활동을 나갔다. 이주일 동안 강촌 아이들과 어울려 생활하였다.
내가 청년이 되어 갈수록 농촌도 조금씩 변모했다.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함석이나 슬레이트로 교체해 나갔다. 지붕개량은 탈농촌화를 의미하였다. 지붕을 대대적으로 교체한 이면에는 전국으로 전개되었던 새마을운동의 덕분이었다. 우리 동네에서도 열화같이 번진 때는 내가 스물다섯 살 나던 해 1972년부터이다.
'새벽 종이 울렸네... ...' 라는 새마을 노래 가사와 같이 구습을 타파한다는 기치(旗幟) 아래 가난의 굴레로 치부되었던 이엉을 벗겨내고 대신 슬레이트나 함석으로 지붕을 교체하였다. 그러나 본채 모습은 초가 그대로였다. 돌담과 흙담이 자꾸 무너지고 대신 시멘트 블럭으로 지은 담장이 허술하게나마 자꾸 들어섰다.
마을 안길도 땅 주인의 허락을 받아서 새로 내거나 넓혔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도 만들었다.
특히 정자나무가 있는 서낭당(서낭댕이)은 미신 타파의 대상이 되어 마구 훼손되고, 당산 아래 쌓였던 많은 잔돌은 도로 포장의 자갈로 썼다고 한다.
질 나쁜 시멘트일 망정 염가로 구매하거나 무상으로 마을 단위별로 수백 포씩 지원되었다.
삼십여 년 전까지 존재하였던 - 가난의 대명사였던 - 흙집은 새마을 운동의 이름으로 자꾸만 부셔졌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자연친화적인 생활'을 모방한다면서 황토방이라는 이름으로 흙을 짓이겨 바른 개량 한옥을 짓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하니 옛일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라는 지혜를 배운다.
1957년 봄, 내가 열 살 때까지 살았던 초가는 아련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초가 뒤에는 시누대 울타리, 하늘을 찌르는 아름드리 쯍나무(참죽나무)가 여러 그루가 드문 드문 서서 뒷켠을 둥그렇게 둘러 감싸안았다. 초가에서 다시 살고 싶은 생각은 아직은 없다. 가난한 1950년대를 회상하는 게 차마 두렵다. 그런데도 이따금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일까? 결코 갈 수 없는 저너머의 세상이지만 더러는 돌아가고 싶다. 모든 것이 불편하고, 부족하고, 어려웠던 시절인데도 그 과거에는 철없는 아이가, 밑구녁이 터진 옷, 검정 광목으로 만든 바지를 입고 다니는 아이가 해맑게 웃고 있다. 때로는 때묻은 소매로 눈물을 쓰윽 닦으면서 울다가, 웃다가를 거듭한다.
그 초가에는 옛날이야기들이 잔뜩 숨어 있기에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보금자리이다.
2001.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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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에 쓴 글이니 벌써 16년도 넘었다.
그 당시에는 한자, 한자어를 많이 썼고, 글의 길이도 무척이나 길었다.
지금은 우리말로 고쳐 썼다. 그것도 짧막하게. 글맛은 다소 줄어들었다.
2017. 10. 16. 월요일.
마음은 밤송이 떨어지는 시골 텃밭에 가 있는데.
아쉽다. 세월은 가는데 이렇게 산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