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한 달은 플라톤의 “국가” 주변을 서성거렸습니다. 국가를 끝낸 후
오래 전에 읽어 이젠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란
책을 다시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포퍼의 저서는
고대와 근대 두 천재 “플라톤”과 “마르크스”를 매섭게 비판한 책입니다.
분량과 내용의 깐깐함이 한 달이 부족할 정도였는데 플라톤, 마르크스, 포퍼의
삼자대면(?)은 새삼 유익했습니다. 어느 정도 그림이 또렷해지고 풍경이 깊어
졌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이 날라리에게는 뇌의 용량을 초과하는 일이어서
쉬어가는 기분 그리스 귀족들이 포도주를 희석하듯 위로가 필요했는데
수소문 중에 고른 것이 강창래의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입니다.
오! 대박 기대 이상의 성찬 역시 책을 선택하는 조르바의 예리한 안목.^^
이쯤하고 본론으로 진입합시다.
이런 건방진 소리를 지껄일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독자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머뭇머뭇 평한다면 필자는 글이 뭔지 아는 사람입니다. 글을 많이
만져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진실로 아름다운 것에는
슬픔이 배여 있듯이. 드라마나 영화의 이별장면이 떠나가는 사람 바짓가랑이
(치마자락) 부여잡고 대성통곡 하는 것 보다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멀어져가는
님 쳐다보는 처연함에서 절절한 슬픔을 느낄 수 있듯이, 가수가 자신의 감정을
모두 토해내지 않고 꾹꾹 눌러서 마침내 신음처럼 터져 나오는 노래에서
감동이 배가 됩니다. 이런 걸 한마디로 “절제미”라고 하나요?
이런 종류의 글을 쓰는 필자는 상당한 부담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재료로
책을 구성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또 글이란 “꾸밈”을 숙명처럼 안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황현산씨는 이걸 “사치”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어찌되었던 죽어가는 아내의
밥상일기에 꾸밈, 사치가 끼어들 자리는 없습니다. 숙명을 거스르고 사치스럽진
않지만 남루해서도 안 되는 상황, 해서 필자는 모든 걸 내려놓고 그냥 흐르는
대로 자연스럽게 가자 60평생의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심정이 느껴져 읽는 도중 책을 덮고 몇 번인가 휴지가 필요했습니다.
무염, 저염의 환자식처럼 글이 “담백”하고 우아해 졌습니다. “절제”와 “담백”
이 이룩한 조화가 참 좋았다는 생각입니다. 저의 어설픈 전체 글의 인상기 보다
환자이며 아내였던 평생 글을 매만지며 살아온 달인 “알마”의 편집인 정혜신의
한마디가 울림이 진합니다. (p14)
“편집자의 눈으로 보아도 글이 좋아 절제되어 있고 우아하다. 슬픔이
그림자처럼 곳곳에 스며들어 숨어 있지만 독자들에게 들키고 싶어하고
그 슬픔이 기쁨을 준비하네. 슬픈 이야기이지만 독자들이 읽으면 행복할거야.”
책속으로 들어가 디테일한 부분도 살펴봅시다.
무심한 척 필자의 가치관이 드러나는 구절
“내가 보기에 가장 좋은 식사는 소식이다. 학자들도 소식이 가장 좋다고
말하면서도 그 이유는 잘 모른다. 다른 생명을 적게 약탈하기 때문이
아닐까. 언뜻 그런 생각이 스친다.” (p38)
거슬리지 않는 먹물티 라고 어느 지인의 멋있게 지적했던 부분
"예술이 인간의 모습 한 부분을 밝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성이 하인 노릇을
하는 직관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성의 얼굴인 과학적 예술이라니, 인상파는
사진의 과학에 맞서 시작된 협의가 있지만 그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했다.
과학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p104)
인생에 대한 성찰을 문학적으로 서술한 필자의 느낌
“사람은 모두가 한 개의 섬이고 그 사이를 오가는 배가 있다. 연락선이
수시로 떠나긴 하지만 부탁한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는 경우가 드물다.
세월이 지나고 보면 아예 선착장에 그대로 버려진 것도 눈에 띈다.
서로의 사랑이 비껴 지나간 수십 년의 세월, 섭섭하고 미워서 화를 내고
떠나려 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니. 그 연락선은 지금도 여전히, 아마도
영원히 믿을 만하지 못하다. 그렇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참 쓸쓸한 일이다.” (p227 ~230)
할 말은 가득해도 이정도 합시다. 풍성하고 빛나는 레시피도 많지만
글이 지나치게 길어질 것 같아 생략합니다. 가장 많이 사용하면서도 너무
쉽게 남용하는 바람에 너덜너덜해져 쓰레기통에서 굴러다니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이 단어를 조심스럽게 복원해낸 필자 덕분에
사람과의 관계, 특히 마누라와의 사이에 사랑, 신뢰, 연민 이런 추상명사들을
곱씹어 봅니다. 책의 미덕은 이렇게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슬픔이 기쁨으로 승화되기를 바라지만 글쎄 기쁨까지는 몰라도 슬픔에 슬픔이
덧칠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강창래씨가 베풀어준 위로와 호의(?)에 감사의 뜻으로 다른 책 두 권을
구입해서 - 책의정신, 재능과 창의성이라는 유령을 찾아서 - 읽었습니다.
“매울지도 몰라”하고는 판이하게 내공, 고집도 있고 단호한 자신만의 해석도
있어 역시 만족했습니다. 왜 이런 사람을 아직 몰랐지? “인생도처유상수”란
얘기 틀린 것 하나 없습니다. 개인적 의견이지만 남자도 음식(요리)을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게 좋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할 줄 몰라서 못하는 것 하고, 할 줄 아는데 시간이 없어 안하는 것은 경우가
다른 것 아닐까요. 남자가 집에서 요리를 할 줄 알면 마누라나 애들 생일 같은
기념일을 챙겨줄 수가 있어 폼이 납니다. 선물이나 외식도 좋지만 직접하는
정성은 뭔가 있어(?) 보이지 않겠습니까. 마누라가 여행이나 처갓집으로 출타해
부재시 아이들하고 소꿉놀이하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자식들과의 대화가
별것인가요? 마누라가 아플 때 - 책에서처럼 치명적인 것 말고 - 죽 정도는
대접하고 집안일 신경 끄고 편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도 때로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 책에서 발제라고 할 것은 별로 없습니다. 관점이 달라 토론 할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겨울날 화톳불에 둘러 앉아 밤이나 고구마
구워 먹으면서 도란도란 정담을 나눈다는 기분으로 편하게 얘기하면 좋을 듯
합니다. 그래도 섭섭하여 굳이 발제를 한다면 어떤 음식 레시피가 마음에
드시는지, 어떤 요리를 해보고 싶고, 먹어보고 싶은지. 어느 단락이 좋았는지
혹은 마음을 적신 구절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가볍게 풀어보면 어떨까 합니다.
매력 없는 글도 주절주절 길어졌고 이쯤해서 마감하는 것이 순리인데 하면서
망설이다가 잡소리를 추가합니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이든, 노동의 분배이든
책을 읽고 혹 요리를 작정하는 남자 분들에게 당부할 것이 있습니다.
빨래를 할 때도 손빨래, 중성세제용, 세탁기용, 찌든 때 미리 손봐주기 등으로
분류해서 세탁을 하고 널고, 걷고, 개키기 까지가 완성 빨래 끝!!! 이듯이
요리도 뒷 설거지까지 마무리해야 완결입니다. 행주 빨아서 싱크대 물기를
제거하고 다시 깨끗이 빨아 탈탈 틀어 행주 널어놓아야 요리 끝!!!
마음에 드는 책이라 다른 감상문 보다 공들여 화장을 했는데 오히려
어색해 지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도리 없는 일 이 또한 나의 실력(모습)
이니.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