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배봉한(요한 세례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편집2부
“시인은 어떤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울기 시작해서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 사회에서 천주교가 그 일을 하고 있어 고맙습니다.”(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혜신)
1979년 10월 26일 밤, 궁정동 안가에서 총성이 울렸다. 다음날은 토요일이었다. 라틴어 미사를 드리는 날이라 성가도 라틴어였다. “Laudate Dominum”(주 찬미하라), 묘한 기분으로 파견 성가를 불렀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 실시, 전국 대학 휴교.’ 전국 각 교구에서 모여와 기숙사 생활을 하던 우리는 아침 미사를 마치고 귀가했다. 대건신학대학(현 광주가톨릭대학교) 1학년 2학기 때였다. 12ㆍ12 군사쿠데타에 이어 1980년 5ㆍ18 광주민중항쟁 때 강제로 귀가 조치, 100일 넘게 휴교했다. 1985년 여름 대학원 1학기를 마치고 귀가했다. 그러고는 신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매일 미사로 하루를 시작하던 20대 젊은 시절은 그렇게 끝났다.
2010년 1월 6일 밤,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284일째 마지막 추모 미사가 있었다. 서울 도심에 우뚝 선 시티파크 대형 빌딩 세 동을 배경으로 골목길에 차려진 소박한 제단, 발을 동동 구를 만큼 매서운 추위에도, 골목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소리 높여 노래하고 기도했다. 따뜻한 성당 안에서 들었던 복음을 바람 찬 골목길에서 들으니 더 새롭게 다가왔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다 죽은 이들이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라는 주례 신부의 시적 강론은 ‘지극한 아픔은 시처럼 표현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정호승 시인의 ‘부치지 않은 편지’ 노랫말도 가슴 아리게 다가왔다.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다섯 명의 희생자들과 함께 떠난 경찰특공대원의 이름까지 잊지 않고 불러준 노 신부님은 마이크를 잡고 큰소리로 외쳤다. “평화를 빕니다! 평화아~를 빕니다! 평화아~를 빕니다아~!” ‘평화’라는 낱말이 새삼 절절하게 다가온 밤이었다. 찬바람 부는 골목길에서 나눈 평화의 인사, “저 상주에서 왔어요” 하며 허물없이 건네던 어느 자매의 웃음 띤 인사에서는 신앙 이전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동지애가 울컥 느껴졌다.
2010년 2월에는 4대강 사업 반대 미사가, 5월에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위한 미사가 시작되었다. 그러고는 2014년 봄날의 4ㆍ16 세월호 참사. 그해 여름 방한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명언을 남기고 떠나셨다. “뛰어들고, 함께 가라”는 교황님 표현대로 거리로 나가 함께 울고 웃으며 미사에 참여하던 날들을 돌아본다.
1811년 땅에 엎디어 가슴을 치면서 교황께 간절한 편지를 보냈던 조선 교회 초기 신앙 선조들은 미사 한 번 드리는 게 소원이었을 텐데…. 어느덧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며 두 손을 모은다.
※‘나의 미사 이야기’에 실릴 원고를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8매 분량 글을 연락처, 얼굴 사진과 함께 pbc21@cpbc.co.kr로 보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