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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9. 묵상글 들 (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일생과 영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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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9.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일생과 영생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오늘 복자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 축일에 우리는 또 알아듣기 힘든 말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거라는 말씀과 마주합니다.
그런데 미워해야 할 '자기 목숨'은 무엇이고
간직해야 할 '목숨'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의 저는 미워해야 할 또는 잃어야 할 '자기 목숨'을
자기만의 목숨 또는 자기 것으로 소유한 목숨으로 이해했고,
'목숨'은 하느님이 주신 목숨 또는 하느님의 목숨으로 이해했습니다.
우리 신앙 안에서 자기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다 하느님 것이며
목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목숨이고 재물이고 하느님께서 주셔야지만
우리는 그것을 지닐 수 있고 걷워가시면 지닐 수 없는데
목숨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면 하느님께서 주신 목숨에서 이탈하기에
아무리 애지중지하여도 그 목숨은 시들하게 될 것이고 죽게 될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각도를 약간 달리해서 성찰해봤습니다.
일생과 영생의 차원입니다.
일생, 한생, 한뉘, 일평생, 한평생은 모두 같은 뜻으로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살아 있는 동안'이라고 사전은 얘기하고,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삶'이라고 바꿔 이해해봤습니다.
그러면서 하루살이를 생각해봤는데
하루살이의 일생은 하루입니다.
그 하루살이를 보면서 우리는 참 무상하고 허무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영생의 하느님 또는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의 눈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일생이라는 것은 얼마나 무상하고 허무합니까?
우리의 일생一生은 그야말로 영원분의 일一에 불과한 생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이라는 표현을 쓰시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자기 목숨이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기 목숨이요
앞서 얘기한 일생 또는 한생을 말함인데 일생은 영생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은 일생이 아니라 영생이어야 하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목숨이어야 한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이고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과 모든 순교자들은 다
영생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은 사람들입니다.
바보가 아니고 자기를 진정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바보는 오히려 영생을 생각지 않고 그저 일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사랑해야 하고 자기 목숨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자기를 사랑하고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면
그 목숨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사랑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삶을 집착하고 안주하는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오늘 주님으로부터 가르침 받는 우리들이고
오늘 축일로 지내는 순교자들에게서 본을 받는 우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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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그들 중 5위(이일언, 신태보, 이태권, 정태봉, 김대권)가 1839년 전라도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날입니다.
이들은 한국초기교회의 순교자들로서, 시대로는 오히려 103위 성인보다도 앞서 사셨던 분들입니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는 병인박해 순교자 103위를 시성했으나,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교회를 일궈낸 이들이 누락되었다가, 2014년 프란치스코 교종에 의해 신해박해(1791)부터 병인박해(1866)까지의 124위 순교자들이 시복된 것입니다.
이들 중 최연소자는 12세로 이봉금 순교자이며, 최고령자는 75세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 순교자이며, 이들 가운데, 첫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은 이종사촌입니다.
전라도 진산 출신으로 1790년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신주를 불사르고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렀다가 체포령을 내려지자 자수했습니다.
1791년 12월 8일에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첫 기념일을 앞두고 당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 특별위원회 위원장 안명옥 주교님은 <특별담화문에서, 그들은 “신분 차별과 불평등, 가난이 일상화되었던 시대에 그리스도의 형제애를 보여주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었다”고 말씀하시면서, “복자들에게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그분들의 도움으로 우리도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자”고 권고하였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윤지충 바오로를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진산 군수가 “네가 사교(邪敎)에 빠져 있다는 게 사실이냐?”고 묻자, “저는 전혀 사교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천주의 종교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길입니다.” 라고 대답하였고, 또 다른 곳에 이송되어서도 “왜 사교에 빠져 방황하느냐?”고 문책하자, “저는 조금도 사교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사교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였다고 전합니다.
이는 그야말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대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는 말씀을 몸으로 보여줍니다.
곧 목숨을 바쳐 섬기는 순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섬김”이야말로 곧 “순교”입니다. “섬김”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섬김의 순교”를 통하여 복음이 증거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함께 있는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곁에 있는 형제를 종중하고,
함께 있는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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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역사상 유명한 천재 한 명을 뽑는다면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마 대부분 ‘아인슈타인’을 떠올릴 것입니다. 과학 일반, 특히 물리학 분야에 큰 공헌을 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현대의 기술 몇 가지는 그의 연구가 있었기에 가능할 정도로 그의 업적은 뛰어나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런 아인슈타인이기에 사람들은 그가 아주 뛰어난 천재이고 실수를 거의 하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하지만 그는 복잡한 수학 문제 풀기를 좋아했지만, 쉬운 문제는 잘 풀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 중요한 연구에서 계산상의 실수도 많이 범했습니다.
이렇게 실수가 잦았지만, 그 누구도 그를 실패자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는 사람은 새로운 시도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수가 있어야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넘어지는 실수를 두려워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이 아이는 걷지 못할 것입니다. 계속 넘어지고 넘어지면서 걷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도 이렇게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데, 왜 어른이 되어서 실수를 두려워할까요?
오늘 우리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미사를 봉헌합니다. 우리나라의 순교자들을 묵상해 봅니다. 그들 역시 처음에는 완벽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실수나 실패를 자주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존경받고 사랑받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주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너무 무섭고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배교를 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그렇게 실패했다고 주님께서 벌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 역시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배교를 했다가 곧바로 다시 순교를 선택하신 분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하셨던 우리 선조들의 신앙이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땅에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주님 안에서 힘을 얻고 참 기쁨의 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실수나 실패에 연연하지 않고, 사랑이신 주님을 굳게 믿으면서 생활해야 합니다. 우리도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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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결정의 순간에서 최선은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다. 차선은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이다. 최악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시어도어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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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먼저.
어떤 사람이 사소한 문제로 친한 친구와 크게 다퉜습니다. 그런데 다투는 와중에 ‘이게 이렇게 싸울 일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사과해야지.’라고 다짐을 했고, 정중하게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반응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친구는 정색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무슨 사과야?”
이 말에 화가 치밀어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내가 뭘 어쩌라고.”라고 말하면서 더 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누가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요?
둘 다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만,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질 수 있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내가 먼저 사과해야지.’라는 마음이 들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사과해야겠다’라는 생각에만 멈춰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잘못했다고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입으로만 하는 사과는 상대에게 아무런 감응도 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뉘우침도 혹시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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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밀알이 되어
‘봄에 씨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수고와 땀없이 무엇을 기대하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열매를 희망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 노력해야 합니다. 열매는 최선을 다한 후 따라오는 선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풍요로움도 그에 걸맞은 정성이 필요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그 선물의 소중함을 받아들이려는 수고의 몫은 우리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묵은 나는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이기적인 나‘에서 죽고, ’영적인 나‘로 거듭 태어나야 합니다. 내 뜻을 이루거나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따르는 것에, 모두를 걸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됩니다. 사랑과 헌신은 희망을 이룹니다. 시편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126)
희망을 오늘 여기서 살아냄으로써 기쁨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기념일(루카9,23-26)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영광
오늘은 잊었던 감격을 일깨우는 날이 되기를 희망하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론을 다시 묵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124위 시복식미사 강론 전문 (2014,8,16)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8,35). 성 바오로는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의 영광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 신앙의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과 결합시키시어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셨고, 그분의 승리는 또한 우리의 승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안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승리를 경축합니다. 이제 그분들의 이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 옆에 나란히 함께 놓이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저는 그분들에게 공경을 드렸습니다. 이 순교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환희와 영광 속에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함께 참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승리를 우리에게 선사하셨음을, 순교자들은 성 바오로와 함께 증언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순교자들의 승리, 곧 하느님 사랑의 힘에 대한 그들의 증언은 오늘날 한국 땅에서, 교회 안에서 계속 열매를 맺습니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이처럼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복자 바오로와 그 동료들을 오늘 기념하여 경축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여명기, 바로 그 첫 순간들로 돌아가는 기회를 우리에게 줍니다. 이는 한국의 천주교인 여러분이 모두 하느님께서 이 땅에 이룩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여러분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기를 촉구합니다.
하느님의 신비로운 섭리 안에서, 한국 땅에 닿게 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민족,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적 호기심과 종교적 진리의 탐구를 통해 촉발되었습니다. 복음과 처음으로 만난 한국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더욱더 많이 알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에 대한 무언가의 깨달음은 곧 주님과의 만남으로 이어져, 첫 세례들과 더불어 충만한 성사 생활과 교회적 신앙생활에 대한 열망, 그리고 선교 활동의 시작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전통적인 사회적 신분의 차별과 상관없이, 믿는 이들이 모두 한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던 초대 교회의 삶(사도 4,32 참조)에서 영감(靈感)을 받아, 한국의 신자 공동체들 안에서도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에게 평신도 소명의 중요성, 그 존엄함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저는 여기 있는 많은 평신도 여러분에게 인사를 드리며, 특별히 날마다 삶의 모범으로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화해시키시는 사랑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인 가정에 저의 인사를 전합니다. 또한 여기 있는 많은 사제들에게도 특별한 인사를 드립니다. 그들은 헌신적으로 행하는 직무 수행을 통해, 지난 세대의 한국 천주교인들이 일구어 온 풍요로운 신앙의 유산을 지금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진리로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그리고 세상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간청할 때, 아버지께서 우리를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기를 청하지 않으셨다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시어 세상 안에서 거룩함과 진리의 누룩, 즉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제시합니다.
이 땅에 믿음의 첫 씨앗들이 뿌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당신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요한 17,14 참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됨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것은 박해를 의미했고, 또 나중에는 산속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게 됨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즉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들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
또한 순교자들은 그들의 모범으로, 신앙생활에서 애덕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 증언의 순수성이었고, 세례 받은 모든 이가 동등한 존엄성을 지녔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대의 엄격한 사회 구조에 맞서는 형제적 삶을 이루도록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을 분리하는 데 대한 그들의 거부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형제들의 필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들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에게 뻗치는 도움의 손길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요구하시며, 그렇게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오늘의 이 경축을 통하여, 이 나라와 온 세계의 헤아릴 수없이 많은무명 순교자들을 마음에 품고 기리고자 합니다. 특별히 지난 마지막 세기에,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쳤거나 그분의 이름 때문에 모진 박해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이름 없는 순교자들을 기리며 기억합니다.
오늘은 모든 한국인에게 큰 기쁨의 날입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 순교자들이 남긴 유산, 곧 진리를 찾는 올곧은 마음, 그들이 신봉하고자 선택한 종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그들이 증언한 애덕과 모든 이를 향한 연대성, 이 모든 것이 이제 한국인들에게 그 풍요로운 역사의 한 장이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유산은 선의를 지닌 모든 형제자매들이 더욱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화해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 서로 화합하여 일하도록 영감(靈感)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와 온 세계에서 평화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인간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전구와 더불어 모든 한국 순교자들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온갖 좋은 일과 믿음 안에서, 또 한결같이 거룩하고 순수한 마음과 사도적 열정 안에서 항구함의 은총을 받아, 사랑하는 이 나라에서부터 아시아 전역을 거쳐 마침내 땅끝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증언하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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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24-26: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오늘은 한국천주교회의 초기의 순교 복자들 124위,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떼르뚤리아누스 교부는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다.』(호교론 50,13) 했듯이 이분들은 참으로 우리 한국천주교회의 씨앗이 된 분들이다. 지난 2014년 8월 16일 서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주례로 시복되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 우리 순교자들은 모두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한 알의 밀알이었다. 그 밀알이 죽음이라는 행위를 통해 다시 살아나 많은 열매를 맺었다. 오늘의 한국천주교회의 모습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신 길과 같다. 예수께서 지상 생활을 하실 때는 하느님의 영광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십자가와 부활의 열매로 모든 이가 그분을 알게 되었듯이 순교자들의 피는 이렇게 열매를 맺은 것이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 이 말씀의 의미는 이렇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자신의 삶에 대해 과도한 욕망에 빠짐으로써 자기를 파괴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돈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자기 자신이 파멸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이러한 집착에서 자유로우며 진정으로 하느님 안에 살아있는 사람이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위해 우리 자신을 이겨 나가야 한다. 순교자들이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늘 하느님의 뜻 때문에 자신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 그분을 올바로 섬기려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다.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그분이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1요한 2,6 참조). 사랑을 실천할 때, 선을 행하려는 뜻 말고 다른 의도가 있어서는 안 되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마태 6,3 참조).
오늘의 순교 복자들처럼,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면서 그분을 닮도록 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으며, 당신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위해 가장 큰 사랑을 드리셨다. 우리가 지금 순교 정신을 산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같이 나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끊고 나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실현하며 그분을 체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분의 길을 가지 못하면서 그분을 따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삶으로 순교자들을 기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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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새로운
시대는
그냥 오지
않는다.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고
누군가의
순교가 있었다.
신앙은
실천이다.
이 땅에서의
실천이다.
우리가
직면하는
현재의
절박한
실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실천으로
어둠을 밝히신다.
실천이 빛이며
빛을 따르는
순교는
낡은 가치를
갈아엎는
새로운 실천이다.
또다른 삶이
있다.
욕망을
치유하는
순교이다.
순교는
삶의 씨앗이며
믿음의 씨앗이다.
신앙의 방향을
바르게 잡아주는
밀알 하나이다.
순교의 영성은
더 좋은 세상을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나가는
성장의 영성이다.
참된 영성은
사악한
우리마음을
선하게
변화시킨다.
순교의 출발점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일깨워주는
삶의 출발점이다.
이 땅의
복자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들은
인간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구원은 현실을
변화시키는
뜨거운 삶이다.
뜨거운 삶은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게 하는
순교의 참된
안목이다.
사악함이 아닌
참됨의 가치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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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정방문을 다녀왔습니다. 2012년 본당사목을 마치고 가정방문을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교구청에 있었고, 지금은 신문사에 있기에 가정방문을 다닐 기회가 없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미사를 도와 드리면서 가정방문을 요청받았고, 다녀왔습니다. 집에는 몸이 불편하신 형제님과 형제님을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함께 갔던 자매님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성당에 아버지가 계신 것 같습니다.” 계속 손님신부님이 미사를 봉헌했기에 가정방문을 부탁드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몸도 불편하셨고, 코로나19의 위험 때문에 1년 동안 밖으로 나가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함께 기도하고, 성체를 영해 드렸습니다. 형제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성체를 모셨습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저를 필요로 한다면 가정방문을 다니면서 몸이 불편하신 분들에게 성체를 영해 드리려고 합니다.
본당에 있을 때는 한 달에 한번은 봉성체를 다녔습니다. 주로 어르신들이 많았습니다. 침대에 누워계시는 분들이 있었고, 기억을 잃어버린 분도 있었습니다. 뇌수술을 하였던 학생도 있었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직장을 다니다가 사고로 목발에 의지하는 청년도 있었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명으로 걷지 못해서 휠체어에 의지하는 젊은이도 있었습니다. 모두들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모셨습니다. 목발에 의지하지만 새로운 직업을 구했다는 청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저도 기뻤습니다. 수술 경과가 좋아졌다는 학생이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다고 좋아했을 때는 저도 좋았습니다. 평생 걷지 못하는 자매님이 밝은 모습으로 제게 인사할 때면 가슴이 찡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기다리면서 성체를 모시던 분들이 생각납니다.
예전 세검정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근육이 마비되는 증상이 있어서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젊은이가 제게 시를 하나 주었습니다. 비록 몸이 불편해서 자유롭게 다닐 수 없었지만 젊은이의 영혼은 저보다 훨씬 자유롭고, 고결했습니다. 오늘은 그 친구가 제게 주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세상은/ 별들이 많은/ 은하수 같은 것입니다.
별들이 많기에/ 밤하늘이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 뒤에는/ 우주라는/ 어두운 하늘이 있습니다.
별들이 밤하늘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겁니다.”
현대사회는 성공, 1등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꽃밭의 꽃들은 서로 자기가 1등이라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색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꽃밭에서 성공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장애인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부활 찬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 그리스도의 죽음이 씻은 죄. 오, 복된 탓이여! 너로서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모든 인간은 흔들리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신앙은 1등만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실패와 허물을 보듬어 주는 것입니다.
저의 삶에도 바람이 있었습니다. 서품을 받은 후 유행성 출혈열에 걸려서 20일간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IMF의 거센 파도가 저에게도 밀려와서 대출을 받았습니다. 다리가 골절돼서 15일간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혈압도 높고, 치아도 좋지 않은 편입니다.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이 세상 모든 꽃은 흔들리며, 비에 젖으며 피듯이 우리의 삶도 그렇게 흔들리며,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시련을 통과하면 생명의 화관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축일로 기억하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쳐서 신앙을 증거하였고,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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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봉헌의 삶
- 날마다 성전 봉헌 축일이다 -
올해는 요셉 수도원이 개원한지 만 34년(1987년3월19일)이 되는 해이고, 제가 부임후 정주한지 만33년(1988년7월11일)이 되는 해입니다. 오늘은 제15주년(2006.5.30.) 요셉수도원 성전 봉헌 축일이요 내일이 주일이기에 하루 앞당겨 거행하는 축일 미사전례입니다. 설레는 마음에 일어나니 시원한 바람에 새벽 정원에서 올려다 본 달밤의 밤하늘은 유난히 밝고 맑았습니다. 문득 24년전 쓴 ‘정주’란 짧은 시가 생각났습니다.
-“산처럼
머물러
정주의 삶을 살면
푸른 하늘
둥근 달
빛나는 별들
아름다운 하느님
배경이 되어 주신다.”-1997.8.11.
시를 읊으니 온통 행복감에 가득 젖어드는 기분이었습니다. 흡사 제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처럼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정주 수도승의 하느님 사랑은 구체적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수도원을, 성전을, 수도원 자연경관을, 수도형제들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고 특히 매일 평생 끊임없이 거행하는 성전 전례를 사랑합니다. 이런 사랑이 참으로 우리 삶을 온통 아름답게 만듭니다.
요즘 참 아름다운 계절에 사랑을 사진에 담기가 참 바쁩니다. 날마다 담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지만 늘 새롭고 좋습니다. 산책하며 꼭 사진에 담는 순서는 ‘예수성심상 앞 기도하다가 바위가 된 형상의 사람’, ‘수도원 하늘길’, 마지막으로 불암산 배경의 ‘수도원 성전’입니다. 어제는 막 피어나기 시작한 수녀원 담벼락을 넘어 온 ‘장미꽃들’도 사진에 담았습니다.
오늘은 저는 물론 우리 수도형제들과 무수한 은인들이 참으로 사랑하는 우리 요셉 수도원의 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많은 자매들이 ‘친정집에 오는 것 같다’, ‘올케 없는 오라버지 댁에 오는 것 같다’, 또 많은 형제자매들은 언제 봐도 그립고 좋은 ‘옛 고향집에 오는 것 같다’ 고백하는 참 정겹고 아름다운 요셉 수도원입니다.
참 아름다운 말마디가 봉헌이요 봉헌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처럼 성전정화에 관한 것입니다. 어제는 마르꼬 복음이고 오늘은 요한복음이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새삼 날마다 성전 봉헌 축일이자 성전 정화 축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이며 우리 하나하나도 주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니 매일 성전 봉헌 축일 미사를 드리며 우리의 봉헌을 새로이 할 때 저절로 뒤따르는 성전정화의 은총입니다.
어제 읽은 어린왕자 책중 아름다운 부분을 인용합니다. ‘별들’이, ‘사막’이, ‘낡은 집’이 상징하는 바 봉헌 축일을 지내는 우리 성전이자 또 주님의 성전인 보물같은 우리들 모두입니다.
-‘그러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어린왕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별들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한 송이 꽃 때문에---”
나는 “그렇지.”하고 대답하고는 말없이 달빛 아래서 주름처럼 펼쳐져 있는 모래 언덕들을 바라보았다.
“사막은 아름다워.” 어린왕자가 다시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언제나 사막을 사랑했다. 사막에서는 모래 언덕 위에 앉아 있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인가 침묵 속에서 빛난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것이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지---”
나는 사막의 그 신비로운 빛남이 무엇인지를 문득 깨닫고 흠칫 놀랐다. 어린 시절, 나는 오래된 낡은 집에서 살았다. 그 집에는 보물이 감춰져 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었다. 물론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것을 찾으려 든 사람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보물로 하여 그집 전체는 매력이 넘쳤다. 우리 집은 저 가장 깊숙한 곳에 보물을 감추고 있는 것이었다.‘-
참 아름답고 깊은 상징들을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이런 별들이, 사막이, 매력이 넘치는 집이, 무엇보다 어린왕자가 그리운 시절입니다. 깊이 잘 들여다 보면 예수님이, 봉헌의 삶을 사는 우리 하나하나가 어린왕자요 별이요 사막이요 집일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품고 살아가는 별이, 샘을 품고 살아가는 사막이, 보물을 품고 살아가는 집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영원한 생명의 주님과 함께 봉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를 모르고 무지의 어둠 중에 참으로 아까운 선물의 삶을 기쁨도 감사도 없이 무기력하게 탕진하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무하겠는지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흡사 지구별에 온 어린왕자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심각하고 위태한 성전 속화俗化의 현실에 의노義怒하지 않을 수 없는 어린왕자 예수님입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하고 이르셨다.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흩 안에 다시 세우겠다.”-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可視的 성전과 더불어 참으로 매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성전을, 그리고 우리 하나하나 존재의 성전을 지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의 주님의 집 성전에서 세상을 향해 흐르며 모두를 살리는 ‘생명수生命水의 강’은 그대로 이 거룩한 성전 미사전례 은총을 상징합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성전 봉헌奉獻을, 성전 정화淨化를 이뤄줌으로 우리 모두 세상을 살리는 '생명수의 강'이, 또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삶의 예술가’가 되어 살게 합니다. 언젠가 자매와 나눈 카톡 덕담도 생각납니다.
-“자매님은 참 아름다운 ‘삶의 예술가藝術家’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어머나---감사합니다! 항상 격려해 주시고. 칭찬해 주시니 아침부터 힘이 납니다. 오늘도 새날을 주신 주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사막같은 세상에서 주님의 생명수가 되어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 참 아름다운 삶의 예술가들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입니다. 바로 오늘 이 성전 봉헌 축일에 봉헌의 서원을 새롭게 하는 스테파노 수사님과 마르꼬 수사님도 참 아름다운 ‘삶의 예술가’이자 ‘삶의 프로’로 손색이 없습니다. 두 분 서원 갱신 증서를 인용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저는 50년전 1971년 존경하는 오도환 오도 아빠스 앞에서
정주하고 수도승답게 생활하며 순명할 것을 서원했습니다.
오늘 다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서원을 새롭게 합니다.
2021년 5월20일
남양주 성 요셉수도원에서
김기룡 스테파노 수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저는 40년전 1981년 존경하는 이동호 아빠스 앞에서
정주하고 수도승답게 생활하며 순명할 것을 서원했습니다.
오늘 다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서원을 새롭게 합니다.
2021년 5월29일
남양주 성 요셉수도원에서
안대해 마르꼬 수사-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짧아서 슬프고도 아름다운 인생이요 세상입니다. 삶의 무상無常함에서 빛나는 생명과 사랑의 아름다움입니다. 이미 윗 두 아빠스님은 세상을 떠난지 오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요셉수도원 성전 봉헌 축일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아름다운 삶의 예술가가 되어 아름다운 성전봉헌과 성전정화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감동적인 ‘수쉬페(Susclpe)’로 우리 봉헌을 새롭게 합시다.
-“주님, 주님의 말씀대로 저를 받으소서, 그러면 저는 살겠나이다. 주님은 저의 희망을 어긋나게 하지 마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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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어 가는 씨앗’을 통하여 추수철에 많은 결실을 내는 이야기는 복음서에 자주 나옵니다(마태 13,3-9; 마르 4,3-9 등 참조).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이를 부활과 영원한 행복에 적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15,35-44 참조).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목숨을 바쳐 많은 이에게 자신의 신앙을 증언한 순교자들의 모범은 ‘땅에 떨어져 죽고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103위 순교 성인들과 오늘 기념하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의 동료 순교자들은, 테르툴리아누스 교부가 말한 대로 ‘교회의 씨앗’임이 틀림없습니다. 순교자들은 박해자들의 온갖 회유와 궤변에도,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이신”(5월 29일 성무일도, 독서 기도, 제2독서) 하느님을 결코 배신할 수 없음을 담대하게 밝히며, 죽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굳게 지켰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루카 21,15)로, 소중한 목숨을 바쳐 자신들의 신앙을 끝까지 증언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 앞에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의 믿음을 통하여 우리도 이 세상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증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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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녀를 어른으로 대하지 않으면 벌어지는 일>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그렇지만 복음의 흐름상 복음 묵상은 연중 제8주간 토요일로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신 다음 유다 지도자들이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는 거냐는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한은 분명 하늘에서 오는 것이지만 그들이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 하나를 물으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권한입니다.
그들은 요한의 권한이 하늘에서 온다고 하면 그가 증언한 당신을 왜 믿지 못하느냐고 말할 것을 알고 또 땅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면 군중에게 욕을 먹을 것 같아서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당신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인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유다 지도자들도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피를 받을 자격이 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냉혹하다시피 대하십니다.
자녀에게는 무조건적으로 내어주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자녀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내어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사랑이고 자녀를 위해서도 부모를 위해서도 좋습니다. 우리나라 많은 부모들은 많은 경우에 자녀들을 끝까지 자신의 품에서 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자녀들도 정서적으로 독립할 수 없고 그렇다면 아기가 부모에게 끊임없이 요구하듯 그 요구를 들어주다가 부모는 피가 마르고 맙니다.
박애희 작가의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떠나간다』의 ‘모든 것을 주면 떠나버리는 사랑의 슬픈 법칙’이란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여기에는 부모와 자녀의 이상한 법칙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버스 기사님이 오른편 맨 앞자리에 앉아계신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분은 같은 동네에 사는지 무척 가까워 보였다.
“어무니, 그래서 결국 준겨?”
“아니, 그럼 어떻게? 죽는소리를 하는데!”
“아이고, 내가 안 된다고 했잖여. 봐봐. 이제 아드님이 찾아오는지.”
“그러게. 나도 영 안 돼 보이긴 해서 주긴 했는데, 이젠 통 연락이 없더라고.”
“그게, 그런 거여. 어무니. 부모는 돈이 힘이여! 그걸 미리 다 줘버리면 부모를 잊는다니까!”
“그래도, 갸가 마음은 여려.”
“아니, 마음이 여린데 어머니 돈 다 가져가 버린대?”
“지 사는 게 영 마뜩치 않으니까 그런 거지 뭐. 아니, 이번 한 번 만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안 줘.”
“아이고, 어무니도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디다 쓴데? 아니, 지난번엔 첫째한테도 다 퍼줬으면서….”
“어떻게 안 줘? 자식 앞에서 모진 부모가 어딨게? 아, 그라고 이제는 더 주고 싶어도 줄 게 없어.”
“아휴, 어머니가 우리 엄니였으면 좋컸네유. 아참 어머니 병원 가시는 길이라고 했죠? 무릎은 어떠신겨?”
[출처: 유튜브 채널, ‘책 읽는 다락방 J’]
대화는 이어지지만 여기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모님들은 다 위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시겠지만 저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은 어머니가 무릎이 아파서 병원에 다니는 데도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어머니의 돈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에는 부모의 책임도 적지 않습니다. 자녀를 아직도 품에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품에 안긴 자식은 ‘모기’입니다. 부모로부터 당연히 받아야 하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합니다. 하지만 자녀가 세상에서 독립적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부모는 자녀를 정서적으로 독립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과 똑같은 ‘어른’으로 대해야 합니다. 돈을 받을 자격이 있어야 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12살이면 부모는 자녀에게 유산까지 주고 모든 관계를 청산합니다. 자녀를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녀들도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삶에 책임을 지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진리를 청하는 유다인들에게 ‘No!’ 하십니다. 당신에게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진실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른 취급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이 취급은 어린이 때면 충분합니다. 어른 취급을 할 때 자녀도 부모를 어른으로 대하게 됩니다.
결국, 자녀들을 정서적으로 독립시키지 않은 부모는 어떻게 될까요? 계속 젖을 찾고 젖이 나오지 않으면 젖꼭지를 물어버리는 아이처럼 됩니다. 부모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끝까지 주다가 죽는 것이 부모의 삶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자녀에게 좋지 않습니다. 자녀를 영원한 어린이로 만들어버리고 결국엔 다 주어도 자녀는 부모에게 감사할 줄 모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의 한 에피소드를 읽어봅시다.
이 책의 작가인 김새별은 고독사나 자살 등으로 돌아가신 분의 유품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독특한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무엇이 그리 급했던 것일까? 작업절차를 채 설명하기도 전에 유족들은 우르르 안방으로 몰려갔다. 장롱문을 열어젖혀 이불 사이를 뒤지고 서랍을 빼내어 바닥에 뒤엎었다. 남자 여자 총 다섯 명, 서로를 부르는 호칭으로 보아 고인의 딸과 사위, 아들인 듯했다. 무슨 유서를 저리 요란하게 찾는 건가 했는데, 집문서 운운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어디다 숨겨놓은 거야?”
“금반지랑 금두꺼비도 있다더니 없는데?”
안방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가족들은 나머지 방과 거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전달해줄 것을, 가족들은 집 안을 뒤죽박죽으로 헤집으며 청소만 어렵게 만들어놓고 있었다. 아무리 의뢰인이고 소중한 고객이지만, 저런 사람들을 위해 청소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문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한 뒤 밖으로 나왔다. 찌는 듯한 여름이라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흘렀다. 그렇게 삼십 분이 넘게 지났을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이웃들이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작업을 마쳐야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마침 가족들이 나오는 참이었다. 원하는 것을 못 찾았는지 얼굴들에 짜증이 서려 있었다. 첫째 사위인 듯한 이가 물건이 나오면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다. 물론이었다. 앨범, 휴대전화, 신분증, 각종 서류, 통장, 현금, 귀중품 등은 요청하지 않아도 확실히 전달한다.
가족들이 어지럽혀놓은 통에 집 안은 더욱 정신이 없었다. 구역을 나눠 인원을 배정하고 유품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 유품을 담은 박스들을 차량에 실으라고 지시한 후, 정리 중에 나온 앨범과 사진 액자를 닦았다. 전해주기 위해 나가 보니 아파트 입구 쪽에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다른 물건은 없고 이것만 나왔습니다.”
딸이 실망한 얼굴로 액자와 앨범을 받아들었다. 순간, 아들이 그것을 냅다 빼앗아들더니 한쪽에 세워두었던 우리 차량 적재함으로 집어 던졌다.
“냄새도 심한 걸 뭐하러 가지고 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액자 유리가 깨졌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꺼림칙하다면 사진만 빼서 간직해도 될 것을. 나는 적재함으로 뛰어올라가 액자를 집어들었다.
“사진만 빼내면 괜찮을 겁니다.”
그러고는 사진을 빼기 위해 액자 뒷면을 떼어냈다. 그 순간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현금과 봉투였다. 액자 안의 스티로폼 중간 부분을 잘라내고 넣어놓은 것이었다. 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적재함 바닥으로 쏠렸다. 아들이 뛰어왔다. 돈과 봉투를 주워들고 막 건네려는데 아들이 휙 낚아채 갔다.
가족들이 모두 다가오고, 아들은 돈을 세기 시작했다. 오백만 원이라고 했다. 봉투에는 집문서가 들어 있었다. 나는 아들에게 사진을 내밀었다.
“이것만이라도 간직하시죠.”
아들은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스스로도 민망했는지 마지못해 받아들었다. 그에게는 집문서와 현금만이 중요했다. 그 돈은 장례비용이었으리라. 죽는 순간까지 남겨진 자식들을 걱정하는 것이 부모다. 부모의 사진을 버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현금과 집문서를 액자에 넣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은 고인의 사진을 더도 덜도 아니게 쓰레기 취급했다.
아버지가 홀로 살다 돌아가시고 스무날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는데 누구 하나 슬퍼하지 않았다. 고인의 시신을 처음 발견한 것도 자식이 아닌 옆집 할아버지였다. 이런 경우 조금 더 일찍 발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애초에 죽음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자책하느라 가족들은 가슴 아파한다. 그런 가족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워서 과연 위로가 될까 회의하면서도 위로의 말을 건네곤 했다.
그러나 그날은 가슴 아파하는 가족도 없었고 그러니 위로의 말을 건넬 필요도 없었다. 처음으로 사람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혼이 있어서 고인이 지켜보고 있다면 그 심정이 어떨 것인가. 보는 이의 마음이야 어떻든 원하는 것을 얻은 가족들은 이제 볼일이 끝났다는 듯 총총히 사라졌다. 나만이 쓸쓸함을 감추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참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냉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부모가 자녀를 끝까지 자신의 자녀로 품고 있으려고 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주님께 봉헌하거나, 적어도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처럼 독립적인 존재로 대하지 않으면 자녀는 결국 부모를 이렇게 대하게 될 것입니다. 부모는 죽어가면서도 여전히 자녀들에게 피를 빨릴 존재이고 더는 피가 나오지 않으면 버려질 존재일 뿐입니다.
자녀가 모기의 본성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어느 순간이 되면 자신과 같은 동등한 존재, “네가 말 안 하면 나도 안 해!”라는 식으로 대해야 합니다.
부모가 먼저 자녀를 동등한 어른으로 대하지 않으면 자녀는 끝까지 부모를 자기가 아기였을 때처럼 대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셨고, 예수님도 당신을 찾는 부모에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만이 결국 자녀가 부모 또한 자신과 동등한 하느님의 자녀인데 자신을 무상으로 키워준 것에 대해 감사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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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 복자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124위의 복자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순교자들입니다.
이들의 순교 행적을 기리는 데 있어 언급해야 할 중요 사건은 진산 사건입니다.
이는 1791년 신해(辛亥)박해의 계기가 된 사건으로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와 권상연(權尙然) 야고보가
제사를 폐하고 신주(神主)를 불태워 버린 사건을 말합니다.
그들은 그 전 해인 1790년말에 당시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교회에 내린 제사금지령에 따라 행한 것인데, 이것이 당시 조선 조정과
유림들에게는 충효의 유교이념을 국시로 하는 조선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치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1791년에 일어난 신해박해인데, 이후로도 여러 박해가 연달아
일어나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치명했고, 특히 1801년 신유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 때 가장 많은 교우들이 치명하였습니다.
이 치명자들이 2014년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하여 8월 16일에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되었습니다.
이들은 이 땅에서 우리 민족이 하느님 신앙의 진리를 믿을 수 있도록
땅에 떨어진 밀알이었습니다.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듯이,
현재 이 땅에서는 하느님을 믿는 천주교 신자들이 5백만여 명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이 박해들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믿는 신앙의 길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에 중국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유학의 이치를 통해 천주교 교리를 펴는 보유론적 자세를
우리 선각자들이 도입했기 때문에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드려야 할 제사를 조상들에게 바칠 수 없다는 취지에서
내려진 조상제사금지령 때문에 양반층 신자들은 대부분 떨어져나갔고
중인 이하 서민층에서는 오히려 신자들이 늘어났습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생긴 이러한 특이한 현상은 조상에게 드러야 할
효의 가치나 이의 사회적 연장으로서 드러내야할 충의 가치를 조상이나
임금보다 더 높으신 하느님께 드려야 한다는 호교론적 자세로 드러났고,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옹호하던 당시 천주교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중인 계급 이하 서민층에게서도 폭넓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왜냐하면 지배층에 의해서 억압되어 왔지만 일반 백성 안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하느님을 숭상하는 신앙이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박해 기간 중에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과 교도권 당국에서는
이러한 전통적인 신앙의 토양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당시 서양에서 정착된
천주교 교리를 도입하였고, 이렇듯 한국인의 문화와 종교 사상에 대한 무지는
박해가 끝나고 일제 식민통치가 지속되는 동안과 방인 주교들로 교체된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이렇듯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이 유교문화 속에서
커다란 갈등과 끔찍한 박해까지 겪으면서 정립시킨 초창기 하느님 신앙이
선교사들이 교회를 주도하는 시기를 맞아 계승되지 못하고 중단된 것은
아시아 복음화에 관한 서구 라틴 교회의 일반적 조류와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서 안타깝고도 숙제를 남기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복음이 각 민족의 문화전통 속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토착화 노선이 공식적으로 승인됨에 따라서,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시작한 신앙의 토착화 작업은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하느님을 이 땅에 사는 우리 민족의 언어, 마음, 영성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존재로 뿌리내리는 사명은 민족 복음화의 고유한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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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김 로마노 형제님.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요한12,24-26)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4ㄴ)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즉 당신 자신의 대속(代贖)적 죽음이 갖는 의미를 밝히기 위해 이러한 관용구를 사용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죽음이 가져오게 될 놀라운 결과에 대해 씨와 열매의 비유를 통해 알게 하신다.
여기서 '맺는다'에 해당하는 '페레이'(pherei; it produces; it brings forth)는 '페로'(phero)의 3인칭 단수 현재 시제로서 땅에 떨어져 죽은 씨앗에서 열매 맺는 것은 불변의 진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 세상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전환점이 되는데, 그것은 '많은 열매'로 언급된 영혼 구원의 역사이다.
많은 영혼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유와 평화로 나아가게 될 것이 이 말씀 속에 함축되어 있다.
또한 '열매'로 번역된 '카르폰'(karpon; fruit)은 '카르포스'(karpos)의 단수 목적격인데, 나무의 열매나 자손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비유적으로는 영적인 차원에서의 '결실', '산물'이라는 뜻으로도 좋다.
70인역(LXX)에서는 이 단어가 히브리어 '페리'(pheri)의 번역어로 나타난다.
'페리'는 '자손'을 의미하지만, 비유적으로는 '행위의 열매'를 나타낸다(예레6,19; 호세10,13).
그래서 여기서 '많은 열매'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으로써 온 세상에 흩어진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게 될 것이라는 뜻이 전달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다(요한11,52).
그리고 또한 예수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믿음의 자녀들이 그분의 삶을 본받아 이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켜 갈 것이라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
그들은 예수님의 전(全)인격을 본받게 되기에, 그들을 통해서 일어날 새로운 변화들이 기대된다(마태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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